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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懲毖錄)

mkpark2022 2015. 7. 25. 15:24

 

 


징비록(懲毖錄)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징비록

- 임진왜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낸 서애(西厓) 류성룡은 지난 일을 징계하며 후환(後患)을 조심한다는 의미에서 <징비록>을 남겼는데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겪지 말자는 뜻에서 쓴 전란(戰亂)의 기록이 어떻게 일본과 중국에서 널리 읽히며 동아시아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 17124(숙종 38)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 온 조태억의 보고,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이 일본에서 출판된 것을 목격한 것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이 왜국에 흘러 들어갔다 하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엄격하게 과조를 세워 금단 하소서”<숙종실록 1712422>

- 징비록은 서애(西厓) 류성룡이 집필한 전란사(戰亂史)로 일본 유출을 금지시킨 책으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전해진 징비록은 17세기 말 <조선 징비록>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어 일본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게 된다.

- 징비록은 임진왜란과 조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게 되며, 에도시대의 장편 <에혼 다이코기 66>역사소설에서 일본 수군을 압도하는 이순신 장군을 영웅으로 소개하고 그의 활약을 높이 평가할 뿐만 아니라 권율 · 김응서 등의 활약까지 다룬다.

- 18세기 일본에 이어 중국에 까지 전()해지며 널리 읽힌 <징비록>, 그것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힌 조선이 나은 베스트셀러였다.

 

조선의 기밀문서, 징비록

- 징비록, 어떤 기밀이 담겨있나?

왜관의 역관들에 의한 밀무역으로 일본으로 유출된 징비록,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국정을 총괄했던 인물로 징비록의 내용은 조선의 국방상황 ()과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외교자세 일본군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안 등으로 조선의 I급 기밀문서, 징비록 외에 <간양록> · <해사록> 등 여러 종류의 서적이 유출되었으나 그 중 징비록이 가장 인기가 컸던 이유는 임진왜란을 거시적 관점에서 서술 조선과 명의 외교 비사(秘事)까지 다뤄 인기가 대단했던 것

- 징비록의 저술 목적은 징계할 징()과 삼갈 비()’로 지난날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시경(詩經)에서 따온 의미로 지독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시는 격지 말자는 반성과 대비책을 담고자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

- 우리는 대비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이지만 징비록의 유출은 일본과 중국에게는 우리의 대비책을 공유한 셈으로 일종의 조선사용설명서인 셈으로 징비록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633년 간행된 <서애집>에 처음 등장하고 이것이 일본에 건너가 1695<조선 징비록>으로 간행되어 짧은 기간에 일본으로 유출되어 책이 간행된 것

 

근세 일본이 본 징비록 <김시덕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일본판 <조선 징비록><징비록>의 차이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내용이나 약간의 추가 부분이 있고, 구성면에서 보면 류성룡의 서문 다음에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의 서문이 추가되면서 수많은 임진왜란 관련 책이 있으나,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징비록이라고 기록하여 신뢰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도··현의 실명을 기록하고 조선의 지도까지 부가하며, 한자에 훈점을 찍어 중국학을 모르는 일본인들도 읽기 쉽게 저술

- 징비록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책은?

일본은 <조선 징비록> 출간 후 200여 년간 약 100여 종의 책에 영향, 대표적으로 <에혼 다이코기>로 그림으로 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 거북선을 머리가 아닌 등껍질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난공불락으로 거북선 상판에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의 공포가 반영된 듯

<에혼 다이코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기록한 대하소설로 18세기 말 ~ 19세기 초까지 일본의 베스트셀러.

- 삽화가 있는 일본 책이 더 있나?

<에혼 다이코기>보다 50여년 뒤에 발간한 <조선 정벌기>에는 웃으면서 총알을 빼는 이순신 장군을 표현한 장면은 이순신 장군의 용맹성을 묘사한 것으로 징비록이 일본에 건너가면서 이순신처럼 일본인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밖에 권율 · 김응서 등이 일본에 처음으로 확인됨.

조선 정벌기 : 19세기 중기에 임진왜란을 소재로 제작된 그림책

- 징비록을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을까?

처음 일본인들이 쓴 기록만 봤을 때는 당연히 일본인이 잘 싸웠고 명()이 좀 상대가 될 만했고 조선은 관계가 없는 전쟁으로 그려졌는데 명()의 기록이 들어가면서 명나라에 상황에 대하여는 소개가 됐지만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의 도움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인식을 완전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는 책

 

징비록, 일본의 인식을 바꾸다.

