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시)

가을 편지 / 이해인

mkpark2022 2008. 9. 18. 14:19

    가을편지 1 / 이해인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 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편지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 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가을편지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가을편지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을편지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가을편지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가을편지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가을편지 8 빛 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가을편지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마음을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가을편지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 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