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세종(世宗), 제1편 그는 허수아비 왕이었나?
○ 세종(世宗)은 허수아비 왕이었나?
- <드라마 세종대왕> 1418년 8월 10일, 세종(世宗)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즉위하는데 양녕의 폐위 후 불과 두 달만의 일, 그러나 너무도 짧은 기간에 이뤄진 양위, 그리고 그의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 태종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숨 죽여야 했던 세종(世宗), 그는 정녕 허수아비 왕이었을까?
-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세종(世宗), 사실인가?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 연구소장> 출연을 망설인 자타공인 세종 마니아, 감히 감추고 싶었던 세종의 어두운 시절을 본인 입으로 직접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당시 세종의 나이는 22세로 신중함에 지나쳐 국왕으로써의 자질까지 의심받았던 세종의 집권 초
- 요즈음 세종대왕에 대하여 얘기할 때 저 시절은 얘기하지 않는데 오늘은 세종의 감춰졌던 젊은 시절을 알아보는 시간으로 역사 전문가에게 존재하는 무언의 규칙이 있나? 위인들에 대한 누가 되는 얘기는 가급적 하지 말자는 등등···
그렇질 않고 역사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얘기하는 것이 역사라는 <이익주 교수이 설명>
- 역사 저널의 단독보도, 세종의 흑 역사 “허수아비 왕 세종” & “낮에는 사냥 밤에는 술판” & “파파보이 세종, 아빠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쉬웠어요”
- 세종(世宗)이 밤에는 술판 낮에는 사냥을?
세종 집권 초 계속된 가뭄으로 힘들었던 백성들, 하루 두 끼 식사에 일 년에 옷 한 벌을 입었다는 기록,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종은 아버지 명령만 따르고 또한,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고 계속 사냥을 즐기는데 “주상은 무슨 까닭으로 또한 사냥을 좋아하여 출입이 잦으신가 하였으니” <세종실록, 세종 1년 12월 25일> 계속 아버지를 따라야 하는 입장으로 백성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왕으로 알고 있었으나 아버지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사냥과 술자리를 즐긴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 세종(世宗)이 즉위했을 당시?
큰 아버지인 노상왕 정종(定宗)과 상왕 태종(太宗)이 생전에 있고 비록 폐세자가 되었지만 양녕대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으로 눈치를 봐야하는 사람이 무려 3명으로 이해가 되는 측면도 없진 않지만 사사건건 상왕께 보고를 한다. “처음에 임금이 뜻을 상왕께 아뢰었더니, 상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실록, 즉위년 8월 15일> & “대사헌이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상왕께 아뢰겠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 “승정원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 장차 상왕께 아뢸 터이니 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빠짐없이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종1년 7월 25일> 세종 초에는 상왕께 아뢰겠다는 기록이 많이 등장하는데 세종 즉위년 ~ 태종 승하할 때까지 무려 45번의 기록이 등장한다.
- 그래서 신하들이 왕을 무시하기도 하는데 “김점과 정승서를 시켜 조정에 나와서 변론하게 하니 악한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으며 승서에게 말하기를 네가 장래에 불의를 많이 할 것이니 수레에 찢겨 죽게 될 것이며 멸족의 환을 당하리라” <세종 1년 7월 4일> 막말을 하는 등 귀감 되지 않을 일들이 실록에 등장한다.
-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가장 심각했던 부분은 정치로 세종(世宗) 집권 초, 국가기강이 서지 않는데 “파선하였다는 보고는 이미 지난 달 24일에 왔는데 병조가 이제까지 그대로 두고 계주하지 않았으니 심히 옳지 못하였다.” <세종 1년 7월 4일> 무려 한 달 뒤에 보고가 되는 것, 또한 “이제 전함(戰艦)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하니 판부사와 찬성사가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종 1년 5월 14일> 집권 초 정사(政事)에 서툴렀던 우리가 몰랐던 세종의 모습.
- 집권 초반 세종(世宗)이 나약한 모습을 보인 이유?
세자 책봉 후 불과 두 달 만에 왕이 된 세종은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던 것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려고 한다.” <1418년 8월 8일> “왕세자가 즉위 하였다.” <1418년 8월 10일> 세자로서의 훈련기간도 없이 왕이 되어 당황스러웠을 것
- 권력욕이 강한 태종이 세종에게 빨리 양위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양위하지만 더 큰 정치적 이유는 당시에 살아있는 양녕대군이 있었기 때문으로 빠른 양위의 이유 ① 양녕을 견제해 반란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 ② 상왕으로서 세종에게 수습통치 기간을 마련해 주고자 함
○ 드라마 세종대왕
- 세종 즉위년 1418년, 장인인 영의정 심온이 의금부로 압송되고 영문도 모르는 채 모진 고문을 당하는데 소현왕후 심씨는 왕에게 아버지를 구해 달라고 애걸하지만 세종(世宗)은 외면할 뿐···
- 세종의 장인 심온이 문초를 받은 이유?
