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다!
〇 개요
- 두 번씩 왕위에 올랐던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부자간의 왕위 다툼에서 과연 최후의 승자는?
- 조선의 16대 왕 인조(仁祖)와 소현세자! 그리고 26대 왕 고종(高宗)과 흥선대원군 이들의 공통점은 권력을 놓고 갈등한 부자관계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남보다 못한 원수지간이 된 경우로 소현세자는 인질로 끌려갔으나 청의 신뢰를 얻어 환국하여 아버지 인조(仁祖)의 질투를 받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또 고종(高宗)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퇴출시키려 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는데 13세기에서 14세기 원 간섭기에 고려 왕 중에도 권력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이 있었으니 25대 충렬왕과 26대 충선왕,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 1297년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세자는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이 왕의 정인(情人)인 무비 탓이라고 여기고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무비와 측근들을 처단하고 충렬왕에게 반기를 든 세자 왕원(훗날 충선왕) 정책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〇 최초의 혼혈왕자, 충선왕
- 혼혈왕자하면 떠오르는 해리 포터로 우리 역사에도 혼혈왕자가 있었다! 몽골에서도 칭기즈칸의 후손들은 아주 각별한 대우를 받는데 스스로 ‘황금 씨족’이라 일컬은 칭기즈칸의 후손들로 충선왕은 원 황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 원의 황금 씨족에 포함
- 게다가 1296년 쿠빌라이의 장손자인 <카말라>가 원 황제 계승 서열 1위가 되고 그의 딸 계국대장공주(부다시린)와 충선왕의 혼인으로 부마자격까지 얻은 상황, 특히 충선왕은 세 살 때 세자책봉을 하여 고려시대 최연소 세자책봉을 할 만큼 정통성을 입증하는 셈이고 어릴 적부터 원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
- 어느 날 충선왕이 <통감>을 읽고 있었는데 쿠빌라이 칸은 충선왕을 불러 역대 제왕 중에서 누가 제일 뛰어나느냐? 고 묻자 한나라의 고조(高祖)와 당나라의 태종(太宗)이라고 대답하자 다시 묻기를 한고조와 당태종을 짐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 묻자 어린 나이에 어찌 할아버지를 평하겠느냐? 고 할아버지의 질문에 재치 있게 대답한 충선왕, 칸 중의 칸 쿠빌라이도 손자 충선왕에게는 친근한 외할아버지일 뿐···
〇 충선왕 아버지의 여인을 처단하다
- 아버지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을 무비 탓이라 여긴 충선왕, 제국대장공주와 무비의 연관성? “수령궁에 작약 꽃이 활짝 피었는데 공주가 한 송이를 꺾어 오게 하여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흐느껴 울었다.” & “곧 병을 얻어 현성사에서 죽으니 그 나이가 39세였다.” <고려사 열전 제국대장공주> 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으나 궁녀인 무비를 아꼈던 충렬왕 “왕이 도라산에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무비를 데리고 가서 객지에 머무를 때의 즐거움으로 삼으니 사람들이 무비를 도라산이라고 불렀다, 왕의 총애가 커지자 무비에게 붙은 자 들이 안팎에서 제멋대로 포악하게 굴었으므로 세자가 이를 몹시 미워했다.” <고려사 열전 최세연>
- 충선왕은 어머니를 홀대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을 듯하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무비에게 물었을 수도··· 하지만 아버지의 여인을 죽인 것은 곧 부왕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무비 처단 이면에는 정치적 맥락이 있을 듯···
- 무비의 죽음, 충렬왕의 반응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세자가 무비를 국문하기를 청하건대 왕이 우선 상제가 끝나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23년> 그러자 충선왕은 참지 못하고 무비를 제거하고 장례를 마치고 원으로 돌아가고, 이러한 절묘한 타임에 충렬왕은 양위 선언을 한다!
〇 충렬왕, 왕위를 내려놓다.
