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Art(회화)

밀레의 예술세계

mkpark2022 2011. 5. 25. 21:30

만종, 1859, 장 프랑수아 밀레
(The Angelus, 1859 by Jean-Francois Millet)

석양이 물들어가는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멀리 예배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하던 일손을 거두고 고개 숙여 기도를 하고 있다.


발치에는 감자 바구니가 놓여있고,
캐다 만 감자 몇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아마 부부는 오늘 하루의 일을 끝마치며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밀레가 그린 명화 '만종(晩鍾)'의 모습이다.
지극히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으로
귀를 가까이 대면 은은히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릴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운 그림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던 아이가 있었으며 그 아이의 불안감은 사실로 밝혀 졌으니
...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는 소위 의식화된 화가였다.
당시 시대의 부조리를 꼬집는 그림을 잘 그렸고,
때문에 비평가들에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만종'과 더불어 유명한 밀레의 걸작인 '이삭줍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줍기, 1857,
장 프랑수아 밀레
(The Gleaners, 1857 by Jean-Francois Millet)

지평선이 보일정도로 커다란 농장을 배경으로
저 멀리에 짚단을 싣고 있는 일꾼들과
말을 타고 이들을 부리는 지배인인듯한 사람이 보이며,
이들 속에 속하지도 못하고 끼니를 위해 버려진 이삭이라도 주워야 하는

세 여인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추수 때의 풍요와 평화로움을 배경으로
가난한 이들의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오고 있다.

이 그림이 전시되자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이삭을 줍는 세 여인은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이며,

빈곤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라는 악평을 들어야 했다.

이에 밀레는 "나는 평생 들 밖에 보지 못했고,

그것을 솔직히 그렸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평가들의 악평은 가난한 화가 밀레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더욱 더 가중시켰다.
결국 물감 살 돈 조차도 없을 정도로 궁핍하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르투스 스테반스'라는 화상이
그림을 인수한다는 조건으로 밀레에게 1000프랑을 지원해준다.
이 1000프랑으로 탄생한 그림이 바로 '만종'이다.

이 그림은 곧 '반 플라트'라는 사람에게 3000프랑에 팔렸고
여러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미국의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다.


당시 프랑스는 '만종'이 미국에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직접 나섰을 뿐 아니라 대대적인 모금활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고,
이렇게  팔린 '만종'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미국에 안착하는 듯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당시 백화점 재벌이었던 '알프레드 쇼사르'라는 사람이
80만 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한 후
1906년에 루부르 박물관에 기증을 하여 밀레의 '만종'은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이 후 '만종'은 한번도 거래된 적이 없었으며,
지금은 그 값을 매긴다는게 불가능한 프랑스의 보물이 되었다.

1000프랑의 지원이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보물이 된 것이다.
또한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의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처음 밀레가 그린 '만종'은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과는 약간 달랐다.
기도하는 농부 부부의 발치에 놓인 감자 바구니가
원래는 부부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를 담은 관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이 아기는 긴 겨울동안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다.

죽은 아기가 하늘나라에서라도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농부 부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바로 '만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게된 밀레의 친구가
그렇지 않아도 사회 고발적인 그림들 때문에
비평가들로 부터 혹평을 받고있는 밀레가 걱정이 되어
그림에 아기 시체를 넣지 말것을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그려넣어 출품하게 된다.
그 후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만종'은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만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그림을 볼 때 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던 그 소년의 이름은
'살바로르 달리(Salvador Dali)'였다.


살바로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그는 '만종'을 볼 때마다 감자 바구니가 마치 관처럼 느껴진다고 했으며,
후에 '만종'에 얽힌 비극적인 실화라는 책까지 출판하면서
감자 바구니가 실은 아기의 시체를 담은 관이라는 주장을 하게된다.

 

사람들은 그의 주장이 얼토당토 않다며 묵살한다.

그러나, 최근 루부르 박물관측에서
'만종'에 대한 자외선 투사 검사를 시행하여 초벌 그림을 확인한 결과
감자 바구니가 있던 자리에 작은 관이 그려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죽은 아기의 관이었다.
그의 투시력은 환각이 아니라 정확한 관찰에서 오는 능력이었던 것이었다.

"현실 생활에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삶에 대한 투시력을 갖게 되었다."
달리의 진실한 고백이다.


갈라와 밀레의 만종, 1933, 살바도르 달리
(Gala and the Angelus of Millet, 1933 by Salvador Dali)


밀레의 만종의 고고학적 회상, 1935, 살바도르 달리
(Arch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 1935 by Salvador D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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