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부치지 못한 편지 / 극단 명태>
군함도(軍艦島)의 두 얼굴, 숨겨진 진실
〇 세계유산 등재 논란, 군함도는 어떤 섬?
- 세계유산 등재를 노리는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후보지 23곳 중 군함도를 포함한 7곳이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 장소로 일본 근대화의 주춧돌이라 불리는 군함도 근대화의 상징인가? 강제징용을 감춘 역사 왜곡인가? 과연 군함도의 진실은?
- 군함도는 일본 근대화의 주춧돌이고 또 그런 상징의 건물이라는 일본 정부의 인식, 하지만 군함도는 강제징용의 현장으로 세계문화 유산의 보편적 가치에 어긋나는 것, 나가사키에서 4Km이며 뱃길로 30분 거리의 군함도, 원래의 이름은 ‘하시마’로 무인도였으나 석탄이 발견되면서 1890년 미스비시 합자회사가 군함도를 매입하고 해저탄광을 개발하여 6차례에 걸친 매립·확장을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보임
- 일본의 해군 전함(戰艦) ‘도사’(土左)를 닮았다 하여 ‘군함도’라 이름 붙여졌고, 오직 채탄산업을 위해 조성된 계획도시 군함도는 <영화 007 스카이 폴>에서 제임스 본드가 열연했던 곳
- 군함도, 폐허의 건물이 유네스코의 등재 이유?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일본이 신청한 이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산업유산이란 산업 활동을 하다가 기능이 다한 후에 후대가 기억해야 할 만한 유산으로 독일의 졸버레인 · 리버플 항구 · 뉴 레너크 방직시설 등이 대표적인 산업유산
※ 메이지 시대 : 1868~1912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일왕이 통치하고 근대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함
- 일본이 세계유산 신청이유는 ‘비(非) 서양권 최초 산업혁명의 물품들이 집적된 곳’ 그중에서 일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군함도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것 “군함도는 현재 섬 전체가 빌딩 숲으로 허름했던 일본의 전통가옥들도 9층 아파트로 변했습니다. 광부들의 몇 안 되는 오락시설 중 하나인 영화관과 봄·가을에 학교에서 열리는 운동회의 달리는 아이들 · 즐겁게 떠드는 아이들 · 응원의 풍경도 모두가 하나로 융화되어 흙에서 뛰어노는 운동회를 즐깁니다.” <군함도 홍보물>
- 당시 최초로 칼라TV 방송이 시작될 만큼 특혜를 베풀었던 곳으로 군함도 내에 최초의 근대식 아파트가 1916년 건립, 그러나 아파트는 당시의 건물이지만 학교·병원·목욕탕 등은 1950년 대 이후에 세워진 현대식 건물들.
-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산업유산으로서의 군함도를 평가할 때 1941년 태평양 전쟁 전후로 나눠봐야 하지만, 군함도 홍보용 영상물의 변화한 산업도시 이미지는 메이지시대 이후의 건축물이 대부분
- 그래서 산업유산으로서 군함도를 평가할 때 1941년 태평양전쟁 전후로 나눠서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홍보영상물의 변화한 산업도시 이미지는 메이지시대 이후의 영상으로 낙원처럼 느껴지지만 숨은 진실이 있다.
- 일본은 1938년 4월, 국민총동원법이 공포되어 강제동원이 본격화되고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강제노역의 먹잇감이 된 조선인들, 에너지·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혈안이 된 일본 기업들은 급기야 어린 소년들에게까지 손길을 뻗치고 고향을 떠나 강제동원 되어 일본 전역의 노동현장으로 끌려간 강제징용의 피해자, 그 중에서도 해저 탄광이 있던 군함도는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일본에서는 무기징역의 죄수들만 군함도로 보냈다는 징용피해자들의 증언, 조선 징용피해자들에게 군함도는 지옥섬이었다.
〇 군함도의 광부들, 그들은 누구인가?
- 1938년~1945년 국내·외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수는 연인원 700만여 명, 일본의 400여 기업체 2,400여 작업장에 강제동원, 당시의 상황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다급해진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군수물자 · 석탄생산 등 노동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대대적으로 이뤄진 조선인 강제 동원, 심지어 일본기업의 거짓 모집광고에 속아 자원하기도···
- 태평양 전쟁 이후(38년~45년) 조선인 강제동원 비율이 급증하는데, 마지막 기록을 보면 1943~45년 군함도내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약 800여 명 “길을 지나가는 조선인을 잡아 트럭에 실었다” <미이케 탄광 인사과장의 증언> 더 충격적인 것은 어린 10대들까지 강제 동원되어 성인들도 감당하기 힘든 탄광 노동으로 어린 아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했을 것
- 군함도의 광부들은 모두 조선인?
