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혼란을 300년 만에 정리하고 등장한 당대(當代)의 강대국 수나라.
남조부터 북쪽의 돌궐까지 남북을 통일한 수나라가
2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팎에서 오는 갖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200만의 군대를 물리친다.
그리고 612년, 영양왕 23년 여름 수나라는 113만 3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1차 침공한다.
113만이라는 규모는 당시에는 유례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병력.
그 당시 서양에서는 고작해야 5만~10만 명 동원의 전쟁이 전부였다.
양제는 그의 조서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첫째, 고구려는 보잘 것 없는 나라이고 공손하지 않으며,
둘째, 대국의 말을 듣지 않고 조회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며,
셋째, 고구려가 대국에서 도망간 역도들을 받아들이고
변경(邊境)을 괴롭혀 치안이 불안하며,
넷째, 요서를 공격하였고,
다섯째, 다른 나라들이 대국에 조공을 보내는 것을 방해하며,
여섯째, 고구려의 법령은 가혹하고 지도자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300년의 혼란기를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대제국이 유례없는 대군을 이끌고 침공.
여기에서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사상(史上) 유례없는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때 고구려 군을 지휘한 장수는 을지문덕(乙支文德).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의 가문도 직함도 알려지지 않았던 맹장.
갑자기 튀어나와 전쟁에 관한 전권(全權)을 쥐고 있었다.
한편, 수의 113만 대군은 고구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영양왕 9년의 전쟁부터 지금까지 그가 관여해왔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말이 113만 대군이지 그들을 보급하고 지원하는 인원까지 포함하면 200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
200만이라는 군대가 출전(出戰)하는 400여km에 이르는 깃발이 행진하는 데에만 40일이 걸렸다.
양제는 100만의 대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양제의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넉 달 동안, 300년 만에 중원을 통일하여 온갖 전장에서 단련되어온 수나라가
요동성을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
여름부터 시작한 전쟁이
어느덧 가을을 지나가고 있었고 수나라 군대의 힘은 이미 다 빠져 있자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적(敵)을 사면으로 공격했다.
드디어 적은 살수에 다다랐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 현재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낭림산맥에서 발원해 서해(西海)로 흘러간다.
거의 직선으로 흐르는 강으로 뛰어드는 군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주 쉬운 공격대상이 되었다.
을지문덕은 때를 놓치지 않고 후퇴하는 적(敵)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하여
압록강까지 이들을 추격하였고 수군(水軍)은 빗발치는 화살을 견뎌야 했다.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끌고 온 군사는 30만 5천명
그러나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이는 겨우 2,700명뿐이었다
<청야입보 작전>이 고구려를 승리로 이끌었던 큰 요인으로
청야(淸野)'란 '들을 비운다.' '입보(立保)'는 '성(城)을 굳게 지키며 저항한다.'는 의미로
적(敵)이 공격해 왔을 때 쌀 한 톨 남김없이 생활터전을 불태우고
성(城)으로 돌아가 군량(軍糧)의 현지조달을 막는 방어전술
본래 전쟁에서는 장기전으로 이어질 경우
현지에서 보급품을 조달받아야 하지만 고구려군의 청야전술로
현지에서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제대로 싸울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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