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비결 <제1편> 이지함의 토정비결
〇 토정 이지함 <이욱,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 옛 부터 전해오는 길흉화복을 내다보는 비결로 신년마다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토정비결! 그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은 스스로의 죽음까지 예언했다는데 과연, 그가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 오랜 세월 한국인에게 사랑받아 안채엔 토정비결 사랑채엔 정감록, 토정비결은 1년 열 두 달의 신수를 판단하는 비결서로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인기를 누렸는데,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역보다 쉽고 간단하게 볼 수 있으며 주역은 4주(생년·월·일·시)를 기준으로 하지만 토정비결은 생시(生時)를 제외한 3주를 기준으로 하고 144괘로 구성
- 토정비결의 저자는 누구?
토정 이지함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고 “장성하여서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건강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살이 붙어 있지만 검은 피부에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웅장하였다.” & “토정은 천문·지리·의약·복서(점)·율려(음악)·산수·소리에 능했다. 그리고 관상·신방과 비결에 통하지 않았던 분야가 없었다.” <토정유고> “이지함은 사람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賢否)와 길흉을 먼저 알아맞히곤 했다.” <선조수정실록 11년>
- 이지함이 작은 배를 타고 양쪽에는 표주박을 달고 제주도를 3번이나 왕복을 했는데 풍랑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고, 또한 예지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혜성(彗星)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지함이 유집을 보건데 10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하여도 세상에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니···” & “지함이 답하여 이르기를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르게 함이 있을 것이다.” <토정유고> 이지함의 예언대로 15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것으로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
〇 금수저, 토정 이지함
- 충주의 처가에 기거하던 이지함은 어느 날, 난데없이 짐을 챙기며 떠날 준비를 한다. “부인의 가문에 길(吉)할 기운이 없으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큰 화(禍)가 미칠 것이오.” 이지함은 처자를 이끌고 급히 서쪽으로 떠나고 얼마 후 왕실 종실인 장인이 역모죄로 사형을 당하는데, 처가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예언한 토정 이지함
- 토정 이지함은 명문가의 자제?
1517년 충청도 보령 출생으로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의 6대 손으로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 집안, 장인은 모산수(毛山守) 이정랑으로 수(守)는 조선시대 왕실 종친의 정4품 관직으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집안의 자제, 그리고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는 선조(宣祖) 대의 영의정으로 비범한 인물임에도 예언 능력을 가진 명문가의 자제
〇 지금 조선에는!
-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인이 등장하여 장안이 시끄러운데 그 인물이 바로 토정 이지함, 그는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있었으니 조그마한 가마솥 “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서 밤낮으로 다녔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 <동패락송>
- 오고가는 소와 말에 부딪혀서 동서로 옮겨 다니다가 5~6일 후에 비로소 깼다. 게다가 나막신까지 신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던 토정 이지함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11년> & “허기(虛器)가 있으면 솥을 벗어 시냇가에 걸어두고 밥을 지어 먹은 후 씻고 말려 다시 머리에 썼다.” <동패락송> 솥을 들고 전국을 유랑하는 조선판 캠핑족
- 겨우 열흘에 한 번 솥에 밥을 지었다는데 “이지함은 굶주림을 참음에 있어서 10여 일이나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다. 목마름을 참음에 있어서는 한 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국조인물고 권33>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토정 이지함의 기인행각! 믿기 어렵지만 모두 사료에 기록된 내용들
- 명문가의 자제 이지함은 왜 기인이 되었나?
토정 이지함의 장인 이정랑을 역모에 휘말리게 한 <이홍남 고변 사건> 이정랑이 연루된 것은 아니었지만 왕실 종손이다 보니 누명을 쓴 것이고 미리 처가를 떠난 이지함의 처자식만 간신히 살아남은 상황
※ 이홍남 고변 사건 : 1549년 충주의 이홍남 · 이홍윤 형제의 다툼이 역모사건으로 확대돼 충주 일대 수많은 선비가 죽거나 유배된 사건
〇 토정 이지함, 출사를 거부하다
- 이 사건 이전에 토정 이지함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 이 사건으로 벼슬의 뜻을 접고 과거에도 나가지 않았는데 1545년 을사사화 당시 이지함의 절친 승정원 사관(史官) 안명세는 을사사화에 대한 비판을 하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는데,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벗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지함은 깊은 회의감을 느끼자 출사의 뜻을 접은 채 전국을 유랑하기 시작한다.
