나선정벌(羅禪征伐)
〇 1658년 나선정벌(羅禪征伐)
- 1658년 6월 10일(음력) 흑룡강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이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기 위한 전투 나선정벌
- 당시 러시아에겐 아시아 진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던 나선정벌, 하지만 조선군의 조총수를 앞세운 조·청 연합군의 활약으로 단 하루만의 전투로 승리는 했지만, 병자호란의 주범으로 원수인 청(淸)을 도와 전투에 나서야 했던 조선군, 조선에게 나선정벌은 어떤 의미였을까?
- 무찌르자 오랑캐! 나선정벌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투 나선정벌, 나선(羅禪)은 러시아의 음역(音譯)으로 말 그대로 러시아를 정벌한 전투, 혼동할 수 있는 것은 근대사에서는 러시아를 ‘아라사’라고 불렀기 때문에 혼선이 있을 수 있다는 것
※ 아관파천 : 을미사변 이후 신변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공관을 러시아로 옮긴 사건
- 조선시대 정벌이라는 용어마저 생소한 나선정벌, 러시아가 우랄산맥을 넘어 흑룡강까지 남하(南下)하여 청나라 땅을 약탈하면서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
- 러시아 침공을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청(淸), 조선은 함경도 지역 군사를 모아 회령지역에 결집을 시키고 청군의 사령부가 있던 영고탑까지 이동을 하게 되는 것
- 나선정벌의 전투지는 어디?
1차 나선정벌(1654. 4. 28)은 배를 타고 송화강과 목단강의 합류지점인 왈합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러시아군의 후퇴로 일단락을 맺고, 2차 나선정벌(1654. 6. 10)은 보다 위쪽의 흑룡강과 송화강 합류지점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승리
- 병자호란 당시, 청(淸)은 조선의 군사력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을 요청한 이유는?
병자호란의 패전 정축조약으로 청(淸)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실은 파병(派兵)이 아닌 징병(徵兵)이라 할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징집이라고 표현.
〇 나선정벌 전투결과 분석
- 1·2차 정벌에 나서 조·청연합군이 모두 승리하는데 함대·병력면에서 우세했던 것, 지난 3년 동안 러시아에 패전을 거듭한 청나라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우면서 조선의 조총수들의 능력을 인정하여 30여 년 전(前) 적군이었던 조선군을 끌어 들인 것.
- 2차 나선정벌을 이끈 신유장군의 참전일기인 <북정론>에는 “1658년 6월 10일 아침 일찍 마을을 출발하여 흑룡강을 따라 20여리를 내려갔다. 적선(敵船) 11척이 흑룡강 한 가운데 닻을 내리는 것을 보고 아군은 즉각 달려들었다. 조청연합군의 1차 작전으로 일제히 대포를 쏘며 공격을 개시했으나 배가 크고 견고해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어 선택한 작전은 조선 조총수를 앞세운 근접전, 조선 조총수의 등장에 러시아군이 당황하자 갈고리를 걸어 적선(敵船)을 끌어당긴 조선군은 백병전(白兵戰)으로 이어갔다. 연합군은 모든 적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불화살을 이용하여 화전(火戰)을 쏘았다. 날아온 불화살에 적선 7척이 전소(全燒)되고 조청연합군의 완승(完勝)이었다.”
- 나선정벌 승리에 큰 역할을 한 조선 조총병
<북정론>에서는 전투 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난중일기>에 버금갈 정도로 꼼꼼하게 기록되어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고향을 낱낱이 기록, <난중일기>의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점이 많은 신유장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해전(海戰)에 참여하기 전 두만강 하류 녹둔도 지역에서 수전(水戰)을 치르면서 능력을 발휘했듯이 실제로 신유장군도 훗날 숙종(肅宗)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오른다.
〇 나선정벌 승리의 주역, 조선 조총병
- 당시 러시아군의 주요 무기는?