- 우리가 얘기하는 임진왜란 3대 첩은 행주대첩 · 진주성 대첩 · 한산도 대첩이지만, 일본의 임진왜란 3대첩은 벽제관 전투 · 울산성 전투 · 사천전투로 조선과 싸워 이긴 전투에는 대첩이라 하지 않고 명()과 싸워 이긴 전투에만 대첩이라 표현하여 전쟁 명명(命名)에 일본인의 세계관을 반영

- 처음에는 임진왜란이 조선 땅에서 명()과 일본이 벌인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징비록으로 이의 인식이 바뀐 것으로 아이러니하게 징비록의 유출로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을 바로 잡은 셈

 

류성룡이 눈물로 기록한 전쟁

- 징비록은 관료이자 학자이고 외교관으로서의 류성룡이 미시(微示)와 거시(擧示)를 넘나드는 시각으로 기록하는 임진왜란 백서로 전시 최고 사령관이자 종군기자로서 후손에게 남겨준 경계와 교훈 “12월에 명나라가 대군을 보냈다. 명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고 대포와 불화살로 적()을 공격하니 대포소리가 땅을 울려서 몇 십리안의 산야가 모두 흔들렸다. 불화살이 마치 베로 천을 짜듯이 공중을 채웠고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의 칼과 창이 성벽위에서 아래로 나와 있는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 같았다. 제독 이여송은 궁지에 몰린 적()이 죽음을 각오를 하고 싸울 것을 염려하여 군대를 수습해 성 밖으로 나간 뒤에 적()의 탈주로를 열었다. 그날 밤 적()은 얼음이 언 대동강을 건너 달아났다” <징비록>

-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평양성 전투?

·명연합군이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는 전투로 평양성을 뺏긴 후 일본은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고 남하해 한성부근의 방어를 강화하게 되고, 한편 이여송은 평양성전투에서 승리를 한 후 지나친 자신감으로 일본군을 경시하게 되면서 백제관 전투에서는 대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사실, 명나라의 경우에는 전쟁에 임하는 의도와 목적이 우리와는 다른 상황이므로 양국의 관심사를 조율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으로 평양성 전투 당시 전시 총책임자였던 하삼도체찰사 역의 류성룡은 역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하삼도체찰사의 류성룡의 역할 : 10만 명군의 식량조달 군수물자 보급 명나라 장수 접대

- 초기 명군이 갖고 온 군량미의 운반은 조선 백성들의 몫으로 명군이 온다면 모두 도망을 가버리는 상황에 명군의 군복까지 조달해야만 했던 상황으로 싹 쓸어갔다는 의미로 일본 빗은 얼레빗, 청나라 빗은 참빗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착취가 심했다는 것

- 기록에 보면 조선의 재상 류성룡을 자신의 신하처럼 다뤘던 명나라 장수는 식량 공급이 늦어지자 류성룡을 무릎 꿇게 하기도··· 이에 쉼 없이 사과한 조선의 영의정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징비록> 적군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원군(援軍)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약소국의 재상이 겪은 치욕은 더욱 컷을 듯.

- 징비록에 기록하는 참혹한 실상 한양과 지방에 기근이 심한데다가 군량미를 운반하느라 지친 노약자들이 도랑에 굴러다니고, 건강한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으며 역병까지 겹쳐서 거의가 다 죽었다. 부모자식과 부부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고, 사람 뼈가 들풀처럼 흩어져 있었다.” <징비록>

- 한양의 참상을 보고 몸져누운 류성룡의 당시 나이 52세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하고 굶주린 백성을 위한 구휼방법으로 솔잎을 가루로 만들어 솔잎가루 10()에 쌀가루 1()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게 하였다” <징비록>

- 후손들이 전쟁의 참상을 다시는 겪지 말기를 원하면서 기록한 징비록, 그러나 임진왜란이 1598년 종식되고 다시 1636년에 발발한 병자호란

 

류성룡이 밝힌 임진왜란 비사(秘史)

- “()의 첩자 김순양을 잡았다. 내가 그를 엄하게 심문하니 그는 우리의 작전명령서와 공문 등 군사비밀을 적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소 한 마리를 받았다고 실토했다. 적의 첩자가 된 자가 또 있느냐고 물으니 40여 명의 첩자가 순한 · 강서 등에 흩어져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매우 놀라 즉시 조정에 보고했고 첩자들의 이름을 조사해 여러 진영에 알려서 잡아 들였다. 며칠 후 나는 안주성 밖에서 김순양을 처형했고 그 목을 매달아 사람들이 보게 했다. 이후 첩자들은 놀라서 모두 흩어졌다. 오래되지 않아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왔고 우리 군과 연합해서 평양성 공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첩자가 남아있어서 왜적이 미리 방비했더라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징비록>

- 전쟁의 반성은 물론 자신의 활약상까지 담은 징비록, 민족적 영웅 이순신 장군의 진면목을 알리고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힌 점과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등 많은 분량의 글을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할애한다.

