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왕실 여성이 아닌 일반 여성으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어우동(於于同, 또는 於乙宇同, ?~1480)이 첫째나 둘째에 꼽힐 것이다.
그런데 긍정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성추문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부정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었고,
‘조선을 뒤흔든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성추문 사건은 현대에 들어서도 민감한 사안이다.
정치인을 하루아침에 낙마시키고, 톱스타로 선망을 받는 연예인이나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인사도
성추문에 휩쓸리면 하루아침에 평생 쌓아온 명예를 모두 잃게 된다.
15세기 남성 중심의 사회 체제 속에서 희대의 성추문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던 어우동과
그녀를 둘러싼 사건의 전말 속으로 들어가본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어우동 사건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인 [성종실록]에는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도 이 사건이 뜨거운 뉴스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1480년(성종 11) 7월 9일의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방산수1)(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어을우동(於乙宇同)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에 간통한 죄는,
율이 장 1백 대, 도(徒: 구속형) 3년에 고신(告身: 관리의 임명장)을 모조리 박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은을 대신 바치게 하고 고신을 거두고서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
- 守는 조선시대 왕실의 증손에 해당하는 종친들에게 부여한 명예직이다.
이에 따르면 태강수의 아내인 어우동이 방산수, 수산수 등
왕실의 종친들과 간통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 달 뒤인 8월 5일, 오늘날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사헌부 대사헌 정괄(鄭佸) 등이
차자(箚子: 격식을 갖추지 않고 적어 올린 상소문)를 올리는데 어우동 사건에 관계된 연루자가 더 생겨나고
의혹이 증폭되면서 대사헌이 직접 나선 것이다.
정광필은 “신 등이 생각건대, 어을우동이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고서
음란함을 자행하였으니 명예를 훼손하고 더럽힌 것이 막심합니다.
마땅히 사통한 자를 끝까지 추문하여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는데,
의금부에서 방산수 이난의 초사(招辭: 범죄 사실에 대한 진술)에 의거하여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ㆍ김칭ㆍ김휘ㆍ정숙지를 국문하도록 청하였는데,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은 완전히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으시고, 김칭ㆍ김휘ㆍ정숙지 등은
다만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하였으니 김칭 등이 스스로 죄가 중한 것을 아는데,
어찌 한 차례 형신하여 갑자기 그 실정을 말하겠습니까? 신 등이 의심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고 하여,
관련 인사들에 대한 미온적인 처벌을 비판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언론 기관인 사간원에서 도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의 죄를 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반면에 사건의 발단이 된 인물인 어우동에 대해서는 사건 발발 3개월 만인 1480년 10월 18일
바로 교형(絞刑: 목을 매어 죽임)에 처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성종실록]에는 “어을우동을 교형에 처하였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에게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고 하여
어우동의 행실 문제로 처형되었음을 기록하였다.
당시 일부 신하들이 어우동을 사형시키는 조치에 반대를 했지만,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성종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당대의 학자 성현의 눈에 비친 어우동 사건
한편 성종 시대의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당대에 일어났던
어우동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실록에 기록된 ‘어을우동’과 달리 ‘어우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주목된다.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승문원의 관리)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인 태강수(泰江守)의 아내가 된 뒤에도 군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교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예쁜 소년을 이끌어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이 피고 달이 밝은 저녁엔 정욕(情慾)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어우동의 계집종까지 남성을 알선해주고,
심지어 어우동은 어린 소년까지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볼 수가 있다.
어우동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성현이 어우동 사건을 자세히 취급한 것에서,
이 사건이 당시 관료 사회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재총화]의 기록을 좀 더 따라가 보자.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와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군수는 나이가 젊고 호탕하여 시를 지을 줄 알았으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을 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조정의 관리와 유생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을 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는
기록에서 어우동 스캔들의 파문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어우동 역시 처벌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처음 의금부에서는 여러 재상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재상들은 그녀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풍속을 바로잡자는 취지에서 극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당시에도 어우동에 대한 처벌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종은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여, 여자들이 음행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되는 바가 없을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로 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어을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한 형벌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누구보다 어우동을 극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성종의 처형 명분은 무엇보다 조선의 사회 풍속과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었다.
조선의 건국 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은 15세기 후반 성종 당시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은 듯하다.
남녀 차별 없이 균분상속(均分相續)이 이루어지고
혼례식을 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일정기간 거주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성종은 조선 전기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을 쓰는 한편 성리학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고 수용하려고 한 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진 ‘어우동 스캔들’은 성리학의 이념 전파에 걸림돌이 되는 사건이었고
성종은 시범 케이스로 어우동을 처형하겠다는 뜻을 굳혔다.
