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수봉" 이 들려주는 왜곡된 10.26 그 때 그 순간들 ♣
"뉴욕에서 보낸 2년 동안 음악은 성숙했고 제 가슴에는 행복을 담았습니다!”
심수봉의 매력은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라고들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할 ‘눈에 띄는 가수’로 출발했지만
그녀의 스타트는 생각보다 불행한 편이었다.
험난했던 한국의 정치사와 함께 뒹굴며
방송 금지와 해지를 여러 차례 경험하기도 한 그녀가 대학가요제에서
‘그때 그 사람’을 부른 지 25년이 지났다. 이제는 2남 1녀를 둔 어머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음악을 사랑하는 가수로 살아가는 그녀의 삶,
사랑 그리고 노래 인생을 담았다.
딸과 함께 지낸, 금쪽같던 뉴욕에서의 2년
볼거리, 즐길거리, 놀랄거리 많아서 행복했던 시간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비가 서울 거리를 적셨다.
수요일 늦은 오후의 퇴근 길. 도시는 온통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강북과 강남을 잇는 다리를 건너 약속 장소에 가야 했다.
분주한 마음과는 달리 빨간색 전조등을 켠 차들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너무도 좋아했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이렇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심수봉(49·본명 심민경)과의 인터뷰.
우리는 강남의 모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새 음반 녹음실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다른 가수의 녹음 스케줄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약속 장소를 변경했다.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기자는 커피숍과 연결되어 있는
호텔 로비의 에스컬레이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그녀와 눈인사를 나누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은 아마도 어제의 전화 통화에서 발생된 듯하다.
“가요계 데뷔한 지 25년 만에 갖는 첫 여성지 인터뷰”라는 매니저의 말에
마음이 설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삶을 구구절절이 펼쳐 보여야 하는
심수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5년 만의 만남. 우린 그렇게 만났다.
-첫번째 화두는 현재 녹음중인 그녀의 새 앨범 이야기였다.
“지난 2년 동안 딸아이와 함께 뉴욕에 있었어요.
그 시간은 제게 너무도 중요한 시간이었죠. 에너지 충전이라는 게 뭔지
제 몸으로 실감하고 경험한 시간이었어요. 뉴욕에 있으면서 학교에도 다니고
음악회, 전시회 등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 각국의 문화를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그동안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음악을 해왔는지 반성했죠.
특히 맨해튼은 음악의 천국이에요. 굳이 음악학교에 가지 않아도,
거리에서 연주하는 이름 없는 이의 연주 하나 하나가 모두 아름답더라구요.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머릿속이 맑아지고 개운해졌어요.
마치 다 쓴 배터리가 다시 새것처럼 충전이 되듯. 그래서 새 앨범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남편이 많이 도와줘서 곧 출시할 예정이에요. ”
심수봉은 2002년 7월부터 지난 봄까지, 딸과 함께 뉴욕에서 지냈다.
뉴욕으로 떠난 이유는 첼로를 전공하는 딸의 교육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 역시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몇 해를 살다 온 이들 중에는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 죽을 맛이었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새 생활, 문화, 음식에 적응하려면 처음 몇 달간은 고생하는게 순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좋았다고 한다.
볼거리가 많아서 그만큼 놀랄거리도 많았는데, 특히 음악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젊은 친구들의 음악이 프로페셔널하다는 데 놀랐다고 한다.
“뉴욕에서 제 음악에 대해 큰 용기를 얻었어요.
세계 각국의 학생들과 마주하면서 사람 사귀는 법도 다시 배웠구요.
그곳에서 참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누렸어요.
외국에 있으니까 우리 민족이 특별하다는 것도 느껴지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우리 국악이 해외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외국인들은 우리의 전통 음악을 잘 모르더라구요. 그게 좀 속상했어요.
세계의 모든 음악이 모인 곳에서 우리 음악도 한자리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죠.”
심수봉은 지난 9월 다시 뉴욕을 찾았다. 이번에는 학습이 아니라 공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뉴욕에 있을 때부터 확정됐던 미국 5개 주 순회 공연차 다시 찾은 곳에서
그녀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다. 워싱턴, 뉴욕, 볼티모어, LA, 샌프란시스코
이렇게 5개 도시에서 펼친 공연은 세심하지 못한 사전 준비로 물의를 빚기도 한 것이다.
특히 볼티모어에서는 무대가 너무 형편없어 공연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작은 학교를 빌려 무대로 꾸몄는데 그나마도 준비가 되지 않아
현장에 모인 교민들을 모두 돌려보내야 했다. 그녀 역시 저녁 7시 30분으로 예정된
공연 무대에 서지도 못하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교민들의 허탈해하는 표정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부랴부랴 준비한 MR 테이프를 들고 다시 현장으로 가
돌아서는 교민들의 발걸음을 잡고는 밤 9시에 작은 공연을 시작했다.