- 이순신과 원균을 비슷한 비중으로 기록한 선조실록에 비해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에 밤낮으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군사를 논하였다” & “원균은 아끼는 첩을 운주당에 살게 하고 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하고 화내는 것을 일삼았다” <징비록>

- 평양성 전투 후 전쟁을 종식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아쉬움을 기록한 장면 두 군대가 길가에 복병을 두어 적이 지나갈 때 그 뒤를 추격하면 적()은 굶주리고 지쳐서 달아날 터이니 한 놈도 남김없이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징비록>

- “(선조는) 첩자가 류 체찰사를 사로잡으러 나왔다고 하니 잠시 개성으로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우리가 움직이면 공연히 민심만 동요될 것이니 가만히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징비록>

- 칭찬은 충분히 하되 비판도 날서게 하는 류성룡은 탄금대 전투에서 실패한 신립에 대해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말을 빌어 이렇게 비판한다. “험난하기가 이와 같은데 지킬 줄 몰랐으니 총병 신립에게는 계책이 없겠다” <징비록>

- 159851일 영의정에 임명되고 하루 만에 파직된 류성룡, 전쟁 초기 연이은 패전을 류성룡의 책임으로 몰고 간 선조(宣祖), 류성룡은 억울한 심경에서 신립의 패전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 아닐까?

- 류성룡이 탄금대 전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신립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견해도 없지 않지만 그렇게 보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방어체제인 제승박약체제의 모순과 장수들이 도망가는 등, 초기 대응에 실패한 것이 전쟁의 패인임을 밝히려 한 것으로 그 충격이 더욱 컸기 때문에 탄금대 전투를 상세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 임진왜란 발발 전, 조총의 위력에 대하여 류성룡은 일단 장전만 되면 과녁조차 뚫을 수 있는 무서운 살상력을 가져 얕봐서는 안 된다.’고 조총의 위력을 경고하는 것에 반해 신립은 조총에 불을 붙이고 총을 쏠 때까지는 한참이 걸릴 것으로 적()이 조총을 쏘아보기도 전에 신이 이끄는 기마부대가 코앞에서 적장의 목을 칠 것입니다하고 조총의 위력을 과소평가한 신립은 류성룡의 조언을 무시하고 있다가 일본의 조총부대에 대패하고 만다.

 

군사전략가, 류성룡

- 미래를 내다보는 눈과 군사전략가적인 면모를 지닌 류성룡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당시 명군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지도 않고 군량미만 축내는 것 같아 자주국방의 절실함을 느낀 류성룡은 훈련도감 설치를 주장한다.

훈련도감 : 조선시대 수도의 수비를 맡아보던 군영으로 류성룡의 제안으로 설치.

- 훈련도감은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조직되고 이들은 징집병이 아닌 조선 최초 모병제 실시로 직업군인제가 실시되어 자진 입대하여 월급으로 쌀 6말을 받았고 유생·노비·승려 등 다양한 신분으로 구성

- <병역제도의 모순>이 전란극복의 가장 큰 걸림돌임을 인식한 류성룡은 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는 전란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조선시대 병역제도의 모순 양반은 면제 양반의 재산인 사노비도 면제 결국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입대, 이러한 모순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전란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천민들에게도 군대에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

- 양반과 천인을 한 부대에 편성하는 혁명적사고로 바뀐 병역제도에 대한 양반들의 반발?

상당수의 노비가 군인으로 들어갔을 상황에서는 실제로 훈련받고 있는 노비를 자기 재산이라며 데려간 양반들, 양반들의 입장에서 류성룡은 공공의 적으로 병역제도의 개선은 훗날 류성룡 탄핵(彈劾)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과 일본, 그들만의 강화(講和), 류성룡의 선택은?

- ‘강화란 전쟁을 종료시키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교전국간의 합의, ()은 벽제관 전투 패배 후 일본과 강화를 하여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하는데 ()의 강화조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항복과 일본군을 조선에서 즉시 철군하는 것

- 하지만 일본의 강화조건은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고 조선의 임진강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을 요구한다.