음란한 여인을 극형에 처함으로써 조선의 모든 여성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자는 뜻을 확실히 보인 것이었다.
어우동 사건의 또 다른 짝, 폐비 윤씨의 죽음
어우동이 교형(絞刑)으로 처형된 날은 1480년(성종 11) 10월이었다.
이날은 성종의 왕비인 윤씨가 1479년 폐위되었다가 1482년 사사(賜死)된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왕실에서 왕의 권위에 도전했던 폐비 윤씨와 민간에서 남성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어우동의 모습에는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폐비 윤씨(廢妃尹氏, 1445~1482)는 1473년(성종 4) 3월 종2품 숙의(淑儀)로 간택되어 후궁이 되었었다.
그녀가 후궁이 되고나서 1년쯤 후에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가 사망하였고
왕실에서는 계비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1476년 7월 윤씨는 여러 후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성종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세조의 비)는 전교를 내려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기는 바이며 나의 의사(意思)도 또한 그가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윤씨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 큰일을 위촉할 만하다.”고 하였고,
8월 9일 정식으로 왕비(제헌왕후)에 책봉되었다.
이해 12월 7일 왕자(후의 연산군)가 출생했으니,
윤씨가 이미 성종의 자식을 갖고 있었던 점은 왕비 책봉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1479년 6월 13일 성종은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퇴출시키는 파격적인 결정을 하고 이를 종묘에 고하였다.
왕비 윤씨는 후궁으로부터 드디어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조하는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지어
지난 정유년(1477년)에는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음모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가 이를 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청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바랐으며,
나도 폐출하는 것은 큰일이고 허물은 또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아니하고 덕을 잃음이 더욱 심하여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결단코 위로는 종묘를 이어 받들고 아래로는 국가에 모범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에 성화 15년(1479년) 6월 2일에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아아 법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 일은 반드시 여러 번 생각하는 것이니
만세를 위해 염려해야 되기 때문이다.
성종이 내린 교서에서는 투기죄와 궁인을 해치려 한 죄,
실덕(失德) 등이 언급되었지만 오래도록 성종과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1504)
한씨와 갈등을 빚어온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차기 대권을 이어갈 아들(연산군)을 낳은 왕비에게 이토록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왕실에서 윤씨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출생연도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윤씨는 성종보다 연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실록의 기록에서 그녀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고 기록된 점과 남녀차별이 엄격하지 않았던
조선 전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윤씨는 나이나 성향 면에서
성종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더구나 어린 성종은 누님뻘인 왕비보다는 후궁들을 좋아했다.
소용 정씨와 엄씨를 찾는 발길이 잦았고 왕비 윤씨는 이를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윤씨는 연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요법을 쓰기도 했고
후궁들이 자신과 세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올려 정소용과 엄소용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투서의 실질적인 작성자가 윤씨로 밝혀지고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砒霜)이 발견되자 성종은 왕비의 폐출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때마다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은 ‘원자의 생모’, 즉 차기 왕위 계승자 연산군의 어머니라는 ‘확실한 무기’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성종과 윤씨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성종이 후궁을 찾은 것에 반발해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파국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시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가 가세하였다.
조신한 며느리가 아닌, 아들의 처신에 직접 대응하는 강한 며느리 윤씨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에게도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더구나 인수대비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윤리적 지침서인 [내훈(內訓)]까지 쓴 인물이었다.
인수대비는 마침내 성종에게 윤씨의 폐위를 요구했고 1479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가 사가(私家)로
쫓겨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가에 폐출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482년 성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480년 어우동의 처형과 1482년 폐비 윤씨의 죽음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처형된 시점이 비슷하고 두 사람을 처형시킨 인물은 모두 성종이었다.
15세기 후반 성종 시대는 성리학의 이념을 국가와 사회 곳곳에 전파시켜 나가려는 때였다.
이러한 시대에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왕실에서는 윤씨가 민간에서는 어우동이 그 주인공이었다.
어우동과 폐비 윤씨는 성리학의 이념이
본격적으로 구현되면서 남성 중심 사회로 나아가는 15세기 조선 사회의 시대적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 글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 <역사추리>, <역사스페셜>, <한국사 傳> 등의 자문을 맡았고, 현재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중, 후기 지성사 연구],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이지함 평전], [조선평전],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 시대 사학회 연구이사,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와 기록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 저자의 책 보러가기 인물정보 더보기
- 그림
- 장선환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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