- <고려사>에는 충렬왕이 양위를 요청하는 표문이 나와 있는데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마음이 애닮은 것이 심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고 병이 번갈아 나니 하루아침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서무(庶務)의 처리는 누가 맡겠습니까?” <고려사 세가 충렬왕 23년> 이래서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것
- 마음이 애닮은 것이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인지 무비의 죽음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랑하는 여인이 아들 손에 죽었으니 충렬왕의 충격은 컸을 듯, 하지만 권력을 단 번에 내려놓는 건 어려운 일로 갑작스런 양위는 의심해봐야 할 일(?)
-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1297년 당시 충렬왕의 나이가 62세로 고려시대 평균수명이 짧은 건 사실이지만 원 황제 쿠빌라이는 80세까지 산 것을 보면 노쇠한 것 같지는 않고 고령이지만 사냥을 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한 충렬왕, 정인도 잃고 아내도 잃고 아들도 반기를 든 상황에서 충렬왕은 회의감이 들었을 듯··· 마약보다 끊기 힘들다는 권력인 왕위를 내려놓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자발적 양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 <류근 시인의 생각>
- 자발적 양위? VS 비자발적 양위?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양위 표문을 작성한 정가신이 훗날 자살을 하게 되는데 “표문의 말 속에 충렬왕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는데 만약 그 연유를 따지게 되면 표문을 찬술한 자가 어찌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정가신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다 약을 먹고 죽은 것이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24년> 충렬왕의 양위가 자의(自意)라고 보기엔 미심쩍은 상황으로 권력형 비리사건의 연루자들의 의문의 죽음!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기록이 없어 양위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 믿는 사람위주로 측근정치를 했던 충렬왕, 왕이 바뀌면 권력집단도 교체되는 큰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충렬왕이 측근 세력을 버리고 왕위를 물려주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 그래서 충렬왕의 양위를 자의라고 보기보다는 고려 내부 반대 세력이나 원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력할 것
- 충렬왕이 위기에 빠지게 되는 상황으로 제국대장공주 사망 3년 전인 1294년에 장인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자 강력한 후원자인 장인과 부인의 죽음으로 충렬왕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쿠빌라이를 잇는 원의 성종이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의 후비 소생이라 해서 정통성을 부정하자 충렬왕의 부마 지위까지 부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
- 상대적으로 충선왕은 혈기왕성한 21세로 도첨의사사 · 밀직사 · 감찰사 및 중군의 판사를 겸직하면서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 충렬왕보다 혈통적으로 원과 더 밀접했던 것
- 당시 충렬왕의 입장에서는 후원자였던 장인 쿠빌라이와 제국대장공주의 죽음, 그리고 쿠빌라이의 외손자이자 부마인 아들 충선왕의 성장, 이런 상황에서 충렬왕이 양위를 선언하고 그 왕위를 받아서 충선왕이 즉위한 것이 1298년 1월
〇 황실 스캔들, 조비 무고 사건
- 갓 즉위한 충선왕에게 일어난 치명적인 스캔들, 계국대장공주가 황태후에게 편지를 전하는데 “공주는 조비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을 시샘해 편지를 써 원나라에 보내 황태후에게 전하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 충선왕은 아버지가 무비 때문에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고 무비를 죽였는데 그야말로 부전자전(?)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고 조비만 총애하는 것을 투기해 계국대장공주가 원 황실에 편지를 쓴 것
- 이를 알아차리고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를 말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또한 궁문에 방이 붙는데 “조인규의 처가 영험한 무당을 시켜 왕이 공주를 미워하고 자기 딸(조비)만을 사랑하도록 저주하였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 이를 본 계국대장공주의 반응은?
조인규와 그 처를 잡아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원에 이 사건을 정식 보고하라고 명하는데 조비 스캔들로 들끓는 여론, 과연 충선왕의 앞날은?
〇 조비 무고사건의 결말
- 조비는 누구?
