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일 최초로 공개된 유관순(원 안) 열사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사진.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졸업사진 공개
1918년 보통과 졸업 확인
석방 이틀 앞두고 순국
추정되는 사진을 확보해 처음 공개했다.
이 사진은 유 열사의 이화학당 동창인 문필원 여사(작고)의 아들이자 올해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미리 선정된
문양목 선생의 외손자인 이필응(73)씨가 지난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고 보훈처는 밝혔다.
사진에는 1893년 선교사로 들어와 이화학당 교사로 활동하다 1907년 제4대 학당장에 취임한
미국인 룰루 프라이(앞줄 맨 왼쪽·1869∼1921)의 모습도 담겨 있다.
보훈처는 “그동안 유 열사가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했는지가 불분명했으나
이번 사진을 통해 열사가 보통과 졸업 뒤 고등과에 진학한 상태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실이 명확해졌다”고 설명했다.
한편, 유 열사가 고문에 따른 병세 악화로 감옥에서 순국한 날(1920년 9월28일)은 석방을 이틀 앞둔 때였던 사실이
조선총독부 관보(1920년 4월28일치)를 통해 최근 확인됐다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밝혔다.
이 관보에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을 기념해 보안법 위반자는 물론 잡범들까지
한국인 재소자들의 형기를 절반으로 감형한다고 기록돼 있으며,
이에 따르면 유 열사는 그해 9월30일이 석방 예정일이다.
[한겨레신문 전정윤 기자]
이런류의 사진들이 아직도 사장된 채 없어지는 사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친일진상규명과 동시에 순국열사의 사료를 발굴하는데도 진력해야 하겠습니다!
일본어로 한국 부채춤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한국문화의 원류가 일본이라며
교육을 통해 일종의 ‘의식화’를 꾀했다.
△ 창씨개명 독려
한국인의 성명에 관한 특명을 발표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라고 강요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했다.
사진은 서울 남대문역에서 창씨개명을 한 노인들에게 무료로 열차여행을 시켜주는 모습.
천막을 치고 창씨개명을 확인하는 일본관리들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각종 불이익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편지발송, 소송, 학교입학, 식량배급 등 생활전반에 걸쳐 이름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 상복 입은 고종황제
흥선대원군 별세 때 상복을 입은 고종의 모습.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운현궁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79세로 별세했다.
대원군은 임종 때 장남 재면을 통해 주상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고종은 아버지와의
상면을 거절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를 묵인했다고 여긴 고종은
대원군 빈소에 참배하지 않았다.(1898)
△ 부산 순시에 나선 순종황제
순종황제는 이등박문을 대동하고 경성을 출발, 대구·부산·마산 등을 순시했다.
도로 주변에 서있는 시민들과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의 이명화 박사는
“순종의 서도 순시를 촬영한 사진은 공개된 바 있지만 남도 순시는
이 사진이 처음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09. 1. 7)
나랏님이 구중궁궐 속에 쳐 박혀 국사를 잊고 있지는 않았지만 침략군의 호위(?)를
받으며 팔도를 순시한다는 것이 허울뿐인 있으나 마나지.
독립군은 신분 위장을 위해 중국인 복장을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복장으로만 보면
중국인과의 구별이 쉽지 않다. 국민대 국사학과의 장석흥 교수는 “사진의 각도가 다른
것으로 미뤄, 3명 이상이 동시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가 독립군이라고 무조건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잔악한 처형의 순간...
칼로 목을 칠 때 몸이 넘어가지 않도록 팔을 뒤로 묶어 목을 내리치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Arrested prisoner is being executed by a sword. The Japanese soldiers are pulling back the cord
that bound the victim so that the body will stand upright when the sword hit the victim's neck.
This photo was taken at the exact moment of the head being cut off.)
광대뼈 등의 외부 윤각이 많이 닮았다고 해서 박정희(다카기 마사오)라는 주장도 일부 있었으나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그러나 다카기 소위가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되었다가 곧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고, 이어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하던 영안지방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되어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위로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했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 중에 비극이다. 항일독립군 토벌작전에 110회나 참가했다는 박정희가 앗아간 목은 몇이나
될까? 나는 위의 사진이 박정희라고는 믿지 않지만 그가 직접 자른 독립군의 목의
수효가 최소한 10명은 넘을 거라는 생각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 장면은 사진작가이자 종군기자였던 마가렛 버크 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1904-1971, 미국 )가
1952년 한국 전쟁 때 촬영한 것으로 한홍구 교수는 [한겨레21/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우리는 무덤 위에 서있다
(2001년04월10일 제354호, or 대한민국사)에서 "한국전쟁 기간 중 생포된 게릴라의
잘린 목을 보며 웃는 남한 병사"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이성을 잃은 광기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일본의 만행만을 규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인, 중국인, 나아가 전세계를 상대로 반인류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나
우리가 같은 민족의 목을 잘라 들고 희희낙락거리는 만행에서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완용의 여편네의 모습
수난은 죄없는 민초들의 몫이다.
1951년 6월 부산,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했을 때 그의 집에 초대된 미국인들의 기쁨조로
특별히 초대된 이화여대생들이 문밖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있다.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 장군의 모습이다. 지금은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맹목적인 반일반미도 경계해야 하지만 뻔히 두 눈을 뜨고도 아무 생각없이 친일이 친미로 그냥
이어져 내려간다면 우리는 역사를 상실한 국민이 될 것이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 등이
친일진상규명법에 반기를 드는 것은 그들이 친일후손이 아니고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보수라는 정체성의 대의를 외세에 의한 침탈이나 그 지배를 배격하고 민족자아의 창달을 널리
주창하는 걸로 인식한다면 친일잔재청산을 거부하는 보수그룹은 사기꾼집단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난다. 보수를 빙자하여 자신의 존재조차 스스로 부정하는 수구꼴통인 것이다.
박영효 태극기 보다 앞선 최초의 태극기일까??
'박영효 태극기'보다 최소 2개월 여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사진이 발견됐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 항해국이 출간한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이라는
제목의 책에 태극무늬와 4괘(卦) 등 현재 태극기 형태를 갖춘 태극기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26일 밝혀졌다.
일제강점기에 99%의 우리민족은 죽음에 이르는 수난을 당하고 극소수의 친일부역자만은
개같은 영화를 누렸다. 국권은 회복했으되 친일의 무리들을 단죄하지도 못했고 이제는
그 굴절된 역사만이라도 바로 잡자는 노력도 친일파 후손들의 벽에 부딪혀 난관에 봉착했다.
나는 위에 적시한 낡은 사진들이 합성했거나 조작된 증거가 아니라면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등 친일파들의 무리를 개, 돼지보다 못한 매국노요, 인류의 공적이라고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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