일부는 일본 광부들도 있었지만 1940년 대 이후 조선인의 비율은 60~70% 이상을 차지
-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의 생활은?
약 10m의 높이 콘크리트 담으로 둘러싸인 군함도, 지옥문으로 불린 군함도의 출입문, 조선인들은 지금의 병원자리에 2층 목조건물 4동에 분산 수용됐었고, 방 하나 크기가 약 3평에 8~15명이 생활, 조선인 숙소 주변엔 감시탑까지 설치하여 감시 “창문에 널빤지를 달아 파도가 덮치는 걸 막으려 했다” <징용피해자> 현재는 관광객에게 일부만 공개하여 조선인들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음
〇 군함도의 숨겨진 얼굴, 지옥섬
- 하시마 탄광은 해저탄광이어서 고품질 석탄이었다고 하는데, 채탄(採炭)을 위해 해저 1,000m 까지 심층부를 개발하여 좁은 갱도와 60도 이상의 가파른 경사로 기계작업은 불가능했고 가장 힘든 갱도 막장에 투입된 조선인들
- 당시 태평양 전쟁 막바지 갱내 작업했던 조선인 비율은 90% 이상, 보통 하루 2교대로 12시간 씩 노동하고 심지어 하루 16시간 씩 일했다는 증언도··· “일을 쉬면 감독이 와서 일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구타를 했다.” <징용피해자>
-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노예처럼 일한 조선인들, 군함도에서 헤엄쳐 탈출하려고 나섰던 조선인들의 시체를 묻어준 마을 주민들, 나가사키 해안에 조성된 ‘난고시해난자 묘역’ 고향을 바라보고 탈출을 감행했지만 결국 파도를 넘지 못한 징용 피해자들의 무덤
〇 나가사키 원폭 투하, 조선 징용 피해자들의 운명은?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거대한 버섯구름은 반경 2Km이내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고, 군수산업체가 밀집하여 전쟁의 동력을 제공한 나가사키는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급기야 군함도의 조선인들은 나가사키로 보내져 도시 청소작업에 일제히 동원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방사능에 오염된 또 다른 지옥이었다.
-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된 군함도의 징용 피해자들, 원자폭탄 투하로 군함도의 해저탄광이 단전(斷電)되자 중단된 채탄작업 대신 청소작업에 투입시킨 것, 강제 노역도 모자라 실제 피폭까지 당해야 했던 조선인들 “청소 작업 후 2주 동안 각혈(咯血)을 멈추지 않았다” <징용피해자의 증언>
- 당시 나가사키 인구가 22만여 명이고 조선인 징용 피해자 2만여 명이 피폭되고, 그 중 1만여 명은 폭사(暴死)하여 원폭투하로 항복을 이끌었던 이면에는 조선인들의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일
- 당시의 증언에 의하면 원폭투하로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은 동료가 입을 벌리지 못해 대(竹)를 잘라 밥을 먹여야 했던 상황 “이놈아, 넌 먹어야 살아! 먹어야 살아서 같이 나가지··· 그랬는데 결국 죽어버렸지···” <강제 동원 원폭 피해자>
- 문제는 오히려 해방 이후로 일본 기업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지원책이 전무(全無)였다는 것, 그 동안 강제노역 중에 각종 명목으로 임금을 공제하여 고향에 갈 차비조차 남지 않은 조선인 징용자들
- 유골(遺骨)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다?
