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인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mkpark2022 2011. 11. 22. 22:20

 나혜석 (羅蕙錫)

 1896~1948 본관 羅州. 호 晶月, 여류 서양화가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나혜석 문화관광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 1896∼1948) 선생을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나혜석 선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1921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었으며, '자화상','페인풍경','파리풍경'등의 작품을 남겼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감각으로 소설,시 등의 문필활동까지 하여 1918년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소설 '경희'를 발표한 근대최초의 여성작가이며, 3·1운동때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에서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돌본 민족주의자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소위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사건'으로 인해 이혼을 하였고,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봉건적인 사회관습에 도전한 여성운동가였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으며 조선여성의 진보에 대한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비판하며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나혜석은 한말에 사법관을 거쳐 군수를 지낸 기정(基貞)의 5남매 중 둘째딸로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유부남이었던 시인 최승구와 공개 연애를 하고 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에는 만주 안동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정부 외교관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 쿄토제대출신 변호사)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연구소에서 수업하였다. 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순례를 통해서 미술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국하였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작품경향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그 밖에 문재(文才)도 뛰어나 많은 문필업적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 파리에서 그린 '무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와 '스페인해수욕장' 등이 있다.

 

유럽 여행중 사귄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명인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 후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죄’라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 당시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던 나혜석.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뒤 수덕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화가로서의 정상적 활동은 1935년 서울에서 가졌던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고,정신장애 반신불수등으로 고생을 하다가 1948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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