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브라질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 [Lula da Silva, Luiz Inacio]의 리더십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포르투갈어; Luiz Inácio Lula da Silva, 1945년 10월 27일 - )는 브라질의 정치인으로, 대외적으로 룰라(Lul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이후 2003년 브라질의 제35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2006년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초기 생애
금속노동자가 되다
룰라는 1945년 10월 6일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 주의 궁벽한 농촌 마을 까에떼스(caetes)에서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로 룰라는 어릴 적부터 부르던 애칭이었다. 룰라라는 이름은 성인이 된 후 정식 이름에 덧붙였다. 대가족을 거느렸으나 가난했던 그의 부모는 루이스와 다른 가족을 데리고 상파울루 주 산투스로 이주했고, 곧 상파울루 시로 옮겼다. 루이스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10세가 되어서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때까지 문맹 상태였다.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학교를 4학년 때 그만두어야 했으므로 초등학교 4학년의 학력이 배움의 전부이다. 그 후 그는 상파울루의 거리에서 행상과 구두닦이를 하며 돈을 벌다가 금속공장에 들어갈 기회를 얻게됐다. 그는 금속 공장에 다니면서 기술 학교에서 일을 배웠고, 18세 때는 금속을 깍아서 가공하는 기술인 선반공 자격증도 취득했으나, 공장에서 사고를 당해 왼쪽 새끼 손가락을 잃었다.
노동운동
산재로 손가락을 잃은 것을 계기로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공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차츰 확보해 나가면서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됐고, 1968년에는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던 여성과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은 간염에 걸려 그 다음 해 뱃속의 아기와 함께 치료도 못 받고 죽었는데,미리 아기 옷을 준비할 만큼 부인의 출산을 기다리던 룰라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부인의 병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악화된 것으로 여겨졌고, 적절한 치료만 받았으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룰라는 노동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해, 노조의 활동가가 됐다. 1974년 노조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여사무원 마리자 레티시아와 재혼했다.
금속노조 위원장
1975년 브라질 금속노조 위원장에 당선되면서 10만명 이상의 노조원의 대표가 되었다. 룰라 평전인 《브라질의 선택 룰라》(박원복 옮김,가산)에 의하면 룰라는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일하던 시기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귀담아들었다. 항상 사무실을 열어두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커피를 대접하면서 귀담아들었으며,퇴직금 정산,학교 설립 등 노동자의 복지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연히 노동자들은 룰라 위원장을 신뢰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의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같은 완성차 업체들의 금속노동자들이 정부의 임금정책을 거부하고 사용자와의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완성차 업체 금속노동자들의 투쟁은 전국적인 총파업투쟁으로 발전하였으며 1979년,1980년에도 그러하였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권리의식은 신 노동조합운동 형성 및 브라질 노동자당(PT)창당 곧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로 발전하였다.노동자당은 지주 및 중산층 위주의 지방의회에서 주민 참여예산제를 주장하는 등 기존정당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었다.
교회의 연대
당시 브라질 교회에서는 해방신학 노선의 성직자들이 노동운동과 연대했다. 브라질 교회에서는 파업투쟁을 하는 노동자들과의 연대로써 해방신학을 실천하였으며, 룰라가 노동운동하다가 경찰에 잡혀갔을 때에는 로마 가톨릭 주교들이 발 빠르게 이 사실을 널리 알림으로써, 결국 군사독재정권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룰라를 석방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전에 룰라는 체 게바라 셔츠와 그의 무성한 턱수염으로 알려진 공격적인 노동 운동 지도자 였다.선거를 위한 캠페인에서 그는 그의 점잖지 못한 옷차림과 함께 브라질의 외채 상환을 그의 공약에서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러한 선언은 세계경제에 거대한 파문효과를 준 아르헨티나 디폴트선언의 뒤를 이어 브라질의 부분적인 디폴트 선언을 두려워하는 경제학자들과 사업가 그리고 은행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범적으로 외채를 줄여감으로써 현실적인 외채정책을 실시하였으므로 이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정치적 자문 두다 멘돈까(Duda Mendonca)의 조언을 따라 보다 미디어 친화적인 이미지를 추구한 룰라는 PSDB(브라질 사회민주당)의 후보자 호세 세라 ( Jose Serra)를 2002년 10월 27일 대통령선거에서 물리치고 브라질의 35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집권 1기 (2003 ~ 2006)
중도노선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 경력을 시작한뒤로부터 룰라는 그의 원래 아이디어중 일부를 변경하고 그의 정치적 포지션을 중도로 변화시켰다.룰라는 취임연설에서 단계적으로 사회를 바꾸어가겠다고 말하였다. 그가 과거에 주장한 사회주의 노선의 사회변화(기간산업의 국유화,외채지불 중지,급진적 토지개혁)대신 그의 정부는 개혁노선을 선택했고,새로운 은퇴, 세금, 노동 관련의 법을 통과시켰으며 또한 대학교육의 변화에 대해 토론했다. 브라질 노동당의 몇몇 분파가 이러한 중도적인 변화에 거부하고 노동조직당이나 사회주의적 노동자 연합당,자유사회당 같은 반체제적 성격을 지닌 당으로 이탈했다.하지만 노동자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았다.
