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이콘 안철수, ‘오늘’에 열중하며 마이웨이를 가는 ‘쿨한 베짱이 ’
"비오는 날이면 집앞 우동가게 가서 우동 한 그릇 먹고, 대형마트에 장보러 가서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우유 하나 덤으로 사는 재미로 살죠. 호텔에서 비싼 음식 먹거나 밤에 조용한 데 가서 술먹는 일은 거의 없으니 묶어서 싸게 파는 1+1 상품 쇼핑하는 걸 즐겨요. 다만 얼굴이 알려져서 사람 많은 데 가면 조금 불편한 뿐입니다.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49). 그는 지난 23년 간 매스컴을 오르내리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의사, CEO, 교수 등 남들은 일생에 한 번 이루기 힘든 직함을 반세기 동안 모두 달았다.
게다가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도 한둘이 아니다.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영입하고 싶은 CEO, 가장 건전한 경영자, 차세대 경제부문 리더, 떠오르는 스타교수 등
이처럼 다양한 직함과 타이틀에서 보듯, 안 원장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왔다. 그래서 일까. 늘 대중의 이목을 신경쓰고, 또 가끔은 무거운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 했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매스컴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신경 쓰면서 꾸미고 살았다면 23년간 관계했던 매스컴을 견뎌내지 못했겠죠. 사람들이 굴곡 없는 삶이다 그러는데, 꾸미지 않고 진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름 일관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선한 인상에 겸손한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분명함'이 담겨 있었다. 주변 시선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쿨함'도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안 원장이 한 마디 던졌다. "참, 눈치 볼 때가 있기는 있네요. 대형마트에 장보러 갈 때요. 1+1상품은 인터넷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요. 하하하"
▶도전? 목표? 계획? 나와는 거리가 먼 말들= "제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던 기억은 전혀 없어요. 다만 하루 주어진 24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 열정 갖고 할 수 있는 일 열심히 하면서 살았던 기억만 있네요."
뜻밖이었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인생을 설계해 온 모범생 이미지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의사, CEO, 교수 모두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지 않고는 이루기 힘든 직업인데 안 원장에겐 이 두 가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원장은 밖에서는 자신이 도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지만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도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타입도 아니다. 오히려 목표 자체를 정하지 않는다. "뭔가를 이루려고 계획하기 보다는 매순간 열심히 살다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들이 성큼 다가왔다고 할까요. 현재를 열심히 즐기다 보니 미래가 오던 걸요."
하지만 안 원장의 인생이 처음부터 물 흘러가듯 순조롭지는 못했다. 착실히 의학도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창업의 길로 들어선 것도 자신이 더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선택이었지만 이 역시 목표한 바는 아니었다. 안 원장은 "미래 전망은 아예 보지도 않고 무작정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 역시 컴퓨터 바이러스야 말로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재미 있게 열정 갖고 계속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혹했다. 창업 초기인 1995~1999년은 안 원장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일은 매달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매달 초가 되면 행여 월급을 못 줄까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매출이 변변치 않은 달에는 돈을 구하러 은행을 돌며 어음깡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어음깡이라는 게 기업에 따라 객관적 평가가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담당 직원 마음대로 고무줄 평가를 받더라고요. 누구한테 잘보이려는 건 정말 곤욕이었죠."
하지만 안 원장을 더욱 괴롭히는 건 본인 스스로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사업한 지 3년이 지난 1998년 사무실은 남부터미널 부근에 있었는데, 안 원장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매일 밤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그날 번 돈과 쓴 돈 등 10원짜리 하나하나 세면서 하루를 보냈다. 순간 울컥했다.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지 서글퍼지더라고요. 동기동창들은 의사나 교수하면서 잘 살고 있는데... 나는 그때 배운 거 다 버리고 그러고 있었으니…"
▶바닥에서 정립한 마이웨이 철학 '절대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안 원장은 평생 자신을 바로 세워줄 버팀목 같은 철학을 만들었다. 바로 "절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할수록 제 자신만 힘들어지더라고요. 남들이 다 위만 보고 갈 때 나라도 가끔 아래를 내려다보자고 생각했죠."
