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서동, 적국(敵國)의 딸 선화공주를 얻다.
〇 서동(薯童)과 선화공주 금지된 사랑에 빠지다.
- 삼국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19금 스캔들> 서동요! 그런데 서동요에 정치적 야망이 숨겨져 있다? 훗날 백제 제30대 무왕이 된 서동은 백제의 눈부신 재기를 꿈꾼 야심가로 서동, 그는 왜 적국의 딸 선화공주를 택했나?
-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을 빼앗긴 백제, 120년 간 이어온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완전히 깨지고 554년에 일어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26대 성왕(聖王)이 살해되면서 백제와 신라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가 되고 만다.
- 그런데 20여 년 후, 빼어난 미모로 정평이 있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백제의 마를 캐는 서동과 혼인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서동은 어떻게 적국의 딸 선화공주를 얻게 되는 것일까?
- <바보 온달>에 이어 공주의 남자 서동(薯童)은 훗날 백제 30대 무왕(武王)으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로 선덕여왕은 맏언니.
- 고대사에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만 기억되던 <서동설화>의 반전, 불구대천(不俱戴天)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지간인 백제인과 신라인의 혼인사건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으로 <관산성 전투>로만 봐서는 백제와 신라가 맺어져서는 안 될 사건
〇 유치원에서 들려주는 서동(薯童)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
- 먼 옛날 선화공주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서동(薯童)은 선화공주를 위해 노래를 만들고 이 노래 덕분에 선화공주와 서동은 인연을 맺게 된다.
- 선화공주의 미모, 어느 정도였나?
기록에는 미염무쌍(美艶無雙)으로 표현할 정도로 대단한 미모로 유난히 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동요
※ 미염무쌍(美艶無雙) : 미모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곱다.
- 서동요의 가사
“선화공주는 남몰래 서방을 얻어 통정(通情)하고 밤마다 외출을 하더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함축적인 가사로 주어는 선화공주
- 서동요가 서동과 선화공주를 어떻게 이어준 것인지?
신라에 퍼진 해괴망측한 노래, “선화공주는 선화공주는 남몰래 얻어두고 맛동방에게 맛동방에게 밤에 몰래 안고 간대요. 안고 간대요.”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노래를 알려주며 퍼뜨리게 하고 이 노래가 세간(世間)에 널리 퍼지자 신라 대신들은 선화공주의 탄핵을 발의하고 신라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유배를 결정한다.
〇 서동(薯童)과 선화공주의 남 다른 첫 만남
- <서동요>가 온 나라에 퍼졌다는 것은 백성들이 노래를 사실로 믿었다는 증거로 정치적으로 곤란을 겪었을 신라 진평왕, 그리고 나라와 아버지를 동시에 배신한 선화공주
- 고대사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공주들의 맹목적인 사랑, 평강공주 · 낙랑공주 · 선화공주 등 고대의 공주들은 여성으로써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았던 듯···
※ 낙랑공주 : 1세기에 존재한 낙랑국의 공주, 고구려 왕자 호동의 부탁으로 자명고를 찢고 낙랑국은 고구려에게 멸망당함.
- 유배당한 선화공주, 그 후에는?
선화공주가 울면서 유배를 가는 길에 서동(薯童)이 기다리고 “선화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지만 뜻밖에도 믿음직하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따라오도록 하였고 또 몰래 정(情)도 통했다. 공주는 그런 뒤에야 서동(薯童)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동요의 내용이 진짜 맞았다고 믿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무왕>
〇 서동요(薯童謠)
- 조선시대보다 개방적인 삼국시대, 적나라하고 과감했던 삼국시대의 성(性)문화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이 길에서 만(萬) 명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결합하였다.”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동요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가사로 낯이 뜨거울 정도로 예술과 외설논쟁의 효시가 되는 서동요, 문학적인 관점에서만 서동요를 이해하다가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니 삼국시대의 자유분방했던 사회와 개인의 삶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고, 신라의 토우 등도 상당히 솔직한 표현을 하고 있는데 노골적일수록 알아듣기는 쉬운 법
※ 토우 : 출산장면이나 남녀 성풍속 등 다산과 풍요를 비는 소박하고 솔직한 모습을 표현
- 서동요의 유포 비법 ① 고결한 선화공주를 음탕한 여성으로 만듦 ② 대중적인 노래로 제작·유포로 마케팅의 귀재인 서동(薯童)
- 선화공주를 얻은 서동의 매력?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해가 가는 것이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 “서동은 재주와 도량(度量)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무왕> 외모와 인품이 뛰어났던 서동(薯童)
〇 선화공주와 혼인한 서동(薯童)의 속내
- 서동(薯童)은 왜 선화공주를 선택했을까?