명나라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송된 심온, 왕의 장인으로서 권세를 펼칠 수 있는 순간에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태종은 명나라 사신으로 보내기 전 심온을 영의정으로 승격시키는데 당시 심온의 나이는 44세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세종 즉위년 9월 8일>
- 심온은 어떤 인물?
심온은 인품이 뛰어난 인물로 조선 건국에 큰일을 하여 태종 때 이조판서(행정자치부 장관)에 오르고 세종의 장인이 된 후에도 자신을 낮췄던 훌륭한 인물로 지위 고하를 막론한 엄격한 처신에 양녕대군마저 두려워했던 인물로 <박현모 교수의 생각>은 왕의 장인이 되어 권세를 얻었다고 해서 나쁜 일을 함부로 도모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
- 심온이 압송된 진짜 이유?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태종이 대역(大逆) & 대간(大姦)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좋지 않은 평가를 하는데 태종이 선위 후에도 병권(兵權)을 내려놓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태종에게 심온이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형식적으로 심온이 병권을 세종에게로 돌린 후 왕의 장인으로서 스스로가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고 판단한 태종
※ 대역죄(大逆罪) : 임금이나 왕실에 해를 끼친 죄
- 겸손한 원칙주의자 심온이 권력을 잡으려 했다?
사소한 사건의 발단으로 태종의 심복 병조참판(국방부 차관) 강상인, 태종에게 보고해야 하는 병권 문제를 병조참판이 뜻밖에 세종에게 보고하면서 문제가 일어나는데 실무자의 단순 실수로 끝날 수 있었던 사건, 하지만 배후를 캐며 사건이 확대되고 압슬형의 고문을 견디지 못한 강상인의 자백은 배후로 세종의 장인 심온을 지목하는데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라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하게 되고 결국 심온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태종의 덫에 걸릴 수밖에 없던 상황
- 심온 사건의 결말?
심온도 압슬형을 받고 “심온이 하루도 안 되는 사이에 두 차례나 신장(訊杖)을 맞고 세 차례나 압슬형을 당하여도 오히려 굴복하지 않더니···” <세종실록, 세종 11년 3월 17일>
- 장인의 억울한 누명, 세종은 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나?
세종 즉위년 12월 24일, 장인 심온의 목숨이 경각에 걸렸을 때의 기록 “세종은 수강궁에 가서 태종에게 문안을 올린 후 태종, 신하들과 밤늦게 까지 연회를 열고 춤을 추었다” & “상왕이 일어나서 춤을 추고 여러 신하들이 또한 춤을 추었다 밤이 2경에 이르러서야 연회를 파하였다.” 이 자리에 세종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 세종 즉위년 12월 23일, 자백 후 수원으로 압송된 세종의 장인 심온, 12월 24일 업무를 본 후 연회에 참석한 세종, 그리고 12월 25일 심온의 죽음이 보고되는데 세종이 연회에 참석했을 때 심온이 죽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세종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심온 사건의 전 과정을 공유하고 있던 태종과 세종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 그렇다면 소현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덤도 함께 쓸 정도로 금슬이 좋았던 세종과 소현왕후,
-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세종의 장모를 노비로 만드는데 “의금부에서 심온의 아내와 여러 딸들을 천인(賤人)에 속하게 하자고 청하니 상왕이 여러 형(刑)들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즉위년 12월 4일> 심지어 소현왕후 심씨를 폐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지만 다행히 폐위는 면한 소현왕후
-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세종이 아버지에 대한 효(孝)를 져버리고 태종에게 맞섰다면 왕이 된 명분의 절반을 상실했을 것이어서 허수아비 왕으로 사는 것은 시대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것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이길 싸움만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 효도는 아버지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인께도 해야 하는 것으로 왕으로서 해야 할 행동과 말을 하지 않은 세종에 대하여 50대 세종의 모습을 떠올리며 집권 초의 나약한 모습을 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하다.
- 4년간의 정치암흑기가 지나고 이른바 세종(世宗) 시대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나 폐세자 양녕의 문제로 신하들과 벌이는 첨예한 대립은 군주로써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세종은 이 난국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
- 왜 세종은 태종 승하 이후에도 권력을 잡지 못했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전히 아버지 태종의 신하들로 가득 찬 조정은 평균연령이 60세로 아버지뻘인 사람들로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정치 9단의 노회한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지지기반 없이 친정(親政)을 시작해야 했던 세종의 상황
- 문제는 노회한 대신들이 세종을 상대로 기선잡기에 들어가는데 태종의 상(喪)을 치르기 위해 올라온 폐세자 양녕대군을 내보내라는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하여 탈상 전부터 사헌부 · 사간원 · 육조 · 의정부 등 모든 관리들이 세종을 압박 “양녕의 거취는 신들이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4년 6월 1일> 세종의 국왕으로서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인 것
- 양녕대군을 둘러싼 문제는 세종 재위 기간 내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는데 14년간 세자로 지냈기 때문에 그 지지기반이 완벽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세종을 왕으로 추대했던 신하들은 양녕을 시한폭탄처럼 두려워했던 것으로 양녕의 탄핵은 ① 양녕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② 세종을 길들이려 했던 신하들의 계략이었던 것
- 아버지 태종 승하 후에도 세종은 주도권을 잡지 못했나?