복지정책의 배경
룰라는 그가 선출된 이래 그의 공약가운데 복지 프로그램을 최우선적으로 실시했다. 군부독재정권 시기에 다국적 자본들이 경제원조한다는 구실로 외채를 빌려주어 브라질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외채문제, 소수의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대다수의 농민들이 무토지 농민인 심각한 빈부의 격차등으로 인해 브라질 민중들이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난도 엔리께 까르도소(Fernando Henrique Cardoso) 행정관에 의해 이미 시도된 바 있는,굶주림을 근절시키자는 캠페인을 보다 확대시켜 포메제로 (Fome Zero)라는 이름의 캠페인으로 시도했다. 이 프로그램은 브라질에서의 굶주림을 끝장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다른 일련의 프로그램과 함께 시행되었다. 브라질의 세라또(Serato)에서 건조지역에서의 물탱크 건설, 청소년 임신 반대 운동, 가족 농업 강화(무토지 농민 곧 소작인에게 무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제공하고 농업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지주의 착취에 의한 소작인들의 만성빈곤을 개혁하는 토지개혁.브라질 가톨릭교회의 해방신학자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무토지 농민으로 지주의 착취에 의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따라서 무토지 농민들이 토지를 점거하는 등 계급간의 갈등이 심각할수밖에 없었다.), 빈민층에 대한 지원금 등등 과거 깜삐나스(Campinas)의 호세 로베르토 마갈라이스 테세이라 ( Jose Roberto Magalhaes Teixeira)시장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조건부 학습 지원 프로그램 볼사 에스꼴라 (Bolsa Escola) (학습 허가) 프로그램을 볼사 파밀리아 라는 이름으로 확대하여 실시했다. 이것은 그의 정책중 가장 큰 규모의 사회 프로그램이었다.
사회개발 빛 기아박멸부
볼사 파밀리아는 학습 지원 외에 빈민층을 위한 식량 및 가스를 지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방 자치단체와 주 역시 비슷한 프로그램을 도입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책은 그의 행정부 내에 사회 개발 및 기아 박멸부 라는 부서를 만들면서 진행되었는데,이러한 합병은 프로그램관리비용, 절차적인 복잡성등을 절감하게 되었다.
복지와 토지개혁의 성공
포메제로는 국가예산외에 국제사회로부터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 볼사 파밀리아는 그것이 선거를 위한 무기 라는 내부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업적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칭송받았다. 포메 제로와 볼사 파밀리아 같은 프로젝트 보다 룰라행정부의 최우선 프로그램은 PAC 경제 성장 가속 프로그램이었다. 그것은 브라질의 기간사업을 강화 시키고 결과적으로 경제를 자극시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집권 2기 (2007 ~ 2010)
좌파인 룰라의 재임기간동안 브라질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됐고, 세계 8위 경제국으로 성장했다. 또한 빈민들에 대한 식량 무상제공, 저소득층 생계비 지원,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노동을 하지만 빈곤한 노동빈곤층의 임금향상, 미취학 아동이 있는 가정의 경우 취학을 전제로 한 생계비 지원, 최저임금의 현실화 등의 복지정책 등이 높은 호응을 얻었다. 룰라는 보수세력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했고, 우파정당과 정책연합을 구성하는 등 반대 성향의 세력들과의 소통에도 노력했다. 2010년 12월 29일 여론조사기관 센수스·이보페가 룰라의 퇴임을 앞두고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룰라 대통령에 대한 브라질 사람들의 지지율은 87%였다. 상파울루 주의 지지율은 95%를 넘었다. /위키백과
출처 : 필라테리아 PHILATELIA - 우표공부방 : 화상 2011.08.24 16:12
http://blog.daum.net/philook/15716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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