조비는 조씨 성을 가진 비(妃)로 계국대장공주보다 먼저 맞이한 충선왕의 정비이고 무비는 왕비의 비(妃)가 아니고 이름이 무비로 충렬왕의 무비 충선왕은 조비
- 계국대장공주의 시샘으로 “공주는 조인규와 그 처를 옥에 가두고 조인규의 아들 및 사위와 조비도 가두었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이 일로 원에서 오고간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고 결국 원에 끌려간 조비와 조인규
- 얼마 뒤에 충선왕도 원으로 오라는 황명이 내려오고 더 충격적인 사건이 충선왕의 환송식에서 벌어지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갑자기 사신 보롤이 황제의 명령이라며 국왕인(國王印)을 빼앗아 충렬왕에게 주었다.” <고려사 세가 충선왕 즉위년> 이는 충선왕의 퇴위와 충렬왕의 복위 의미로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반복되는 왕위교체인데 1298년 1월에 충선왕이 즉위하고 같은 해 8월에 폐위되는 사건
- 왕을 폐위시킨 이유가 정말 조비 때문?
원에서도 충선왕 폐위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는데 <천명망살(擅命亡煞)> 이는 충선왕이 원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밉보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 폐위의 이유
※ 천명망살 : 함부로 명령하고 망령되이 사람을 죽이다
〇 충선왕의 개혁
- 소수의 관료위주로 측근정치를 했던 충렬왕, 따라서 측근들의 권력독점으로 부정부패가 성해지자 충선왕은 즉위하자마자 30여 개의 개혁교서를 반포하는데 ① 인사행정 개정 ② 공신 포상 ③ 백성 착취 금지
- 개혁이 충선왕의 대표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충렬왕의 측근정치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많은 백성들이 유망을 가고 국경을 넘어 요동지방이나 원나라 본토까지 유망을 하는 일이 벌어지자 이를 해결하는 방안이 시급했고 충선왕은 실제로 개혁을 통해 바로잡으려 한다.
※ 유망 :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일
- 또 한 가지는 관제개혁, 원의 요구로 고려의 관제를 격하했는데 충렬왕은 관제개혁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하면서 상위관청만 격하하고 중하위 관청은 유지하다 보니 관제의 서열이 꼬이게 된 상황이어서 충선왕은 고려의 기형적인 관제를 개편하려 한 것, 폐위의 중요한 이유는 원과 상의 없이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원은 충선왕에 대한 통제가 어려우리라 판단하게 되면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
- 원이 충렬왕을 복위시킨 이후에도 계속 고려를 견제하면서 고려에 대한 간섭을 좀 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는데 정치적 노선이 서로 달랐던 부자지간, 충렬왕은 가급적이면 원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려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으나 충선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원의 융성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원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이를 바탕으로 고려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결국 두 왕의 대립을 불러온 정치관
〇 계국대장공주의 개가(改嫁) 사건
- 다시 왕위에 오른 충렬왕은 며느리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추진하는데 사실상 별거상태였던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부부 “충렬왕이 왕전에게 좋은 옷을 입혀 여러 번 오가게 하여 공주의 눈에 뜨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며느리의 개가 추진은 아들 충선왕에 대한 견제? 며느리를 생각하는 마음을 원에 알리고 개가 허락을 받으러 원에 간다는 것으로 시아버지가 살아있는 아들의 며느리를 개가시키려 한 충격적인 사건
- 계국대장공주 개가 시도, 그 결과는?