안 원장은 이를 산을 오르는 것에 비교했다. "정상만 바라보면 구름이 가리기도 해서 불안해 지는데, 뒤돌아보면 없는 가운데 이 만큼 왔구나 하고 안심이 되잖아요. 결국 원대한 목표가 사람을 지치게 하더라고요."
이런 생각에 안 원장은 목표를 크게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 허덕이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일주일, 한달이란 시간을 값지게 쓰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남부터미널 작은 사무실 안에 갇혀 장부 계산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는 자신을 애타게 여기던 그 자신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안 원장은 걷기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너무 안 풀리면 정처 없이 걸어다녔어요. 서초동 소나무사거리에서 출발해 테헤란로 지나 삼성역까지 걸으면 2시간 반이 걸리죠. 모르고 지갑 두고 나간 날은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해서 왕복 5시간 가까이 걸었던 기억이 있네요."
흔히 걷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신수양이는 말이 있다. 안 원장은 강남 도심 일대를 5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마이웨이 철학을 정립했다.
안 원장의 마이웨이는 훗날 안철수연구소가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백신을 개발하면 신제품 값을 받는 대신 새로운 버전에 대해 유지, 보수 비용을 받기로 했다. 백신 특성 상 신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처음 도입된 계약방식을 거부했다. 연구소 영업담당 임원도 실적이 안 나오자 안 원장에게 포기하자고 청했다.
"당시 유혹도 매우 컸어요. 수익이 안 나왔으니.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기로 했죠. 마침내 법률까지 바뀔 정도로 지금은 그 계약방식이 상식이 됐죠. 눈앞의 돈만 좇다 단기 계약에 의존했으면 지금의 500억 매출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안 원장의 이런 철학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안 원장의 딸은 미국에서 수학과 화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길이다. 딸에게 진로에 대해 아버지로서 훈수를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본인 인생인데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죠. 내가 하도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딸이 나한테 물어볼 정도 입니다."
또 마이웨이 철학은 23년간 매스컴에서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잘 나가는 사람들 보면 외부평가가 진짜 자기 실력인 줄 아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자기 본 실력 알고 나면 많이 괴로워 하죠. 외부평가는 롤러코스터 같아요. 몇 번 올라가는가 싶더니 바로 고꾸라지기 일쑤죠. 그래서 저는 외부평가 연연하지 않고, 평가가 아무리 나빠도 내 본 실력만 믿고 살아 왔습니다."
▶워커홀릭? 나는 휴먼홀릭!= 안 원장은 아직 여름 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들 다 1년 중 한 번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국내외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올해 역시 서울대로 둥지를 새로 틀었기 때문에 여름휴가 떠날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평생 일과 공부에 묻혀 살았다.
"연구소 차리고 나서는 정신 없이 일만 했어요. 교수되고 나서는 방학이 있었지만 초보 교수가 어디 놀러갈 수 있나요. 학회 등 공무 상으로 해외에 가본 적은 있지만 LA, 런던, 파리 등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는 아직 못가봤네요."
이쯤 되면 워커홀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순간 조차도 현실을 떠나 머리를 식히기 보다는 철저히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안 원장이 진정으로 열중했던 것은 결국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의대생 시절 우연히 들어간 카톨릭학생회를 통해 진료봉사를 하면서 책에서만 읽었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계를 느꼈던 시절이었지만, 안 원장은 사람들을 만나며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더 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안 원장이 연구소를 차리고 회사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초기엔 힘들었지만 10년 정도 지나니까 안 연구소는 벤처기업 중에서도 매우 큰 기업이 됐죠. 하지만 안 연구소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주변 벤처기업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청년 일자리는 점점 줄고, 도전의식도 약해졌죠."