타켓으로 삼았던 것이 선화공주와 혼인하면 장인은 신라 진평왕으로 경제적 지원이 가능했던 것, 서동의 출신을 <삼국유사>에는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수도 남쪽 연못가에서 집을 짓고 살다가 연못의 용(龍)과 정을 통하고 아이를 낳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무왕> 용(龍)의 의미는 서동의 아버지가 왕 또는 고귀한 신분
- <이도학 교수>의 추론은 서동은 백제 법왕(法王)의 서자이거나 방계 왕족 출신으로 내세울 것은 없으나 왕의 핏줄을 받았기 때문에 후계자의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차기 백제의 왕이 되려는 야망이 있었던 것
- 서동의 전략은 ① 신라 선화공주와의 혼인으로 신분상승 · 경제력 획득 ② 백제왕으로 즉위하는 것으로 야심가이자 전략가였던 서동(무왕)
- 자신의 꿈을 위해 아내가 될 선화공주를 불명예스럽게 만든 서동, 일본 속담에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적군(敵軍)”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방법이든 이긴 자가 정의가 되고 진자가 악(惡)이 된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로 재탄생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스캔들, 또한 아름다운 아내와 신라 국왕이라는 든든한 지원자를 동시에 얻은 서동
- 혼인을 올린 서동과 선화공주, 그들은 행복했을까?
한편 선화공주는 어머니에게서 받아온 금덩어리를 서동에게 전하자 서동은 내가 마를 캐던 땅에 이런 것들이 흙더미처럼 쌓여있다고 말하면서 금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고 금덩어리를 신라 진평왕에게 보낸 서동은 진평왕의 마음을 얻게 된다.
- 서동요를 만들 생각을 한 서동이 금(金)의 가치도 모르는 바보?
금(金)의 중요성을 몰라서가 아닌 하나의 전략이었을 것, 선화공주가 이미 서동의 재력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〇 서동, 백제 30대 무왕(武王) 즉위
- 무왕, 어떤 인물이었나?
26대 성왕(聖王) · 27대 위덕왕은 성왕의 원자(元子) · 28대 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二子) · 29대 법왕은 혜왕의 장자(長子) · 30대 무왕은 법왕의 자(子) · 31대 의자왕은 무왕의 원자(元子) 재위기간이 매우 짧았던 혜왕(598~599)과 법왕(599~600), 무왕(武王)을 법왕의 자(子)로만 표기한 것으로 보아 왕위를 이을 적통(嫡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
- 왕권보다 귀족의 힘이 컸던 당시의 백제, 재위 1~2년 만에 사망한 혜왕과 법왕 그리고 뒤를 이은 무왕(武王), 이 시기는 백제의 불안정한 국내 정세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상황, <이도학 교수>의 분석은 백제 법왕(法王)의 죽음 이후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혼란을 틈타 적통(嫡統)이 아닌 무왕(武王)이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
- 성왕(聖王)의 죽음 이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백제군의 연이은 패배 “23년(서기562) 가을 7월, 백제 진흥왕이 병사를 내보내 싸우게 하였다. 백제 백성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하지만 무왕(武王) 즉위 후 백제의 승전보는 계속되고 상황은 완전히 역전(逆戰)되어 재위 42년 간 12번의 신라 공격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〇 무왕(武王), 처가 신라에 칼을 겨누다.
- 처가(妻家)였던 신라를 공격한 무왕(武王), 이유는?
무왕(武王)의 업적 ① 전쟁 승리, 전승은 신라에 대한 끊임없는 압박으로 후대에서 높이 평가되고 서동은 처음부터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은 사랑이 아니고 전략적인 것(?)