끊임없이 올라오는 똑같은 내용의 양녕대군 거취를 둘러싼 상소로 한 달여의 실랑이 끝에 양녕은 결국 이천으로 돌려보내진다
○ 충격! 조선 초, 최대의 뇌물스캔들
- 태종의 승하 후에도 여전히 우유부단하고 의지가 없는 세종,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의 모습은 언제 등장하는가?
<김도련의 노비 뇌물사건>은 고려말 김도련의 아버지가 426명의 양인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든 사건으로 이인임과 함께 권력을 누렸던 임견미 등에게 노비를 뇌물로 바치는데 고려의 권력자가 죽은 후 다시 양인이 된 사람들, 그런데 조선 개국 후 아들 김도련이 불법노비를 되찾으려고 하고 그 후손들까지 무려 1,000여 명의 노비를 편취하기 위해 권력자들에게 노비를 뇌물로 상납했던 김도련과 관리들의 뇌물수수가 드러나면서 발칵 뒤집힌 조정은 조선 초 최대의 뇌물스캔들이 발생한다.
- 노비가 뇌물? 사람이 매매대상이 될 수 있나?
당시 노비는 상속 · 매매 · 증여가 가능한 사유재산으로 인식됐고 김도련의 노비 뇌물사건이 문제가 된 이유는 당시 노비의 가치 때문으로 노비 1구의 가격은 말 1필과 맞먹는 가격으로 배 450필의 가치, 현재의 수준으로 대략 1천만 원 정도인데 노비 1구에 딸린 가족까지 환산하면 대단한 가치로 피라미드처럼 늘어나는 노비의 재산 가치로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증식되는 살아있는 엄청난 재산이어서 김도련의 노비 뇌물사건은 엄청난 뇌물 스캔들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
- 노비 뇌물사건 발생 4년 뒤에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병조판서 조말생이 노비 36구를 뇌물로 받은 것으로 조말생은 태종의 오른팔 같은 사람으로 태종과 조말생의 특별한 인연 ① 태종이 실시한 첫 번째 과거에서 장원급제 ② 태종의 딸과 조말생의 아들이 결혼하여 태종과 사돈지간 ③ 7년 동안 승지를 역임했던 태종의 최측근으로 세종 재위 초 8년 동안 병조판서 역임하여 당대의 권력자였던 조말생
- 사건 초 24명의 노비를 받은 것으로 조사된 조말생, 현재 가치로 약 2억 4천만 원의 뇌물을 받은 셈으로 고위관리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비리를 저질렀던 것으로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사건으로 지휘감독의 책임이 있는 권력자가 뇌물을 받아 재력가의 불법 재산증식에 일조하는 것은 현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정경유착에 의한 전형적인 권력형비리사건
- 사건이 발생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4년 뒤인 세종 8년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불거진 사건으로 파직 후 유배를 가게 된 조말생,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낱낱이 조사하라고 명하여 함경도까지 사람을 보내어 강력한 재조사를 실시하는데 세종의 강력한 의지를 볼 수 있는 사건
- 노비뇌물사건의 전말과 함께 조말생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이와 함께 조말생의 다른 죄들까지 드러나기 시작하여 노비 36명 + 장물 7백 80관 = 약 14억 원 정도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교형의 위기까지 닥쳤던 대규모 뇌물 스캔들
○ 세종, 아버지의 공신들을 내치다
- 세종이 조말생을 지목한 이유?
<박현모 교수의 분석>은 병권을 쥐고 있었던 조말생, 게다가 심온이 죽던 날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세종이 서서히 활동을 시작 “정실과 뇌물이 이렇게 횡행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곧 나라의 쇠란이 멀지 않을 것이다.” <세종 8년 3월 14일> 세종의 재조사 결과 17명의 관리가 132명의 노비를 받은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는데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김도련 & 조말생 노비뇌물사건이 조선 초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버지 태종 때의 권력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세종 9년에 황희 = 좌의정, 맹사성 = 우의정이 되어 황희 · 맹사성의 양승체제로 세종의 시대가 개막이 되면서 고려의 정치문화가 조선의 정치 문화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노비뇌물사건
- 피로 권력을 일궈낸 아버지 태종과 달리 무혈로 권력을 장악한 세종은 아버지와 완전한 변별력을 가진다는 느낌 & 몇 년 전의 사건을 끄집어내어 판세를 역전시키는 태종과 세종의 닮은 꼴, 완벽한 개혁을 위해 일부러 허수아비처럼 행동하여 상대를 안심시킨 후 명분이 갖추었을 때 행동한 세종은 일부러 허수아비인 척 했던 것이라는 <원동연 대표의 생각>
- <이익주 교수의 분석>은 최초로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의 국왕이자 조선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세종, 노비뇌물사건을 계기로 세종의 세대가 정치판에 전면 등장하게 되고 조선 건국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암투와 관계가 없는 황희 · 맹사성의 등장으로 새로운 권력과 함께 세종은 자신의 시대를 개척하는데 아주 엄격히 말하면 세종의 시대부터 조선이라 할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