충선왕과의 이혼을 전제로 추진된 계국대장공주의 개가, 문제는 고려 국왕의 지위와 연결돼 있었던 원의 부마 지위, 충선왕이 부마의 자격을 계속 유지한다면 다음 고려 국왕이 될 수 있는 자격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공주가 개가를 하면 충선왕의 부마자격 박탈로 고려 국왕의 자격도 잃게 되는 것으로 충렬왕은 아들의 왕위를 차단하기 위해 공주의 개가를 추진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1305년 공주의 개가를 허락받기 위해 원에 간 충렬왕과 왕유소 “충선왕이 평소 자식 된 도리를 잃었고 공주와도 잘 지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충렬왕께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흥후 왕전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고려사 열전 왕유소>
- 하지만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반대한 원 황실, 이유는 서흥후 왕전이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왕유소는 부자 사이를 이간질한다 하여 체포되는데 충렬왕 쪽에서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이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서흥후 왕전이 왕의 아들이었어도 충선왕에게는 절대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충선왕의 부마자격을 박탈하려던 충렬왕의 계획은 실패하지만 폐위 후 10년 간 원에 머물면서 인맥을 쌓는 충선왕, 1307년 6대 원 황제 성종이 죽고 시작된 왕위 다툼 전에 적극 참여한 충선왕, 그리고 충선왕이 지지한 사람이 7대 원 황제 무종(武宗)에 오른다 “원나라의 무종과 인종이 아직 황제자리에 오르기 전에 늘 충선왕과 함께 지내면서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고려사 세가 충선왕 즉위년> 원 황제들과 막역한 사이였던 충선왕
- 충선왕은 단순히 줄을 섰던 것이 아니고 충선왕의 군사들이 직접 내전에 참전하고 적극적으로 황위 싸움에 가담했던 것, 반면 충렬왕은 무종·인종 형제와 대립했던 세력을 지지하는데 원의 내전이 끝난 후 극명하게 갈렸던 충선왕과 충렬왕의 입지
〇 충렬왕의 죽음과 천왕의 복위
- 서흥후 왕전을 비롯한 반대파의 처단으로 측근세력을 다 잃은 충렬왕은 1308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 아버지와 아들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나?
충렬왕의 유언이 남아있는데 “한 번이라도 심양왕을 볼 것을 생각하였으나··· 하늘이 준 수명이 다했으니 어찌 서로 만날 수 있으랴!” 하며 아쉬워했고 아버지의 부고(訃告)를 듣고 “충선왕이 원에서 유성처럼 빨리 길을 달려와 10여 일만에 도착하였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34년> 같은 상황으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장례식에 가지 않은 고종(高宗)에 비하면 충선왕은 양반!
- 충선왕은 폐위되고 10년 만인 1308년에 복위하는데 당시 원 황제 무종(武宗)은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책봉하고 심양·요양지역의 지배권을 주게 되는데 충선왕은 원의 여러 제왕 중의 하나가 되는 것, 게다가 충렬왕의 죽음으로 고려 국왕과 심양왕을 겸하게 된 충선왕
- 또 한 가지는 어전회의를 통해 중요정책을 결정하던 원나라,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자들을 <케식>이라고 부르는데 충선왕은 케식의 일원으로 원의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면서 원의 실력자가 되는 것
- 쿠빌라이의 외손자 · 부마의 지위로 권력을 유지했던 충선왕이 본인의 힘으로 원나라 내의 권력자 위치에 오른 것으로 바로 이 대목이 고려 국왕으로써의 충선왕의 정책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자신의 힘을 키워 고려의 질서를 잡겠다는 정치적 입장을 실현한 것으로 10년 전 실패했던 개혁을 다시 진행하게 되고 실제로 충선왕 복위 직후의 시기가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이 상당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
〇 원나라에 머문 충선왕
- 충선왕의 상승곡선이 이어지는 듯하다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나는데 얼마 후 원나라로 떠나 5년 간 고려에 오지 않은 충선왕, 자발적인 충선왕의 선택으로 전지정치(傳旨政治)라 해서 교지(敎旨)를 전해 국무를 다스리는 고려판 인트라넷 시스템?