- 한편으로는 구분해야 할 것이 낙랑공주나 선화공주도 결국 사랑을 찾아 남자를 선택한 것으로 그런 관념은 좀 희박하지 않았을까(?) 선화공주의 입장에서는 백제 무왕(武王)과 결혼하여 왕후로 신분이 상승한 상태로 삶을 있는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개인에게는 성공한 삶일 수도···
- 쓰러져 가는 백제의 국운을 일으킨 영웅, 무왕(武王)의 등장
결국 무왕(武王)은 신라 진흥왕을 벤치마킹한 듯, 진흥왕이 <결혼동맹> 후 뒤통수를 치듯이 무왕(武王) 재위 41년 간 거의 신라 정복활동에 생애를 걸 정도인 것을 보면 한 여자의 지아비가 아닌 백제의 왕으로서의 국익을 위해 싸운 인물이 아닌가?
※ 진흥왕 : 신라 제 24대 왕으로 553년 백제 성왕(聖王)의 딸과 결혼해 혼인동맹을 맺음
- 백제 무왕(武王)의 업적 ② 고구려 견제를 위한 외교 전략으로 무왕은 외교적 전략을 매우 유연하게 펼침 “12년(611년) 봄 2월,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려하므로 무왕이 국지모를 수나라에 보내 군사일정을 물었다(협공을 하기 위해서)” & “13년(612년), 수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와 무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하게 하였다.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공언하였으나 실은 두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 수나라는 어차피 망할 나라, 수나라에게 협조하지 않는 대신 전쟁으로 인한 국력손실을 막은 무왕의 능수능란한 외교 전략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
- 백제 무왕(武王)의 업적 ③ 부국강병, 대규모 토목공사로 “31년(630년) 봄 2월, 사비의 궁궐을 수리하였다.” & “35년(634년) 3월, 궁궐 남쪽에 땅을 파서 물을 20여 리에서 끌어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삼국사기 27권 백제본기 무왕>
〇 무왕(武王)의 정치적 승부수, 익산 천도
- 혼란한 시기를 틈타 힘을 키운 백제의 귀족들, 그들의 권력은 왕보다 강력해지자 왕권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무왕, 그는 세력이 큰 귀족들이 대부분 수도 사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익산 천도(遷都)를 추진하면서 자신의 고향 익산에서 백제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데 익산은 무왕의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였다.
- 익산 천도(遷都) 무왕의 계획은?
538년 26대 성왕(聖王)이 실행한 사비 천도, 사비는 귀족세력의 오랜 기반으로 특히 무왕(武王)이 왕으로 즉위했을 때에는 정통성에 취약하다 보니 귀족들의 반발도 컸을 것이고 또한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새로운 도읍지를 선택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고 특히 서동이 마를 캐다 금을 발견한 금마저가 지금의 익산으로 익산은 마한(馬韓)의 정치적 거점인 중요한 도시 ① 비옥한 땅, 높은 농업 생산력 ② 금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상 교통 장악 ③ 신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
- 익산 천도(遷都)가 실현됐나?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고 있으나 백제 무왕 <익산 천도설>의 중요한 근거 ① 익산 왕궁리 유적, 왕궁리 지명자체가 오랜 세월 전승(傳乘)된 것 ② 미륵사, 신라의 황룡사보다 훨씬 큰 규모의 미륵사 등을 보아 무왕(武王)이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던 증거로 볼 수 있는 것.
-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기록돼 있다?
기록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 때 미륵 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이때 왕비가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연못이라서 절을 지을 수 없어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짓게 되는데 미륵사 창건의 의미는 미륵신앙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연결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신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다독이는 역할을 한 것이 미륵사 창건과 익산 천도(遷都)인 것
〇 1,400년 만에 밝혀진 미륵사의 비밀
- <익산 왕궁리 유적터>는 <사비의 관북리 유적>보다 2배 큰 규모로 미륵신앙을 구현한 대사찰인 미륵사, 임란 이후 폐쇄됐다고 하는데 무왕(武王) 당시에는 엄청난 규모
- 2009년 미륵사 석탑 해체 작업 중 발굴된 <사리장엄구> 금동제사리 외호(外護)를 열면 모습을 보이는 금동제사리 내호(內護)에는 진신사리가 보관되어 있고 1,400여 년 만에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탑 속에 들어 있어서 도굴당하지 않은 귀중한 유물로 살아있는 백제가 21세기 후손들과 대면하게 되는 것
※ 진신사리(眞身舍利) : 부처의 유골
- 사리장엄구보다 화제가 된 <사리봉안기>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기록으로 충격적인 것은 미륵사 창건을 발원한 주체가 백제 무왕의 왕후 선화왕후가 아닌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고 기록된 것 “아백제왕후좌평사탁적덕녀(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로써··· 오랜 세월동안 선인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금제 사리봉안기>
※ 미륵사 금제 <사리봉안기> :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으로 미륵사 창건의 배경 · 발원자 · 석탑 건립 연대 등이 밝혀짐
-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선화공주, 맏언니 선덕여왕과 둘째 언니 천명공주만 등장 하지만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화공주,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경에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고 <삼국유사>는 1281년(고려 충렬왕 7)경에 승려 일연이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으로 윤색한 기록으로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충돌할 경우 <삼국사기>를 정설로 본다.
