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밀사 파견’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밀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그들을 헤이그로 보낸 고종 외에
헤이그 밀사의 숨은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종에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 파견을 권유하고
자신이 밀사인것처럼 위장행동을 했던 사람이 바로 호머 헐버트 입니다.
<호머 헐버트 박사>
출처: 뉴시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교육자, 역사학자, 한글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문명화와 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헐버트박사는 1886년 7월 4일 조선의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당시 육영공원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양반집 자제들에게 영어 및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우리나라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헐버트박사는 육영공원에서 5년 동안 재직하면서 근대식 학교의 틀을 잡으면서 학생들에게
‘일본을 이길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배움뿐이다’라고 강조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헐버트박사가 채보한 아리랑 악보>
출처: http://makcbg0.com.ne.kr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교육자였던 헐버트박사는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을 발견하면서
한글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했습니다.
1903년에는 미국의 스미스소니안(Smithsonian Institute) 학회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기고하면서
한글이 대중의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극찬을 했습니다.
헐버트박사는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지내고,
대한역사 등의 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우리나라 교육 발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또한 헐버트박사는 우리나라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한국인의 혼인 아리랑을 오선지에 음계를 붙여 최초의 아리랑 채보자가 되었습니다.
아리랑이 오늘날같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는
헐버트박사의 최초의 채보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헐버트가 가져갔던 고종황제의 친서>
출처: 연합뉴스
한글연구 및 아리랑 채보외에 헐버트박사의 주요한 임무는
고종황제를 비호하고 조선의 독립의지를 해외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직후,
헐버트박사는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애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는 등
조선의 아픔을 함께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권을 지키기 위해 두 번이나 고종황제의 밀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 고종황제의 친서를 들고 “을사조약이 총칼의 위협으로 체결됐으므로 무효라는 고종의 뜻을 전달하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국무성과 백악관은 친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헐버트박사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한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 미국이 한국을 도와
일제의 침략야욕을 저지해야 한다면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호소했습니다.
이어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특사로 임명되어 고종황제에게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였으며,
또한 일본경찰의 미행 하에 일반 여행으로 가장하고 부산, 일본, 블라디보스토크을 거쳐
헤이그에 직접 가서 우리나라의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들의 활동을 도왔습니다.
고종황제의 외교고문관 헐버트와 헤이그 비밀 특사의 이야기는 한편의 첩보영화같습니다.
고종황제는 1906년 6월 22일 헐버트박사에게 특사 위임장을 주고
수교 9개국(미국,영국,러시아,이탈리아,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중국,벨기에)의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친서도 함께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헐버트박사는 외국인이지만 만국평화회의 특사가 되어 1907년 6월에 열리게 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됩니다.
<헤이그 비밀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 임명장>
출처: http://dwban22.egloos.com
이상설, 이준 특사는 1907년 5월 21일에 블라디보스톡을 출발,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에 갔으며 헐버트박사는 5월 8일 먼저 서울을 출발,
일본을 거처 이상설, 이준과 거의 같은 시기인 5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와 관련하여 헐버트박사만을 의심하게 되어 박사의 행적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이토히로부미와 일제 외무장관은 날마다 헐버트 박사의 동태에 관한 비밀보고를 주고받으며 감시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헐버트박사만 일본의 감시 하에 있었기에 이상설, 이준의 헤이그 행은 일본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되고
결국 헐버트박사는 이상설과 이준이 헤이그에 무사히 가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로 돌아가고 일제는 결국 한반도를 지배하게 됩니다.
<한국 방문 당시의 헐버트 박사>
출처: http://blog.joins.com/drsuekim/9455271
그 이후 헐버트박사는 일제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나라를 떠나 미국에 살면서
계속적으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돕습니다.
그렇게 해외에서 제2의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중에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독립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5년 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헐버트박사를 국빈자격으로 초청합니다.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63년 전 자신이 왔던 길을 따라 다시 한국 땅을 밟는 것에 감격한 헐버트박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오는 여정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위생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헐버트박사의 영결식을 거행하고 헐버트박사가 평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고
평소 소원한 대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지에 묻힙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 내 헐버트박사의 묘>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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