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수필)

위태롭고 불안한가? 집착부터 내려놔라

mkpark2022 2012. 1. 11. 08:20

 

위태롭고 불안한가? 집착부터 내려놔라

인문학 산책 -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만물 전체가 하나의 하늘일 뿐"
사사로운 '나' 에서 벗어나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詩에 담아내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우리는 남들과 모여서 즐거울 때 나와 남이란 구별을 잠시 잊는다. 나와 남을 의식하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몸과 마음이 경직돼 불편하다. 또 우리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감탄할 때 자기 존재를 잊고 경치와 하나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자연의 장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런 자취도 없으니 참으로 덧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가 ‘나’라고 단단히 믿는 이 육신도 덧없기는 바람과 다를 바 없다. 나를 자기 육신에 국한하는 견고한 집착을 버리고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우리네 삶이란 것이 늘 위태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석주(石洲) 권필(權·1569~1612)은 《석주집(石洲集)》의 ‘잡술(雜述)’에 이렇게 썼다.

‘맹춘(孟春·음력 1월) 초하루에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는데 썰렁한 바람이 불어와 뜰을 배회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이상해라, 바람이여. 바람은 무슨 기(氣)인가.” 내가 대답했다.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하나의 기(氣)일 뿐인데 기는 모이고 흩어짐이 있고 오르내림이 있습니다. 대저 바람이란 기의 자취인데 무엇이 이것을 불게 하는가. 이(理)가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어 손을 들어서 보이며 말했다.

‘“그대는 이 손을 아시오.” 그가 말했다. “손입니다.” 내가 말했다. “손이 손인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고요했고 지금은 움직이며 조금 전에는 굽혔고 지금은 폈으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말했다. “기(氣)입니다. 기.”’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렇습니다. 기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늘은 무엇인가. 기일 뿐이고 리(理)일 뿐입니다. 하늘에 리와 기가 있어 만물이 생겨나니, 만물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면 만물은 제각각 만물일 뿐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만물을 보면 만물도 하늘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내가 아니며 내가 바람이 아니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석주는 인재가 많이 배출돼 목릉성제(穆陵盛際)로 불린 선조(宣祖) 때에도 시로는 단연 당대의 으뜸이라는 평을 받았다. 강직한 성품에 야인기질이 강했던 그는 과거에 뜻이 없어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야인으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반하는 문사(文士)로 뽑혀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한번은 광해군의 처남인 권신 유희분(柳希奮)을 풍자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친구들이 차려준 술자리에서 통음하고 이튿날 세상을 떠났으니, 시인의 마지막 또한 그의 삶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손의 움직임으로 바람의 원리를 설명한 것은 시인답게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발상이다. 손을 굽혔다 펴는 것을 가지고 기(氣)의 움직임을 설명한 것은 음양(陰陽)을 기의 굴신(屈伸)으로 보는 《주역(周易)》의 사상과 같다. 우주에는 하나의 기(氣)가 있을 뿐인데 이 기가 고요하면 음(陰)이요 움직이면 양(陽)이며, 움츠러들면 음이요 펴지면 양이다. 밤은 음이요 낮은 양이며, 봄 여름은 양이요 가을 겨울은 음이다. 즉 우주의 모든 현상이 바로 음양의 운동 과정인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근원자를 리(理)라고 한다. 리가 우주의 유일한 실존이고, 리가 기를 통해 자기의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 우주의 삼라만상이다. 그런데 그는 ‘하늘은 무엇인가. 기일 뿐이고 리(理)일 뿐’이라 했으니 정이천(程伊川)이 ‘하늘이 곧 리이다(天卽理)’라고 한 명제와 어긋나고, 다시 ‘하늘에 리와 기가 있어 만물이 생겨난다’했으니 하늘이란 근원자가 리와 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됐다. 하늘이 근원자가 되고 리와 기가 근원자의 손발이 된 듯한 느낌이다. 논리가 다소 거칠고 비약적이다.

중국의 한 선사(禪師)는 “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天地與我同根,萬物與我一體)”고 했다. 만물이 정녕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각개라면 서로를 느낄 수 있을까. 우주가 그냥 하나일 뿐이라면 만물이 서로를 보고 인식할 수 없지 않을까. 아, 본래 하나가 아니면 서로를 느낄 수 없을 것이요 둘이 아니라면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니, 삼라만상을 펼쳐서 자신을 현현(顯現)하고 있는 근원자의 조화가 참으로 신묘하다.

대개 종교의 가르침은 자기를 버리고 천지의 본성, 우주의 근원자와 합일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근원자에 합일하려면 사사로운 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생을 얻고자 한다. 자기가 나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 사사로운 나를 버려야 근원자에 합일할 수 있는데 오히려 나에 더욱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인적위자(認賊爲子)’, 즉 도적을 자식으로 잘못 안다고 한다.

주자(朱子)는 “‘천지의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이니, 어찌 죽는다고 해서 없어질 리 있겠는가’라는 말은 그르지 않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천지를 위주로 한 것인가, 나를 위주로 한 것인가”라고 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이상하 <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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