- 기록만으로 봐서는 사탁적덕 딸의 발원으로 절을 세웠다는 것으로 여러 명의 왕후를 둔 삼국시대의 왕들, 무왕(武王)의 부인도 여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학계에서는 미륵사 발원은 선화왕후이고 완공은 사탁왕후로 추정
- <삼국사기>에 모든 것을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도 존재하는 것이라서 신라사의 중요한 인물만 기록한 <삼국유사>에 백제사에서 왕비의 이름이 기록된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
-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를 보면 이것이 발굴성과와 부합되고 있다는 것으로 선화공주가 등장하는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이라는 근거 ① 미륵사 창건 설화와 실제 발굴 성과가 일치하는 바닥에 뻘이 존재 ②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으로 이루어진 구조, 설화의 기록이지만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것으로 미륵사 창건의 발의자는 선화공주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 또한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 존재했을 것이고 사탁왕후는 백제에서 힘이 센 권력 가문의 딸로 실세인 백제 귀족 사탁왕후, 하지만 선화왕후의 경우는 친정은 멀리 있고 게다가 신라는 적국이 된 상태여서 사택왕후가 자신의 이름을 <사리봉안기>에 남긴 것으로 추정
※ 사택 가문을 가리키는 명칭은 4가지, 주로 사택(沙宅)으로 쓰였지만 왕후의 이름은 <사리봉안기> 한자에 따라 사탁(沙乇)으로 표기
〇 사탁왕후와의 결혼, 무왕(武王)의 또 다른 전략?
- 백제 후기 대표적 귀족 가문 사택(사탁)씨, 사택 가문과의 결혼도 역시 무왕의 정치적 전략이었을 것, 백제 후기 대표적 귀족 가문 8개 중 <사씨>가 으뜸으로 무왕(武王)의 정치적·경제적 입지를 현실적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사택 가문의 힘, 적국 왕의 사위에서 자국 권력가의 사위로(?)
- 하지만 이는 백제 무왕의 반(反)신라적 성향을 대내외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고 왕권이 강화되자 선화왕후 대신 효용가치가 높은 사탁 왕후를 선택했을 수도(?) <사리봉안기> 기록의 정재(淨財)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부정한 재물이 아닌 깨끗한 재물로 미륵사 건립의 재원을 마련했다는 것으로 무왕 재위 40년(639년)에 완공된 미륵사,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인 점을 보면 선화왕후는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 젊은 시절의 사랑은 잊고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도움이 될 가문과 결합했을 것으로 무왕의 혼인은 결국 한 남자가 아닌 백제의 왕으로써의 선택, 혼인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를 다시 부흥시킨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로 백제의 성왕을 중흥군주로 얘기하지만 관산성 전투에서 어이없이 전사하게 되어 진정한 중흥군주는 무왕이 아닐까?
-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시작해 결국 정치사로 마무리 된 서동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의 염원이 서동요를 통해 현재까지 전해진 건 아닐까?···
-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아마 두 사람은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까?’ 였을 것, 남자로써 신분상승을 위해 적국의 선화를 중상 모략한 서동 VS 여자로써 서동의 외모만 보고 현실적이거나 정서적 교감 없이 덜컥 결혼한 선화, 서동과 선화공주는 과연 사랑이었을까? & 서동은 남자로써는 나쁜 남자, 하지만 서동에게 모든 걸 바친 선화공주는 해바라기와 같은 진정한 사랑이었다. &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역사와 설화의 아름다운 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