이날의 공연은 행복해하는 교민들과 어우러져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너무 아쉽죠. 해외에 계신 분들은 한국 가수가 와서 공연을 한다고 하면
입장권을 사는 그 순간부터 당신들이 더 설레고 긴장하거든요.
그런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재밌는 공연을 하려고 했는데 주최측의 준비 부족으로
아쉬움만 남겼어요. 다음에 만회할 기회가 있겠죠.”
-93년 결혼한 남편은 사랑과 행복을 주는 사람
‘비나리’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담은 노래
심수봉이 가요계에 데뷔한 지 올해로 25주년이 됐다.
그러나 그녀는 가수로 산 세월에 비해 발표한 음반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심수봉이라는 이름의 가수를 모르는 이가 없다.
또 20대~50대 여자들 중 노래방에서 심수봉의 노래를 한번쯤 불러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런 만큼 그녀는
자신의 무대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심수봉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당시,
방송국에서는 그녀를 두고 ‘꽤 까다로운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 그녀는 할 말이 많다.
“사실 저는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에
제 음악을 받쳐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일부 그런 이들이
저를 ‘까다롭다’고 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그때 그 사람’은 올림 다단조의 노래인데
반음이 많아 연주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방송 출연을 할 때 악단이
그냥 다단조로 연주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사랑밖엔 난 몰라’도 내림 마단조의 노래인데
마단조로 연주하는 이들이 있거든요. 그럼 저는 그냥 못 넘어가죠.
음악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 느낌이 살아나고 감정이 묻어나는 건데,
제 음악을 제대로 받쳐주지 않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어떤 때는 PD와 이야기하다가 말이 안 통하면 노래 안 하고 그냥 와버린 적도 있어요.
아마도 그런 부분을 두고 까다롭다고 한 것 같아요.”
심수봉의 이토록 음악을 아끼는 마음은 타고난 듯하다.
그녀는 195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민속학 이론가로 명망을 얻은 심재덕씨.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60세였고 어머니 장형복씨는 26세였다.
그녀가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 집안의 음악적 재능은
그녀에게도 전수되었다. 그녀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열여덟 살 때는 가발을 쓰고 업소에 나가
피아노와 드럼을 치며 노래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노래하는 것만을 좋아하던
‘음악수재 소녀’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의 실력은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심수봉은 명지대학교 3학년 때인 1978년,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그때 그 사람’으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다. ‘하늘이 내린 비음’이라는 평판을 받을 만큼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로 부른 ‘그때 그 사람’은
그후 최고의 가요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6개월 후
10·26 사태의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4년 동안 방송 출연이 금지되는 불운을 겪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갑자기 바닥으로 내쳐진 그녀는
소리 없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다시 노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심수봉의 노래가 방송을 다시 타기 시작한 것은 지난 85년이다.
이때 그녀는 사업가 박모씨와 짧은 결혼 생활 후 파경을 맞고 혼자서
다섯 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심수봉은 이때 노래 ‘무궁화’를 발표했다.
‘…의지다. 하면 된다. 내 아이를 부탁한다…’ 라는 가사의 이 노래는
우연히 책을 통해 ‘무궁화는 꽃송이 하나가 지고 나면
다음 꽃이 피어 사철 내내 핀다’는 내용을 접하고는 만든 것이다.
그녀는 비극으로 끝난 첫 남편과의 결혼, 권력의 무상 그리고 아이에게
유언을 남기는 심정으로 이 노래를 지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방송 금지를 당했다.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무궁화’뿐만 아니라 심수봉의 노래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은 대학 시절의 심수봉을 야박하게 버린 사람을 두고 만든 곡이다.
84년 발표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외항선을 타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우는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또 94년에 발표한 노래 ‘비나리’는 지금의 남편을 짝사랑할 때의
가슴 시린 감정을 노래로 만든 것. 지난 92년 그녀는 라디오 ‘심수봉의 가요앨범’
DJ로 활동중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이 프로그램의 연출을 맡은 한 살 연상의 김호경 PD였다.
두 사람은 음악적 취향이 잘 맞는 것에 호감을 갖다가 93년 10월 결혼을 했다.
두 사람 모두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섣불리 말하지 못하고
가슴만 태우던 그때를 떠올리며 만든 노래가 바로 ‘비나리(비나이다)’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녀를 두고 “노래를 들으면
심수봉씨의 근황을 알 수 있다”는 말까지 한다는 것.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 …
/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놓을 거요 /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
이렇게 애타게 바라던 이는 현재도 심수봉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이 옆에 누워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이런 행복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라며 남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의 노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비나리’를 꼽는 이유 중에는
이와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있다.