조선군의 조총 VS 러시아군 조총, 조선군의 화승총 작동원리는 불이 붙은 심지로 화약에 점화하는 방식, 반면 러시아군은 수석식 소총으로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켜 화약에 점화하는 방식으로 화승총보다는 사격속도가 2~3배 빠르고, 즉각 대응이 가능하여 무기만 봤을 때는 러시아군이 우세
- 수석식 소총을 든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한 이유는?
무기의 열세를 뛰어넘은 조선 조총병의 사격술은 흔들리는 배에서도 정밀하게 쏘는 타격능력이 좋았던 것, <북정론>에 기록된 조선 조총병의 사격능력은 당시 조선군에게 조총시범을 요청한 청나라, 60보 거리에서 3치(10Cm) 표적을 세우고 3발 사격을 하는데, 청군 포수 100여 명 중 과녁을 맞힌 자는 약간(若干) 명에 불과했으나, 조선포수는 260 여 명이 100명씩 조를 편성해 3발 중 1발 이상 명중한 사람이 각 조에서 60명 이상으로 신유장군 스스로도 만족했다고 기록
〇 조선과 러시아와의 첫 만남, 나선정벌
- 러시아인을 처음 본 조선군?
청나라 파병칙서를 받고 ‘나선’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조선의 효종(孝宗) “왕이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한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하였다” <효종실록 1654년 2월 2일>
-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선정벌에 관한 기록이 묘사되어있는데 “적은 신장이 10척이나 되며 눈은 길고 깊으며 털은 붉고 수염은 헝클어져서 마치 해초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다.”고 표현하는데 2m가 넘는 러시아인의 키에 놀란 조선인
- 나선정벌에서 맞닥뜨린 러시아군의 정체는?
당시 러시아 주력군은 카자크 부대로 15세기 남부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자유민집단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유라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카자크는 용맹스럽고 모험심이 강한 전사 집단으로 러시아 정부는 그들을 자신의 정군(正軍)에 편입시킴.
※ 영화 <대장 부리바>는 폴란드 제국에 맞서 싸운 카자크 부대를 그린 전쟁 영화
- 러시아가 흑룡강까지 진출한 이유는?
당시 몽골세력이 쇠퇴하면서 러시아는 동쪽으로 진출하기가 쉬워졌던 것, 그래서 16세기 후반(後半)이 되면 서부 시베리아지역을 점령하게 되는데 러시아 동진(東進)의 주원인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화폐로 쓰였던 모피, 러시아의 옛 화폐단위 쿠나는 흑담비 쿠니챠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피를 찾아서 온 것, 그런 과정에서 흑룡강(아무르 강) 유역이 식량자원이 풍부하고 은광(銀鑛)도 있다는 소문을 들은 러시아는 카자크를 앞세워 남하하기 시작하여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상황
- 러시아는 당시 조선에 대해 알고 있었나?
조선이나 러시아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상황, 당시 현지 주민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카자크들이 조선인을 얘기하면서 “대두인(大豆人)들이 무섭다” 대두인은 벙거지 같은 전립(戰笠)을 썼던 조선의 조총수를 가리키는 말로 조선군의 백발백중 사격술에 러시아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
※ 전립(戰笠) : 짐승의 털을 짓이겨 만들며 가벼우면서도 방탄 기능이 뛰어나고 요즘의 방탄조끼도 같은 원리로 제작.
- 러시아 역사에서 보는 나선정벌의 의미는?
