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입니다.
부여의 왕은 주몽이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둘째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어 사위로 맞았습니다.
그뒤 졸본 부여의 왕은 세상을 떠나고 주몽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주몽과 왕비 사이에는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맏아들이 비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였습니다.
주몽의 본부인 아들인 유리 태자가 북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오게 되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유리 태자가 두려워 오간과 마리 등 10명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습니다.
비류와 온조 형제는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 봉우리에 올라가 새나라의 터를 잡을 만한 땅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류가 바닷가에 터를 잡으려 하자 열 사람의 부하들이 말렸습니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강을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을 의지하여 남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서쪽은 큰 바다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얻기가 어려운줄 압니다.
이곳에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류는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비류는 따라온 백성들을 아우인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 부근)로 떠났습니다.
아우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 지었습니다.
미추홀로 간 비류는 그곳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기 때문에 편히 터를 잡을 수가 없어 위례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위례성의 도읍은 자리가 잡혀 가고 백성들은 편히 잘 살고 있었습니다.
비류는 부끄러움과 뉘우침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신하와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은 위례성으로 오면서 모두들 즐거워했다고 하여 그 뒤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다같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온조의 성도 해씨라고 했습니다.
뒤에 백제는 성왕 때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는데 그 곳이 지금의 부여군입니다.
백제의 호암사라는 절에는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나라의 재상을 뽑을 때에는 후보자 3, 4명의 이름을 상자 속에 적어 넣고 뚜껑을 닫은뒤
상자를 바위 위에 놓아 두었다가 잠시 후에 열어보면 재상이 될 사람의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바위를 정사암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비수 강가에는 용암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일찍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 위에 앉아서 용을 낚았다고 하는데
바위에 용이 꿇어 앉은 자국이 있다고 하여 용암이라고 불렀습니다.
백제 왕이 왕흥사에 가는 길에 이곳에 먼저 들러 부처님에게 절을 하였더니 바위가 따뜻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바위를 돌석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비수의 양쪽 언덕은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의 왕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놀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을 대왕포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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