그녀는 ‘비나리’에 여자로서 처음 느낀 행복을 담은 것이다.
-영화처럼 파란만장했던 그 시절, 이젠 훌훌 털어버리고
대입 수험생 아들 위해 새벽기도 다니는 엄마의 마음
“지난 97년 발표한 노래 ‘백만송이 장미’는 러시아 국민가수인 알라 푸가체바가 불러
선풍적 인기를 얻은 노래를 번안한 거예요. 이 노래는 어느 여배우를 짝사랑한
가난한 화가의 지극한 사랑을 노래한 것인데, 가사를 직역하니까 감정이 많이 깎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사를 썼죠. 이 노래를 처음 접하게 해준 것도 남편이에요.
저는 제가 가진 행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사를 썼어요.”
심수봉은 지금의 남편과 좀더 일찍 만났다면 젊은 날의 아픔과 슬픔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만큼 남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2년 동안 뉴욕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두고 온 남편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이제 곧 출시될 새 음반 수록곡도 남편이 골라줬어요.
이번에는 이탈리아 노래와 일본 노래를 번안했어요. 이탈리아 노래는
국내에서도 멜로디가 익숙한 ‘사랑이 시로 변할 때’라는 곡이고,
일본 노래는 클래식한 리듬이 아름다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곡이에요.
두 곡 모두 우리 정서에도 잘 맞고 귀에도 익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노래를 번안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수록되고,
조용필씨의 ‘그 겨울의 찻집’도 제 스타일로 불렀어요.
녹음은 지난 9월에 시작했는데 고품질의 음반을 만들려고 애쓰다 보니 욕심이 나네요.”
심수봉은 자신을 두고 ‘전성기가 없었던 가수’라고 한다.
노래 인생 25년 동안 음반 몇 장을 발표했을 뿐,
제대로 방송 활동을 한 세월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이번에는 뉴욕에서 2년 동안 충전을 한 끝에 발표하는 음반인 만큼
왕성한 활동을 펼쳐 ‘심수봉에게도 전성기는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꼭 전성기를 맞이하려는 욕심보다 지금까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준 팬들에 대한 보답으로 ‘왕성한 활동’을 택한 것이다. 그
저 음반만 발표하고 방송 무대에 자주 서지도 못했는데 팬들은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를, 그리고 그녀의 음악을 잊지 않고 아껴주었다.
그 사랑에 대해 이제는 그녀가 보답 할 차례라고 한다.
“지난 세월 무대에서 노래한 것보다 앞으로 노래할 날이 더 많을 거예요.
머릿속이 맑아지니까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무엇보다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요.
무대에서 젊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싶어요.”
심수봉은 지난 1999년 8집 음반 「아 나그네」를 발표한 후에도
제대로 된 방송 활동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다시 5년의 시간이 흘러 새 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이번 앨범 활동으로 그동안의 미련을 말끔히 씻기를 바란다.
얼마 전 국내 한 영화 잡지에서는 ‘영화로 만나고 싶은 한국의 여자 가수?’라는 제목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응답자 중 28%가 인순이를 꼽았고, 그와 근소한 차이로 심수봉이 뽑혔다.
지난 세월, 그녀가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영화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드라마는 극적이어야 돼요. 일단 재미있어야 하니까. 그러다 보면 사실이 왜곡되거든요.
전 그런 게 싫어요. 이번에 제 음반에 담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노래처럼 물 흐르듯이
그렇게 살고 싶어요. 우리 둘째 아들이 올해 수능 시험을 치렀는데 제발 점수가 잘 나와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어요.
저도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같이 자식 앞에서는 ‘걱정’만이 앞서거든요.
영화 같은 인생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삶을 사는 게 제 바람이에요.”
새 음반 수록곡을 녹음하느라 피곤한 그녀를 위해 자상한 남편은 얼마 전 탁구대를 들여놨다.
탁, 탁, 탁 울리는 경쾌한 리듬의 탁구공을 치다 보면 어느새 피로와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그렇다면 그녀의 탁구 파트너는? 당연히 남편이다. 새 음반 이야기와 탁구,
남편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아마도 올 연말, 방송가에는 심수봉의 행복 바이러스가 폭풍처럼 몰아칠 듯하다.
“빠앙〜 갑자기 총성이 들렸지요.
총성이 들리기 전에 언성을 높여 싸웠다구요? 그런 건 다 거짓말예요.