러시아와 조선의 공식적인 최초의 만남, 1658년 2차 나선정벌 후(後) 러시아는 흑룡강 북쪽으로 후퇴하고 몇 차례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흑룡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청나라로 획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현재 중국과 러시아 국경선의 바탕이 된 나선정벌
※ 네르친스크 조약 : 청과 러시아가 네르친스크에서 맺은 국경 획정 조약
〇 조선 병사(兵士)들의 안타까운 죽음
- 신유 장군의 참전일기 “1658년 6월 10일, 전투 당일 조선군 7명의 전사는 청 사령관의 무모한 작전으로 내 말대로 적선(敵船)을 불태웠다면 모두 살아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날이 되자 청 장수는 전사한 조선 포수들을 화장하라고 명(命)했지만, 우리 풍습대로 매장하게 해달라고 했다. 설득 끝에 전우들을 흑룡강성 주변에 묻어 주었다. 멀리 이국땅에 와서 모래 벌 속에 묻힌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측은하다” <북정론>
- <북정론>에서 병사들의 죽음에 분노한 신유장군, 원거리에서 불화살로 적(敵)의 함선(艦船)을 먼저 불태우고 소탕하는 게 유리하였으나, 청(淸)의 사령관은 러시아 배위의 재물을 탐내 적선(敵船)을 태우지 못하게 하고 배위에 직접 올라가 제압하라고 명령하여 근접전을 벌이다가 선봉에 있던 조선군 7명이 숨어있던 러시아군 사격으로 전사하게 되는 것 “대장이 탐재지심으로 불태우지 말라고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처사였다. 일시에 적선(敵船)들을 불태웠다면 적병(賊兵)을 모두 소탕하고 우리 또한 모두 살았을 텐데···” <북정론>
- 당시 조·청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사이호달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장수였으므로 신유장군의 입장에서는 사이호달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릴 수도 있었을 것
- 조·청연합군의 지휘권은 누구에게?
대등한 나라끼리 연합군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당시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이었기 때문에 260명을 독립부대로 둔 것이 아니고 8기군의 부대에 나눠 배치하여 결국 신유장군도 작전지휘권이 없기 때문에 청 사령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부하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신유장군
〇 속국(屬國) 군대의 비애
- 바로 철수할 수도 없었던 조선군?
청(淸)의 입장에서는 언제 다시 러시아군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조선군을 붙잡아 두려 하지만, 문제는 3개월 군량미만 준비해 온 조선군은 늦어지는 철군으로 군량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신유 장군
- 1차 나선정벌 때에는 3개월 군량미를 청(淸)에서 제공했으나, 2차에는 칙서에 군량미까지 조선이 공급하라고 언급했던 것, 군량미가 떨어져 결국 청(淸)에게 쌀을 빌린 조선군은 물에 젖어 썩은 곡식이 태반이어서 회령에서 급히 군량미를 조달하고 빌린 쌀에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했던 상황 “우리 군량미가 도착하면 쌀을 빼앗아 가려는 계책··· 청나라 대장의 뱃속은 도둑놈 심보로 가득 차있다” <북정록> 속국(屬國) 군대로서의 비애와 한계를 느껴야 했던 조선군
〇 나선정벌, 그 후(後)
- 조선군 희생에 대한 보상은 누가?
조정에서 상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고, 당시 병사들도 이기고는 돌아왔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을 듯,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청을 도와주고 현장에서는 온갖 수모까지··· <북정론>에서 당시 심경을 시(詩)로 남긴 신유장군 “이역만리 출정에서 성공하는 건 세상에 드문 일이건만, 이 나그네의 마음은 어찌하여 또 다시 장탄식인고, 이번 원정은 예전의 심하의 원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니, 죽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김공이 오히려 부럽도다”
- 이는 죽지 못해 싸웠으며 싸워서 이긴 것이 오히려 수치스럽다는 뜻을 글로 남긴 것, 위의 김공은 심하전투 때 후금(後金)과 싸우다 전사한 김응하 장군을 일컬음
※ 심하전투 : 광해군 11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할 때 조선군이 명을 도와 참전
- 당시에는 북벌(北伐)한다고 하면서 청나라를 원수라고 했는데, 청나라 원수를 상대로 싸우기는커녕, 그 지휘를 받아서 전투에 나갔으니 굉장히 우울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던 것
〇 무찌르자 오랑캐! 북벌(北伐)의 진실
- 청(淸)을 도와 나선정벌을 승리로 이끈 조선군,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에게 병자호란의 주범이자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원수였다.
