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시)

능소화, 아름다운 이별 / 정일근

mkpark2022 2008. 9. 18. 14:16



 

능소화, 아름다운 이별 / 정일근

능소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대, 제가 능소화의 이름을 안 것은
불혹의 고개를 넘어와서입니다.
부끄럽게도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저는 능소화를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여름이면 이 땅에 피는 저 꽃을 보지 못하고
저는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꽃도 사랑과 같아 운명처럼 찾아옵니다.
어느 날 문득 능소화가 보였습니다.
그 해 봄 저는 많이 아팠고
깊고 어두운 우물 밑에서 두레박을 타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새 세상에서 처음 만난 꽃이 능소화였습니다.
그때 능소화에게서 제가 배운 것은
아름다운 이별의 자세였습니다.
능소화는 자신을 꽃피운 인연의 가지에서
시들지 않는 꽃입니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이별의 시간이 찾아오면
스스로 땅으로 낙화하여 땅 위에서 시드는 꽃입니다.

세상의 많은 꽃들이 가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그 가지에 매달려 시들고 또한 아프게 죽어 갑니다.
그러나 능소화는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자신의 가지를 떠납니다.
세상이 자신의 아름다웠던 모습만을 기억하길
바라며 먼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대, 이별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떠나려는 사람을
애원하듯이 붙잡던 시간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능소화를 알고부터 배웠습니다.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작별하는 이별이라는
것을 여름에 피는 꽃 능소화에게서 배웠습니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다 다시 능소화를 만났습니다.
비어 있는 골목길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꽃은 기다
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자세로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 여름 능소화가 저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