"사람들이 그런 문제의식 왜 갖고 사냐고 하지만, 혼자서만 잘 살수는 없으니까요. 우리집 아이라 행복하려면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결국 안 원장은 CEO 혼자 힘만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느꼈고, 보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길을 택했다. 2008년 미국 와튼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뒤 KAIST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안 원장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교육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일을 한다는 데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는 아직까지 정책 당국자들이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집단입니다. 여러 조언들을 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20대를 대상으로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거나, 카이스트에서 6학기 동안 학생들 가르치면서 실제 사람들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어요. 사장 했었으면 못 느꼈을 것들이죠."
최근 흘러나오는 정치권 영입설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교수가 매우 중요한 위치라며 에둘러 부인했다. "정치라는 게 혼자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나와 같은 생각 갖고 있는 사람 만나는 거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수는 작은 부분이지만 혼자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같은 생각의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안 원장이 신념과 가치관이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 김미경 교수(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다.
"카톨릭학생회 봉사활동 가서 만났는데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랑 같았어요. 또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무조건 시키자는 교육관도 같았어요. 특히 돈 더 많이 벌고, 더 안정적인 거 따지기 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 투자하는 직업관도 똑같았죠."
▶약속된 미래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나의 최대 자산은 '사람'=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안 원장의 라이프스타일은 '내일보다는 오늘을 위해 살자'였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그는 일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개미가 아니라 하루를 최대한 보람 있게 보내는 베짱이에 가까웠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지난 삶의 행보에 그대로 뭍어 있다. 엘리트 코스인 의사를 훌쩍 그만두고 야심차게 차린 회사를 차렸지만 자기발로 CEO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의대를 들어갈 때, 창업할 때 모두 안 원장 스스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학 후 카이스트 교수로 임명됐을 때 임용장에는 2008~202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다시 3년 만에 안정된 자리를 뒤로 하고 서울대로 옮겨 왔다. 서울대 역시 그에게 2027년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안 원장은 2027년까지 서울대에서 교수를 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장기 계획이란 걸 세워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 평생 한번도 안정, 보장이란 말이 나를 붙잡은 적은 없어요. 선택의 순간에서 모든 걸 고려했지만 이 둘은 항상 빠져 있었죠. 처음엔 의사만 할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결국 안 원장은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시간까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시간마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투자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렸던 셈이다.
다만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명확한 한 가지 기준은 있었다. "결정은 혼자 오래 고민해서 내리는 편입니다. 대신 기준은 늘 같았어요. 나에게 더 의미 있고, 내가 계속 열정 갖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에는 늘 사람이 제일 위에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 역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니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왔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물론 전기생리학 전공 시 존경했던 교수들은 모두 노벨의학상을 받았어요. 90년 중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들에 열광했고, 회사를 차리고 나선 앤디 그로브(인텔 창업자)처럼 성공한 엔지니어 출신 CEO가 되고 싶었죠. 와튼스쿨 다닐 때 레오나드 M. 로디시 교수로 부터 배운 교수법 덕분에 카이스트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잡았어요."
안 원장은 직업이 바뀔 때마다 롤 모델도 매번 바뀐다고 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알찬 지식을 배웠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요즘처럼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중요할 때가 없어요. 20~30대는 혼자 실력으로도 일하지만 40대부터는 인간관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죠. 나이 들어서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하는데 다 옛말 같습니다"
그는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친화력보다 더 큰 무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친화력은 처음에 쉽게 하는 데만 도움이 되지 진정한 관계 유지하는 것은 가치관 등 동질감을 형성하는 거 같아요. 안 연구소 16년 됐는데 지금도 장기근속자는 50명이 넘어요. 친구로 따지면 평생 친구인 거죠."
< 정태일 기자@ndisbegin >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49). 그는 지난 23년 간 매스컴을 오르내리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의사, CEO, 교수 등 남들은 일생에 한 번 이루기 힘든 직함을 반세기 동안 모두 달았다.