- 당시 조선은 북벌론이 대두되고 그 선두에 조선의 임금 효종(孝宗)이 있었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할 날이 있다. 정예 포병 10만을 양성하여 불시에 관외(요동)로 쳐들어가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이 어찌 호응하지 않겠는가.” <악대설화> 中
※ 악대설화 :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北伐)에 관한 독대
- 북벌(北伐)을 위해 군사력 강화에 힘쓴 효종(孝宗)?
청나라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도 남한산성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훈련도감을 정비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 기구로 어영청을 강화, 또한 효종의 북벌하면 등장하는 인물 이완 장군인데 이완장군이 어영대장 겸 훈련대장으로 임명되어 효종(孝宗)을 거쳐 현종(顯宗) 대까지 계속 같은 직을 맞는 그야말로 효종의 북벌이 구체화 됐다면 그것을 확실하게 전담할 수 있는 장군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 것, 또한 청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신무기 전차(전거)를 개발하기도 한다.
※ 전거(전차) : 수레에 화포를 싣고 다니다 적이 나타나면 바로 포를 배치해 공격해 평야에서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개발한 움직이는 성곽(城郭)역할
- <계승범 교수의 효종 북벌론의 분석>은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항복한 후 10여 년 만에 즉위한 조선의 왕으로 조선에 대한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악대설화>에서의 <10만 양병설>은 효종(孝宗)때보다 훨씬 부강했던 선조(先祖)때에도 이루지 못한 꿈이고 또한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할 자가 없겠는가.” 물론 호응할 수도 있겠지만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중원의 호걸들이 호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는 군사작전을 전개하는데 현실을 잘 아는 국왕이 세운 군사작전치고는 너무 낭만적이라는 것.
- 효종(孝宗)이 북벌을 주장한 이유?
당시 효종(孝宗)의 심정은 상당히 불안했을 것, 왜냐하면 장남(長男)이자 형인 소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왕위계승 과정에서도 장손이 있는데 왜 동생에게 가느냐고 신료들은 반대를 했고, 또 신하들은 많은 분당(分黨)을 만들어 왕권이 매우 약해진 상황에서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권강화를 위한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 상황으로 북벌(北伐)은 좋은 빌미가 됐을 것 이라는 <계승범 교수의 효종 북벌론의 분석>
- 하지만 왕권강화로만 보기에는 지나치게 큰 규모로 확대, 어영청의 군사가 2만 1천 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보면 효종(孝宗)의 진심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 특히 효종(孝宗)이 가지는 캐릭터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아버지의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위해서 왕위를 계승한 인물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남(次男)인 자신을 효종(孝宗)의 왕위에 오르게 한 아버지를 위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당위성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묘호마저 효종(孝宗)
- 병자호란 당시, 청(淸)의 볼모로 생활하면서 조선의 상황과 청(淸)의 국력을 실감하고 있던 효종(孝宗), 사실 오랑캐 청(淸)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효종(孝宗)도 알았을 것, 따라서 북벌(北伐)에 대해서는 효종 자신도 반신반의하지 않았을까?
※ 복수설치(復讎雪恥) :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
- 당시 조선사회를 뒤흔든 북벌(北伐)의 실체는?
북벌(北伐)의 실현가능성을 떠나 북벌을 외쳐야만 했던 효종(孝宗), 병자호란 이후 민심수습책으로 북벌(北伐)은 좋은 대안이었으나, 문제는 숭명반청의 이데올로기로 이미 망(亡)해버린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것.
- 간략하게 말하면 조선에게 명나라는 충·효의 도를 다해야하는 천자의 나라, 하지만 삼전도 굴욕으로 명(明)에 대한 충효를 스스로 어긴 꼴이 돼버린 조선, 그렇다면 노비·상인·소작인들이 더 이상 주인·양반·지주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하지 않는 때가 올 수도 있는 것이고 이는 이데올로기 붕괴로 조선왕조가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 따라서, 숭명반청의 숨은 의미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지배계층의 현실적인 계산이 반영된 것이고 이를 상쇄하는 방법으로 조선 지배계층에게 ‘북벌’은 좋은 정치적 구호!