- ()과 일본 간의 일방적인 강화협상에 강하게 반대하는 조선, 전시 최고 사령관으로 강화를 반대하며 일본군 섬멸을 주장했던 류성룡, 그런데 그가 갑자기 강화(講和)에 대한 입장을 바꾸며 임란정국(壬亂政局)의 태풍의 눈이 된다.

- 그가 갑자기 강화에 대한 입장을 바꾼 이유는?

가장 큰 문제는 전쟁터가 된 조선은 배제되고 강화협상은 명()과 일본이 추진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 영토의 할양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던 선조(宣祖)는 강화에 대하여 더 이상 거론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 류성룡도 벽제관 참패 이후 진격을 멈춘 이여송에게 거듭 일본군 공격을 요청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최고사령관 도체찰사의 자격으로 조선군의 일본군 공격을 명령하여 이여송과 충돌하는 계기가 된다.

- ()의 입장은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이 목표이지만 류성룡은 이에 반해 끝까지 조선의 국익을 생각했던 것으로 명()의 입장에서 보면 곱게 보일 수는 없는 것, 명나라 문헌에 간신으로 묘사되는 류성룡 임진왜란에 류성룡 · 이덕형 등의 간신이 발호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고 명나라 도움을 기다려서 간신히 나라를 되살릴 수 있었다” <양조평양록> 이는 류성룡이 얼마나 조선의 국익을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인 셈

- 류성룡이 강화(講和)에 대한 입장을 바꾼 이유는?

당시 류성룡의 심정 계사·갑오년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국가의 형세가 심히 위태로워 하루도 보전하기가 어려웠고 힘으로는 능히 적()을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밖으로는 명 조정에서 견제하려는 계획을 쫓아 적()의 세력을 조금 완화시키고 안으로는 전쟁과 수비에 대응할 준비를 닦아서 서서히 뒷날을 도모하려고 스스로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류성룡이 주화오국을 비판하는 조목에게 보낸 글>

- 조목은 류성룡의 강화(講和)에 대해 주화오국이라고 비난하지만, 이에 대한 답변의 요지는 강화(講和)를 피할 수 없다면 철저한 준비로 원수를 갚자는 것

조목 : 류성룡 · 김성일과 함께 퇴계 이황의 수제자 & 주화오국 : 일본과 강화를 주장해서 국사를 그르치는 일

- 실제로 계사·갑오는 1593~4년에는 굶주린 백성과 힘없는 국가, 여기에 강화(講和)를 원하는 명(), 이에 대한 해결책은 시간을 벌어 훗날을 도모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음을 글 속에 담은 것

- 류성룡이 강화에 대한 입장이 징비록에 자주 등장하는데 류성룡이 생각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군사제도의 정비 전쟁에 피폐해진 민생의 수습과 안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훈련도감 설치 및 속오군 제도 확립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공물 작미법> 실시 민생의 <면천제> 실시 등으로 강화를 통해 전쟁의 폐해를 일단 막고 그 기간에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는 대책으로 방향을 바꾼 것

- 류성룡에게 징비록은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을 때에는 전쟁도 강화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음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이 아닐까?

 

전쟁의 반성, 징비록

- 전란극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1598년 삭탈관직된 후 고향 안동에 내려와 6년간의 징비록 집필을 마치고 향년 66세로 사망하게 되는데 류성룡의 죽음으로 온 나라가 애도를 한다.

- 상점은 철시를 하고 사대부·신하들은 남산과 류성룡의 옛 집터에 신의를 모시고 친척이 죽은 것처럼 상을 지냈으며, 조문객 중에는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기록한다. “백성들이 빠짐없이 묵사동에 모여 조곡을 하였는데 숫자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시민과 서리 등이 본가가 청빈하여 치상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포를 모아 부의하였다” <선조실록 1607513>

- 전란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담은 조정과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류성룡 백성들은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운 때에 나 같은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책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떠받치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징비록 서문 >, 통렬한 자기반성을 기록한 징비록, 반성이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마음의 양식이 아니겠는가?

- 새롭게 출판된 징비록에 어울리는 홍보 문구는?

300년 전() 동아시아를 열광케 한 문제작! 징비의 귀환 & 류성룡이 묻는다. ‘조선의 실패, 반복할 것인가? 반성할 것인가?’ & 역사에 굶주린 당신, 징비록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