게다가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도 한둘이 아니다.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영입하고 싶은 CEO, 가장 건전한 경영자, 차세대 경제부문 리더, 떠오르는 스타교수 등
이처럼 다양한 직함과 타이틀에서 보듯, 안 원장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왔다. 그래서 일까. 늘 대중의 이목을 신경쓰고, 또 가끔은 무거운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 했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매스컴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신경 쓰면서 꾸미고 살았다면 23년간 관계했던 매스컴을 견뎌내지 못했겠죠. 사람들이 굴곡 없는 삶이다 그러는데, 꾸미지 않고 진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름 일관되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선한 인상에 겸손한 말투였지만 눈빛에는 '분명함'이 담겨 있었다. 주변 시선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쿨함'도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안 원장이 한 마디 던졌다. "참, 눈치 볼 때가 있기는 있네요. 대형마트에 장보러 갈 때요. 1+1상품은 인터넷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요. 하하하"
▶도전? 목표? 계획? 나와는 거리가 먼 말들= "제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아등바등 노력했던 기억은 전혀 없어요. 다만 하루 주어진 24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 열정 갖고 할 수 있는 일 열심히 하면서 살았던 기억만 있네요."
뜻밖이었다. 치밀하고 꼼꼼하게 인생을 설계해 온 모범생 이미지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의사, CEO, 교수 모두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지 않고는 이루기 힘든 직업인데 안 원장에겐 이 두 가지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원장은 밖에서는 자신이 도전하는 사람으로 비춰지지만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도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타입도 아니다. 오히려 목표 자체를 정하지 않는다. "뭔가를 이루려고 계획하기 보다는 매순간 열심히 살다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들이 성큼 다가왔다고 할까요. 현재를 열심히 즐기다 보니 미래가 오던 걸요."
하지만 안 원장의 인생이 처음부터 물 흘러가듯 순조롭지는 못했다. 착실히 의학도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창업의 길로 들어선 것도 자신이 더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선택이었지만 이 역시 목표한 바는 아니었다. 안 원장은 "미래 전망은 아예 보지도 않고 무작정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 역시 컴퓨터 바이러스야 말로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재미 있게 열정 갖고 계속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혹했다. 창업 초기인 1995~1999년은 안 원장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그에게 가장 큰 일은 매달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었다. 매달 초가 되면 행여 월급을 못 줄까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매출이 변변치 않은 달에는 돈을 구하러 은행을 돌며 어음깡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어음깡이라는 게 기업에 따라 객관적 평가가 적용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담당 직원 마음대로 고무줄 평가를 받더라고요. 누구한테 잘보이려는 건 정말 곤욕이었죠."
하지만 안 원장을 더욱 괴롭히는 건 본인 스스로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사업한 지 3년이 지난 1998년 사무실은 남부터미널 부근에 있었는데, 안 원장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도 매일 밤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그날 번 돈과 쓴 돈 등 10원짜리 하나하나 세면서 하루를 보냈다. 순간 울컥했다.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지 서글퍼지더라고요. 동기동창들은 의사나 교수하면서 잘 살고 있는데... 나는 그때 배운 거 다 버리고 그러고 있었으니…"
▶바닥에서 정립한 마이웨이 철학 '절대 남들과 비교하지 않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안 원장은 평생 자신을 바로 세워줄 버팀목 같은 철학을 만들었다. 바로 "절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할수록 제 자신만 힘들어지더라고요. 남들이 다 위만 보고 갈 때 나라도 가끔 아래를 내려다보자고 생각했죠."
안 원장은 이를 산을 오르는 것에 비교했다. "정상만 바라보면 구름이 가리기도 해서 불안해 지는데, 뒤돌아보면 없는 가운데 이 만큼 왔구나 하고 안심이 되잖아요. 결국 원대한 목표가 사람을 지치게 하더라고요."
