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인물)

체 게바라

mkpark2022 2012. 6. 24. 18:59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아름다운 쿠바섬에 원주민이 사라지고
대신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이 데려온 노예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땅은 유럽인들의 소유가 된다. 처음에 황금을 캐던 유럽인들은 담배와 사탕수수를 재배한다.

미국의 독립후에 미국은 쿠바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를 정제한 설탕으로 럼주를 가공해 팔았다.

쿠바에 눈독을 점점 미국은 들이기 시작한다.


1898년 의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쿠바에 있는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항구에 정박해있던 미국 전함 메인 호가 폭발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멀쩡한 전함이 왜 폭발했는지 의문에 쌓여있다)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다.
스페인은 쿠바를 포기하고 영원이 떠나고 스페인군이 철수하자 미군이 들이닥쳤다.

 

쿠바의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450년이 넘도록 식민통치가 이루어진
쿠바를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해방시킨 주인공들이다.
둘은 독서광이었고 강인한 체력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따뜻한 품성을 지녔다.


피델은 조국 쿠바를 사랑했다.
젊은 피델의 눈에 비친 쿠바는 미국 기업의 돈을 불려주고 미국이 원하는 땅은 어디든 내주는 곳이었다.

쿠바 영토의 4분의 3은 미국인들 소유였다. 쿠바 대통령의 4분의 3은 독재자이거나 친미인사들이거나 아예 미국인이었다.

 

피델은 위대한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쿠바 독립의 아버지였던 호세 마르티의 책을 읽고 그의 사상과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켜나갔다.

그렇게 피델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행동하며 쿠바 해방을 위하여 치열한 활동을 시작한다.

피델은 뛰어난 연설로 학생운동의 핵심이 되고 1950년에 대학졸업후 변호사로 개업하며 정치에 뜻을 둔다.

 

젊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체게바라)는 남미대륙 전체를 자신의 가슴에 받아들였다.

1947년 에르네스토는 의과대학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1950년에 자전거를 타고 아르헨티나를 여행한다.

이 여행에서 그는 부끄러움과 충격을 느낀다. 남미 전체를 여행하면서 남미 전체가
미국에게 착취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남미 민중 전체의 현실에 눈을 뜬다.

 

1953년 피델과 150여명의 동지들은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나 실패한다.
피델은 법정 진술에서 '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는 역사에 길이남을 명언을 남겼다.

 

15년형을 받고 피노스 섬에 유배된 피델은 그곳에 아예 자신의 도서관을 만들어 철학, 사회과학, 문학을 넘나들며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혁명의 기회에 대비하여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낸다.

 

피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쿠바민중들은 파업, 시위, 습격을 통해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바티스타는 양보안을 제시했는데, 피델과 그의 동료들의 석방이었다. 석방된 피델과 동료들은 멕시코로 떠난다.
피델의 동생의 소개로 운명적인 첫만남을 가진 두 혁명가는 평생 동지가 되었다.


피델은 29세, 에르네스토는 27세였다.

훗날 쿠바 게릴라 동료들은 말끝마다 아르헨티나의 감탄사인 che를 붙이는 에르네스트에게 " 체 라는 애칭을 선사한다.

체게바라라는 전설은 쿠바혁명에 가담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80명의 인원으로 그들은 바티스타를 무너뜨리겠다고 계획한다. 쿠바에 상륙하자마자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고 80명이 12명이 되었다.
바티스타는 수염난 애송이를 잡는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피델에게는 바티스타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쿠바 민중들의 마음이었다.


혁명군들은 글을 가르쳐주고, 일을 거들어주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었다.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었다.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했다.

그들을 따르는 농부, 민주인사들과 정당인들, 학생운동가들과 젊은이들이 그들을 지원해준다.

 

1958년 피델은 바티스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한다. 바티스타는 미국에게서 받은 탱크, 비행기, 기관총, 폭탄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혁명군과 민중의 행진을 도저히 막지 못한다.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해외로 떠나고 쿠바혁명군은 승리한다.


피델의 나이 31세였다. 피델은 민주주의 원칙에 맞게 혁명공약을 실천한다.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땅을 제공하고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을 제공했다.

매춘굴과 카지노가 사라지고 학교와 병원이 들어섰다.

쿠바국민이라면 누구나 무상으로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쿠바땅의 70퍼센트가 자신들의 소유였는데 그걸 농부들에게 나눠준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또 집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무상의료,교육을 하는 것은 미국 재벌 기업들에게 치명타였다.

미국은 경제를 압박해 쿠바의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했다.


먼저 쿠바에서 생산한 설탕의 수입량을 줄였다.

설탕이 최대 수출품인 쿠바에서 설탕을 수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재앙이었다.

그리고 석유를 비롯하여 쿠바로 수출하던 물품의 양도 제한했다.

미국은 피델이 공산주의자이며 쿠바를 공산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보도한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1961년 미국으로 망명했던 1500명의 쿠바인들이 피그만에 상륙하여 쿠바 본토를 공격한 사건이 터졌다.

피델과 혁명군은 이들을 신속히 제압한다.
미국은 처음에 사실을 발뺌하다가 그 사실을 인정한다.

미국은 피델을 제거하기 위해 무려 638회가 넘는 암살시도를 했다고 한다.

 

- 저서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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