- 원에서 전지를 통해 고려의 개혁을 추진한 충선왕, 재정확충을 위한 개혁이 성과를 거두는데 고려 국왕이 꼭 고려에만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마치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는데 왕의 정책을 대행하는 관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그 토록 피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측근정치에 대한 폐해가 재현되고 소수 측근에 의해 운용된 인사권 및 재정 개혁책이 사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면서 폐해가 발생
- 원나라에서 원격적으로 하는 전지정치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측근들의 부패와 충선왕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게 되자 고려 조정은 충선왕에게 환국을 요구하지만 “황제와 황후 · 황태자가 왕을 크게 총애해 우대하고 있었으므로 왕은 귀국을 거부했다.” <고려사 세가 충선왕 원년>
〇 충선왕의 선택
- 1312년 원 황실은 충선왕에게 고려로 환국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충선왕은 핑계를 대며 환국을 미루자 원은 고려 국왕과 원의 심양왕 하나를 택하라고 하자 선택의 갈림길에서 충선왕! 결국 아들 강릉대군(충숙왕)에게 양위를 선언하는데 고려가 아닌 원에 남는 선택
- 당시의 상황은 고려 국왕과 심양왕을 겸하고 있어 권력의 힘이 막강해지자 충선왕의 권력을 견제하는 세력들이 반발을 했던 것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원 황실에서 충선왕에게 환국을 종용한 것은 한 사람이 두 개의 왕위를 겸할 수 없다는 명분 때문으로 당시의 모든 제왕들이 하나의 왕위를 갖고 있었는데 충선왕이 두 왕위를 겸하는 건 옳지 않다는 부당함을 제기하며 요심(요양과 심양) 지방에서의 충선왕의 지배권을 빼앗고 고려로 돌아가기를 기대했던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그러나 고려왕이 아닌 심양왕을 선택한 충선왕
- 원의 심양왕을 선택한 것은 고려 국왕을 실질적으로 겸할 수 있으나 고려 국왕을 선택했다면 심양왕을 겸할 수 없는 것, 그렇다면 고려를 위해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 고민할 때 자기의 권력기반이 대부분 원 황실에 있기는 하지만 원 황실의 기반도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심양왕을 선택한 것은 두 개의 지위를 모두 지킬 수 있었던 방법이라는 것으로 충선왕의 전략적 선택? 논란의 여지가 많은 충선왕의 선택!
〇 충선왕의 말년
- 원(元)에 남은 충선왕의 삶?
원 황제가 관직 서열 1위인 우승상을 제안할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원에서 과거제 시행을 제안하며 만권당을 설치하고 한인(漢人) 성리학자들을 후원하면서 만권당을 수준 높은 연구가 이뤄지는 장소로 만들고 고려 문신 이제현을 만권당에 불러 원 성리학자들과 교류하게 하여 고려에 성리학이 수용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 만권당 : 충선왕이 성리학자들의 연구를 위해 세운 독서당
- 충선왕의 또 한 번의 반전
충선왕과 막역했던 7대 무종과 8대 인종이 사망하고 9대 영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충선왕과는 반대 입장에 있던 원의 영종, 그래서 정치적 입장이 좁아지면서 토번(티베트)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당시의 기록으로 티베트까지는 1만 5천리로 5,890Km, 충선왕의 생활상의 기록 “소달구지에 노숙하며 어렵게 반년이 되어서야 그 지역에 도달하여 보릿가루를 먹으며 토굴에서 살고 있어 갖은 고생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익재집>
- 문제는 힘이 있던 충선왕이 권력을 잃으면서 위기에 빠지게 된 고려, 지금까지 고려라는 나라가 부정되어 본 적이 없었는데 충선왕이 유배간 사이 고려라는 나라를 없애고 원의 한 지방으로 만들자는 책동이 발생하는데 책동을 일으킨 사람은 주로 고려의 부원세력으로 원 황실에서도 부원세력의 주장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 이런 것들을 보면서 충선왕의 정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충선왕은 개인적인 힘을 키워 원의 간섭이나 수탈을 줄여 국익을 추구하려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성공했을 때는 이점(利點)을 누릴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나라가 존망(存亡)의 갈림길에 처하게 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시스템이 아니라 리더 한 사람의 역량으로 국가가 운영되었을 때의 위험성을 보여준 사례
- 이런 점에서 원과의 거리를 두면서 고려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충렬왕의 정책, 원 쿠빌라이로부터 고려 국가 유지를 약속받은 <세조구제>를 앞세워 대원외교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간 충렬왕의 정책을 재평가할 수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부자지간의 왕위쟁탈 이야기로만 해석할 수 없는 충렬왕과 충선왕, 두 왕이 어떻게 원을 이용하여 고려의 힘을 유지 했는가와 원은 충렬왕과 충선왕을 통해 어떻게 고려를 통치하려 했는지 복합적으로 역사를 볼 수 있었던 사건으로 원에 의해 고려왕의 정치적 입지와 정책실현의 여부가 결정되는 시대로 온전한 국가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할 수 있었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