그분앞에서 김씨하고 차씨가 투닥거리는 그런 장면은 감히 생각치 못할 일이죠.
사전 알력은 있었겠지만,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차지철 의 오른쪽 손목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난 손목에 그렇게 구멍이 뻥 뚫린 건 처음 봤어요.
순간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어요.
총이 없어서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다음 총알이 각하에게 날아 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죠.
하여튼 경호를 맡은 사람의 행 동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이런 장면을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바로 옆을 쳐다봤지요.
각하는 총소리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긋 이 감고 앉아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 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이때 운명의 총알이 튀었지요.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비스듬히 복부를 관통해서
왼쪽 아래 옆구리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박대통령은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는 그 자세로 그대로 위엄을 지키며
끝까지 앉아계 셨습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어제 일처럼 몸서리쳐지고 가슴이 메어진다는 그녀는
담담하게 그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목소리는 변함없 이 옛정취를 전해주건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나긴 고뇌의 연륜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가냘픈 한 여인의 한이라기보다는 우리 최근 세사의 굴곡진 이랑들이었다.
나는 아무 이유없이 그냥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녀의 가락의 굽이마다 이는 화사한 산들바 람을,
갑사와 다이아몬드로 휘감은 페르시아공주의 하느적거리는 율동보다
더 매혹적인 선율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14 일 저녁 동대문 남녘 서울 옛 성터가 남아있는 곳에서 그녀를 만 났다.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게 사실이오?
“그런 엉터리 얘기가 어딨어요?
아무리 권력사회라지만 그런 식 으로 사람을 대접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아무리 얼굴이 못생겼다 지만….”
그누구가 심수봉이 못생겼다 말했던가?
그녀는 아직도 젊고 신선 했고 고일(高逸)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꾸밈없이 아름다운 자태였다.
밀실의 참극'서 영화의 덧없음 배워
“제가 박대통령 왼편에 기타들고 앉아있었고, 오른편엔 신재순,
코너엔 차지철이 앉아있었지요.
그 맞은편엔 김계원, 김재규가 앉아있었죠.
대통령께서 저에게 ‘심양, 그때 그 사람 한번 불러 보게’하고 청했어요.
그 노래를 부르고 나니깐 다른 노래 하나 더 하라고 해서
재순이가 ‘사랑해 당신을’ 불렀어요.
그런데 걔는 음치였어요.
너무 못부르니까
박대통령께서 재순이 노래부 르는 것을 도와주시느라고 흥얼거리셨죠.
그리고 제가 기타반주 를 해드렸구요.
그때 빠앙〜 총소리가 난 거예요.”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자!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24년전 청와 대권력 주변의 밀실정치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대통령 자신이 깨끗한 정치를 해보겠다고 대통령직을 내걸고
대국민호소를 하고 있다.
우리역사의 상전벽해의 이 변화를
우리 자신이 너무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곤 곧이어 화장실에서 나온 차지철과 김재규 사이에서 격 투가 벌어졌죠.
그리곤 불이 꺼졌고 김재규가 나갔어요.
그리곤 잠시 정적의 순간이 계속되었죠.
이땐 이미 박대통령은 쓰러져 있었어요.
그때 정적 속에서 심하게 가래가 끓는 소리가 들렸어 요.
나는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부축하면서 ‘괜찮으세요’하고 물었지요.
그때 ‘괜찮아’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대통령 뒷켠으로 시커먼 방석 같은 게 있었어요.
그때 그것을 짚었는데 물컹, 끔 찍한 느낌이 들었어요.
피가 시커먼 묵이 되어있었던 거예요.
나는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이 대통령을 부둥켜안고 있었죠.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서 대통령머리에 총을 대고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김재규를 바라봤지요.
그런데 찰칵〜 불 발이었죠.
나는 그때 이젠 살았구나 했어요.
그런데 김재규가 나가자마자 누가 총을 건네 주었어요.
김재규는 새 총을 들고 들어 와 가혹하게 대통령 머리에 겨누었지요.
박대통령은 제 품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지요.
그 이후로는 제 정신이 아니었 고 제대로 생각이 나질 않아요.”
다시 상기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1979년 10월 26일 밤, 그 때 그 사람!
主와 客이 하나된 '나'를 찾아 유랑!
그대의 인생에서 10·26은 큰 사건이었죠?
물론이지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뒤흔든 너무도 큰 사건이었 지요.”
그럼 그 사건으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인생의 영화가 너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저는 정치가 남편을 얻는것이 어려서부터의 꿈이었어요.
그 꿈이 산산조각 났고 권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른 ‘무궁화’에 이런 가사를 집어넣었지요.
‘날지 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생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
결국 제 신세를 노래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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