〇 북벌(北伐) VS 나선정벌
- 반청(反淸)을 기본으로 하는 북벌(北伐), 하지만 오히려 청(淸)을 도우러 갔던 나선정벌은 북벌(北伐)에 어긋나는 전투였던 것
- 효종(孝宗)의 북벌과 나선정벌을 동시에 바라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숭명(崇明)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틀 안에서 승리를 해도 우울할 수밖에 없는 원초적 슬픔이 내재했던 전쟁이 나선정벌
- 실제로 1680년 병으로 사망한 신유장군의 빈소에서 만사(輓詞)를 쓰는데, 신유의 가장 큰 공덕인 나선정벌의 승리에 대하여 언급하는 자는 하나도 없고, 오히려 못 이룬 북벌(北伐)을 아쉬워했다고만 애도, 나선정벌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신유장군을 배려한 것
- 나선정벌은 조선 후기(後期) 역사에서 외적(外敵)과 맞서 싸운 유일한 승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 승리’가 되어버린 나선정벌로 북벌(北伐)이 이념인 시대에서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었던 것
〇 나선정벌, 기억의 재구성
- 승리했지만 슬픈 전쟁으로 기억되는 나선정벌, 하지만 1690년 숙종(肅宗)은 신유장군의 제문(祭文)을 직접 적으며 나선정벌을 승리한 전쟁으로 기록한다. “먼 옛날 무술년 북녘 변방에 미친개같이 사나운 자들이 있어, 이빨로 사람을 물어 죽여도 능히 제압할 수 없었는데, 출정한 군대는 굳세고 날랬으며 바람은 불고 날은 맑아, 소굴을 쳐부수고 불태우니 그 위엄에 적의 활과 창이 떨었고, 개선하여 돌아와 승첩을 아뢰니 더욱 더 성총입어 발탁 되었도다” <숙종이 지은 신유 장군 제문>
- 숙종(肅宗)이 신유장군의 제문을 직접 쓴 이유는?
청나라가 전성기를 이루면서 현실적으로 북벌은 불가능하게 된 일, 하지만 국왕의 입장으로서는 그간의 노력을 실패로 인정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숙종(肅宗)의 눈에 띈 나선정벌은 북벌(北伐)을 하지 못한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었던 것, 나선정벌의 내용에서 청나라만 빼면 되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우리 스스로 군대를 보내 북쪽의 오랑캐를 쳤다는 것이고 말 그대로 북벌(北伐)인 셈
- 이는 국가차원에서 보기 이전에 개인의 과거사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기억이 존재하는 것, 이러한 정신적 상처로 남은 것들을 스스로 완화시키기 위한 기억을 수정하는 장치가 없다면 인간은 미쳐버릴 수도 있는 것
- 병자호란과 삼전도 굴욕의 엄청난 치욕을 겪으면서 불안하게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이 왕권강화와 이념적으로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에서 오히려 원수인 청(淸)과 연합해 파병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운명, 게다가 오히려 나선정벌을 치하해야만 했던 숙종(肅宗)의 고뇌를 보면 병자호란 이후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반증하는 것
-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작은 조작이지만 역사를 새롭게 다시 쓰는 것, 그래서 “국가가 독점적으로 창출해 낸 역사의 기억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뢰성에서···
- 나선정벌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조선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나선 정벌이다 & 나선정벌은 좀 더 당당해져도 되는 전쟁이다. 이겼지만 우울해했을 나선정벌 참전용사들에게 당당해지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 근현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력 판도를 결정지은 매우 중요한 전쟁, 이때 등장한 러시아가 지금까지 중요한 열강의 노릇을 해왔고, 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세계사 차원에서 봐도 의미 있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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