이런 생각에 안 원장은 목표를 크게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 허덕이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일주일, 한달이란 시간을 값지게 쓰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남부터미널 작은 사무실 안에 갇혀 장부 계산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는 자신을 애타게 여기던 그 자신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안 원장은 걷기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너무 안 풀리면 정처 없이 걸어다녔어요. 서초동 소나무사거리에서 출발해 테헤란로 지나 삼성역까지 걸으면 2시간 반이 걸리죠. 모르고 지갑 두고 나간 날은 다시 걸어서 돌아와야 해서 왕복 5시간 가까이 걸었던 기억이 있네요."
흔히 걷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정신수양이는 말이 있다. 안 원장은 강남 도심 일대를 5시간 가까이 걸으면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마이웨이 철학을 정립했다.
안 원장의 마이웨이는 훗날 안철수연구소가 비즈니스모델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처음 백신을 개발하면 신제품 값을 받는 대신 새로운 버전에 대해 유지, 보수 비용을 받기로 했다. 백신 특성 상 신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처음 도입된 계약방식을 거부했다. 연구소 영업담당 임원도 실적이 안 나오자 안 원장에게 포기하자고 청했다.
"당시 유혹도 매우 컸어요. 수익이 안 나왔으니.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기로 했죠. 마침내 법률까지 바뀔 정도로 지금은 그 계약방식이 상식이 됐죠. 눈앞의 돈만 좇다 단기 계약에 의존했으면 지금의 500억 매출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안 원장의 이런 철학은 자녀 교육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재 안 원장의 딸은 미국에서 수학과 화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원해서 시작한 길이다. 딸에게 진로에 대해 아버지로서 훈수를 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본인 인생인데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죠. 내가 하도 이래라 저래라 말이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딸이 나한테 물어볼 정도 입니다."
또 마이웨이 철학은 23년간 매스컴에서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잘 나가는 사람들 보면 외부평가가 진짜 자기 실력인 줄 아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자기 본 실력 알고 나면 많이 괴로워 하죠. 외부평가는 롤러코스터 같아요. 몇 번 올라가는가 싶더니 바로 고꾸라지기 일쑤죠. 그래서 저는 외부평가 연연하지 않고, 평가가 아무리 나빠도 내 본 실력만 믿고 살아 왔습니다."
▶워커홀릭? 나는 휴먼홀릭!= 안 원장은 아직 여름 휴가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남들 다 1년 중 한 번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국내외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올해 역시 서울대로 둥지를 새로 틀었기 때문에 여름휴가 떠날 여유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평생 일과 공부에 묻혀 살았다.
"연구소 차리고 나서는 정신 없이 일만 했어요. 교수되고 나서는 방학이 있었지만 초보 교수가 어디 놀러갈 수 있나요. 학회 등 공무 상으로 해외에 가본 적은 있지만 LA, 런던, 파리 등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는 아직 못가봤네요."
이쯤 되면 워커홀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순간 조차도 현실을 떠나 머리를 식히기 보다는 철저히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안 원장이 진정으로 열중했던 것은 결국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의대생 시절 우연히 들어간 카톨릭학생회를 통해 진료봉사를 하면서 책에서만 읽었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한계를 느꼈던 시절이었지만, 안 원장은 사람들을 만나며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더 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안 원장이 연구소를 차리고 회사가 자리를 잡은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초기엔 힘들었지만 10년 정도 지나니까 안 연구소는 벤처기업 중에서도 매우 큰 기업이 됐죠. 하지만 안 연구소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주변 벤처기업은 여전히 어려웠어요. 청년 일자리는 점점 줄고, 도전의식도 약해졌죠."
"사람들이 그런 문제의식 왜 갖고 사냐고 하지만, 혼자서만 잘 살수는 없으니까요. 우리집 아이라 행복하려면 옆집 아이가 행복해야 하니까요."