군함도에서 사망한 경우 유골을 섬 안의 신사에 안치했으나, 1974년 폐광이 되면서 연고가 있는 사람의 유골은 가지고 나왔으나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은 무연고 유골은 근처 다카시마 센닌즈카로 옮기는데, 당시 유골함마다 신분확인이 가능한 위패가 있었지만 이름·사망이유 등이 적힌 위패를 모두 태워버린 일본인들은 유골 일부를 분골(粉骨)해 인근 절에 안치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매장해 버려 위패가 없어져 누구의 유골인지 확인이 불가능해진 것
〇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섬
- 이런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고향의 가족들, 여전히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징용 피해자와 남겨진 가족들···
- 일제강점기에 전쟁터로 끌려간 남편을 한 평생 기다리는 아내,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의 뒷이야기를 그린 <연극, ‘부치지 못한 편지’ / 극단 명태> “돌아온다. 꼭 살아서 돌아온다. 겨울 되고 눈 오면 나 돌아온다.” & “나 이거 안 읽을 거야. 있다가 만나서 당신이 직접 읽어 주라구··· 나 이제 그만 할라구··· 오래 버텼지 몸만 늙는 것이 아니더라고··· 사랑도 늙고 · 희망도 늙고 · 분노도 그렇게 늙습디다. 참! 우습지? 세월 간다고 못내 아쉬워 자꾸 뒤만 돌아봤는데, 세월이 아니라 내가 가오. 이렇게 70년을 기다린 당신 곁에, 당신 마누라 정순덕이가 긴긴 세월 이기고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 오늘 밤은 꿈에서 말고, 공갈로 말고 진짜로 마중 나와 마누라야! 하고 한 번만 불러 주시구랴··· 당신 있는 곳 알았는데, 맨발인들 못가겠소! 가시밭인들 못 밟겠소! 그런데 김백식 씨 내 얼굴 알아나 보겠수?” <부치지 못한 편지의 독백>
- 인기 관광지, 군함도
요즘은 폐광된 무인도에서 인기 관광지로 거듭난 군함도,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군함도는 어떤 섬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1916년에 세워진 건물로 이웃 간에 사이가 좋아 2~3일 동안 집을 비워도 문을 잠그지 않았고 경치도 그 당시가 가장 좋았다. 당시 이곳에는 사람이 살고 소리가 나고 생기가 있어 일본의 미래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었고 생활비는 공짜나 다름없는 10엔밖에 되지 않아 천국 같은 생활을 했다” <관광해설사>
- 하지만, 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의 역사, 오직 낙원으로 산업유산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도시로만 기억되는 군함도, 과연 숨은 진실은?
〇 세계유산 등재 신청, 일본은 왜?
- 일본의 준비과정부터 달랐던 세계문화 유산 추진, 세계유산의 경우 학자 등 보통 민간 주도로 추진하는 세계유산 등재에 비(比)해 일본은 아베 총리실 산하 정부기관에서 직접 준비하고 5~6년 전(前)부터 국제 세미나 개최 등으로 해외 학자들과 공감대를 형성
- 강제징용의 역사를 뺀 채 세계유산이라 이야기 할 수 있나?
우리나라 학생들 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여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이며 타국의 문화유산인데 가치여부를 논하는 건 월권(越權)이라는 의견 VS 그렇지 않다! 어떻게 역사를 단절해서 볼 수 있느냐? 연장선상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역사라는 의견이 맞섬
-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가 1868년~1912년의 메이지시대에 국한해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했지만 정작 대부분의 건물들이 그 이후에 지어진 시설물, 세계유산의 조건 3가지 ① 완전성, 이 완전성의 타이밍은 가장 그 유산이 활성화되고 제대로 된 역할을 했을 때로 보는데, 이 시기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 시기인 것으로 이는 어른을 평가할 때 ‘유아기’만 놓고 평가하는 격으로 성장기를 빼버렸기 때문에 상당한 왜곡현상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일본은 아이 때의 천진난만했던 시기(時期)만 봐달라는 얘기 ② 근대기 산업유산은 원형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으로 폐허로 방치된 군함도는 자격미달
- 일본이 산업유산으로 신청한 곳은 23곳 중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조선소의 3개 시설 · 군함도 탄광 · 미이케 탄광 · 야와타 제철소 · 미이케 항구 등 7곳은 강제징용의 현장으로 세계유산 조건 ③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지닐 것,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산업시설 위주의 일본 세계문화 유산들은 등재 자격자체가 미달인 것
- 현재 운영 중인 것도 세계유산으로 등재 가능?
다리 · 항구 등 원형이 보존된 채 사용가능한 시설은 등재 가능, 하지만 일본의 경우 문제가 있는 것이 ‘미쓰비시 조선소’라는 이름 자체는 등재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메이지시대의 단위 요소인 자이언트 크레인 · 제3독크 등을 내세워서 등재하여 결국 자연스럽게 ‘미쓰비시 조선소’가 세계유산 화(化) 되는 것
- 더욱 문제가 있는 것은 야와타 제철소 · 미이케 광산 등 요소가 부적절한 경우에는 통째로 등재신청하고, 이 시설물의 설계자인 <요시다 쇼인>이 창립한 사설(私設) 학당까지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
※ 요시다 쇼인(1830~1859) : 일본우익 사상의 창시자로 메이지유신의 이론가, 대표적인 정한론자로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에 큰 영향을 끼침, 제자로는 기도 다카요시(1833~1877)·이노우에 가오후(1836~1915)·이토 히로부미(1841~1909)·야마가타 아리모토(1838~1922) 등
- 기준에 맞지 않은 23곳, 왜 굳이 세계유산으로?
기준이 없이 뒤죽박죽 선정된 산업유산 23곳, 사실 전문가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폐허가 된 산업유산 또한 일정 시기에만 국한된 시설들이 세계유산에 등재가 된다면 그 동안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켜온 원칙과 질서가 붕괴된다는 것
- 일본이 세계유산 등재를 고집하는 이유?
2009년 4월, 일반인에게 군함도 첫 공개 후 1년 사이 7만여 명이 방문하여 경제적 효과는 우리 돈 140억 원으로 세계문화 유산 등재의 첫 번째 목표는 경제적 효과
〇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는 작은 움직임
-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 수몰참사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와의 인터뷰, 이 모임이 하는 활동은?
“저희는 <조세이탄광의 수몰참사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라고 하는 단체입니다.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 탄광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인 1942년 2월 3일에 대규모 수몰사고가 발생하여 183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졌는데, 그 중 136명이 조선에서 강제 동원된 사람들로 이 사실을 알고 이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고 생각해 지역 주민들에게 이 비극을 알리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 2013년에는 숙원사업을 해냈다고?
“저희가 1991년 가을에 희생된 분들의 명단을 입수해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17통의 답장을 받았는데, 이 서신으로 일본의 조세이라는 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유족회가 결성되어 매년 2월 3일 전후(前後)로 유족들을 초청해 한국식 제사, 즉 추모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 “또한 그런 상황에서 많은 분들의 모금을 통해 2013년에 마침내 시민의 힘만으로 추모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우리도 몰랐던 사실을 일본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진 조세이탄광의 비극
- 조선인 징용자들을 위해 시민단체가 활동을 하는 이유는?
“저 역시도 조선인들의 징용역사에 대해선 고교졸업 깨까지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배울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지만 일본 전국에 있는 댐 · 철도 등 수많은 공사현장에는 조선인들이 강제동원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생명·인생·생활의 희생위에 현재 일본인들의 삶이 성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그것을 부정적인 역사로 감출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이를 똑바로 직시(直視)하고 인정하는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설령 1%라 해도 그 주장의 힘은 크다고 생각하며, 저희의 의지도 강한 만큼 한국 분들과 굳세게 손잡고 이 문제를 더 많이 알려나가고 싶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 최근 군함도의 표지판에 한일간에 ‘일(日) 세계유산 등재에 강제징용 반영’을 사실상 합의는 했다는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징용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표지판 내용의 진정성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 사실 강제동원의 기록만 남기는 것으로는 너무너무 안타까운 것이 1986년 일본의 시민단체 ‘나가사키 재일(在日)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발간한 책 <화장 인허증 및 변재보고서>에서 122명이라는 우리 선조의 명단을 찾았는데, 3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징용피해자의 문제는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한 것
- 사실은 일본에 있는 징용시설보다 국내 강제징용의 시설이 더 많다는 것으로 무려 7,500여 개나 되지만 대부분 잘 모르는 상황, 이런 현실에 대하여 우리가 반성하고 먼저 노력할 때 일본의 역사왜곡 움직임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다는 것
- 아픈 역사의 현장들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우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의 경우는 자신들의 과오를 밝히고 다시는 인류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하며 세계유산에 등재를 했고, 그리고 정부차원에서도 추모비를 세운 것을 거울삼아 군함도가 군국주의 반성의 구명보트가 되길···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 유태인 대학살 · 인종차별정책 ·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로 1979년 세계유산에 등재
'Docu'(기록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의 비결 <제2편> 정감록 (0) | 2016.03.14 |
---|---|
한국인의 비결 <제1편> 토정비결 (0) | 2016.03.07 |
징비록(懲毖錄) (0) | 2015.07.25 |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영토 "독도" (0) | 2014.02.19 |
중국 사천성 대지진 (0) | 2014.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