결국 안 원장은 CEO 혼자 힘만으로는 벅차다는 것을 느꼈고, 보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학계의 길을 택했다. 2008년 미국 와튼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뒤 KAIST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안 원장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교육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일을 한다는 데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에서 교수는 아직까지 정책 당국자들이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집단입니다. 여러 조언들을 해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20대를 대상으로 기업가정신을 가르치거나, 카이스트에서 6학기 동안 학생들 가르치면서 실제 사람들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어요. 사장 했었으면 못 느꼈을 것들이죠."
최근 흘러나오는 정치권 영입설에 대해서도 안 원장은 교수가 매우 중요한 위치라며 에둘러 부인했다. "정치라는 게 혼자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나와 같은 생각 갖고 있는 사람 만나는 거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수는 작은 부분이지만 혼자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같은 생각의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안 원장이 신념과 가치관이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 김미경 교수(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다.
"카톨릭학생회 봉사활동 가서 만났는데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저랑 같았어요. 또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무조건 시키자는 교육관도 같았어요. 특히 돈 더 많이 벌고, 더 안정적인 거 따지기 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 투자하는 직업관도 똑같았죠."
▶약속된 미래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나의 최대 자산은 '사람'=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안 원장의 라이프스타일은 '내일보다는 오늘을 위해 살자'였다. 안정된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그는 일하는 데 있어서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하는 개미가 아니라 하루를 최대한 보람 있게 보내는 베짱이에 가까웠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지난 삶의 행보에 그대로 뭍어 있다. 엘리트 코스인 의사를 훌쩍 그만두고 야심차게 차린 회사를 차렸지만 자기발로 CEO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의대를 들어갈 때, 창업할 때 모두 안 원장 스스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학 후 카이스트 교수로 임명됐을 때 임용장에는 2008~2027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는 다시 3년 만에 안정된 자리를 뒤로 하고 서울대로 옮겨 왔다. 서울대 역시 그에게 2027년까지 정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안 원장은 2027년까지 서울대에서 교수를 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장기 계획이란 걸 세워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내 평생 한번도 안정, 보장이란 말이 나를 붙잡은 적은 없어요. 선택의 순간에서 모든 걸 고려했지만 이 둘은 항상 빠져 있었죠. 처음엔 의사만 할줄 알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결국 안 원장은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시간까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시간마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투자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렸던 셈이다.
다만 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명확한 한 가지 기준은 있었다. "결정은 혼자 오래 고민해서 내리는 편입니다. 대신 기준은 늘 같았어요. 나에게 더 의미 있고, 내가 계속 열정 갖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판단 기준에는 늘 사람이 제일 위에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 역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존경하는 인물을 꼽아달라니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왔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물론 전기생리학 전공 시 존경했던 교수들은 모두 노벨의학상을 받았어요. 90년 중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들에 열광했고, 회사를 차리고 나선 앤디 그로브(인텔 창업자)처럼 성공한 엔지니어 출신 CEO가 되고 싶었죠. 와튼스쿨 다닐 때 레오나드 M. 로디시 교수로 부터 배운 교수법 덕분에 카이스트에서 비교적 빨리 자리잡았어요."
안 원장은 직업이 바뀔 때마다 롤 모델도 매번 바뀐다고 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알찬 지식을 배웠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요즘처럼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중요할 때가 없어요. 20~30대는 혼자 실력으로도 일하지만 40대부터는 인간관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죠. 나이 들어서 친구 사귀기 힘들다고 하는데 다 옛말 같습니다"
그는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친화력보다 더 큰 무기가 있다고 소개했다. "친화력은 처음에 쉽게 하는 데만 도움이 되지 진정한 관계 유지하는 것은 가치관 등 동질감을 형성하는 거 같아요. 안 연구소 16년 됐는데 지금도 장기근속자는 50명이 넘어요. 친구로 따지면 평생 친구인 거죠."
< 정태일 기자@ndisbeg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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