※ 을사사화 : 명종(明宗) 대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 일가의 권력 다툼으로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 안명세 필화(筆禍) 사건은 1548년 을사사화의 전말을 직필한 사초가 동료 사관의 밀고로 외척세력에게 들어가면서 안명세가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사초는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한 원칙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왕조차도 볼 수 없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은 권력에게 아부할 수밖에 없는 것
- <이욱 교수의 분석> 이지함이 기인이 된 이유 ① 절친한 벗의 죽음 ② 원칙이 무너진 사회에 대한 실망감이었을 것, 하지만 조선의 양반 사회에서는 입신양명이 가문에 대한 책임과 의무 아닌가? 사실 이 시대를 우리는 역사에서 사화의 시대라 하여 1498년 무오사화 · 1504년 갑자사화 · 1519년 기묘사화 · 1545년 을사사화 등 사화로 인해 수많은 선비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데, 이지함 외에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사회를 포기하고 지방에서 세상을 등지고 은둔생활을 하며 지조를 지키게 되는데 우리는 이들을 처사(處士) · 유일(遺逸) · 은일(隱逸)이라 일컫는다. “이지함은 안명세의 처형을 보고 해도(海島)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19년>
- 사화의 시대에 토정 이지함은 현실정치에 미련을 버린 것, 미치지 않았으나 미친 척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을 <청광(淸狂)>이라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시습이고 토정 이지함 역시 혼란스러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 솥을 쓴 것(?)
※ 김시습(1435~1493) :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
〇 토정 이지함, 민생을 보다
- 유랑하며 만나게 된 새로운 세상인 백성들의 삶은 지배층의 권력싸움으로 민생이 어려웠을 것으로 조선 초기의 토지제도인 과전법은 ① 농민에게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하고 ② 관리가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여 양반관료 사회의 경제기반이었으나 16세기가 되면서 과전법은 유명무실해지고 ① 관료들이 땅을 불법으로 차지하고 ② 백성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말 그대로 가렴주구의 시대 “생업을 잃게 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지고 얼어 죽는 사람이 잇달아 촌락이 쓸쓸해져서 열 집 중 아홉 집은 비게 되었다.” <명종실록 9년> 먹고 살기 위해 도적이 되었으나 도적이라고 탄압하여 맞서 싸우면 반란이 되는 현실로 의적(義賊)으로 불리던 <임꺽정>이 활약하던 시기
- 도탄에 빠진 백성을 본 이지함은 무엇을 했을까?
이지함의 유랑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고 분명한 목적이 있는 선택으로 백성들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보는 시간, 이지함의 거처는 마포의 흙집으로 흙집 위에 지은 정자가 <토정(土亭)>
- 16세기 마포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북한강 · 남한강을 통해 조선의 모든 물산이 집결되는 곳, 그래서 이곳에 광흥창이 있고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물자인 소금을 운반해 곳곳에 소금창고가 있으며 마포의 염리동은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아 염리동이라 불리고 토정 이지함이 마포에 머물렀던 이유는 해상교통과 물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에서 였을 것
※ 광흥창 : 현재 서울 마포 창전동 일대에 위치한 조선시대 관원들의 녹봉을 보관 · 지급하는 관아와 그 창고,
〇 마당발, 토정 이지함
- 당시 사대문 바깥쪽인 한강 주변에는 신분이 낮은 이들이 거주하였으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두루 사람을 사귄 이지함, “이지함이 말하기를 ‘최고가 될 만한 사람은 안다.’ 한 사람은 해상에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며 살고 있다.” <토정유고> 교류 인물로는 서경덕·조식·성혼·정철·이이·이황·정렴·박지화·남사고 등으로 명문가의 학자이자 정치가 하지만 박지화와 남사고는 신분은 낮지만 능력이 있고 당색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들로 이들을 통합한 인물 이지함
- 서경덕은 개성출신인데, 조선시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상업 활동을 했던 개성양반으로 상업의 발달과 함께 유연하고 관대한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 보통 이지함의 스승으로 서경덕을 꼽으니 개성출신 서경덕의 영향과 마포에 거주한 경험으로 이지함 역시 상업에 개방적 태도를 가지게 됐을 것
※ 서경덕 : 조선 중기의 개성출신 학자로 황진이 ·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 불림
- 개성이 낳은 역사 속 유명인 ① 절세미인 황진이 ② 신출귀몰 전우치 ③ 명필 한석봉으로 개성 출신 유명인이 많은 이유는 개성상인의 PR 덕분!
〇 양반도 장사를 하라, 토정 이지함
- 결국 스스로 상업에 뛰어든 토정 이지함 “이지함이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 만개나 되었다. 그것을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천 석에 이르렀다.” &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준 다음 소매를 펄럭이며 떠나가 버렸다.” <어우야담>
- 토정 이지함이 양반의 상업 활동을 주장한 이유는 상업은 이윤을 추구하다 보면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기 쉽고, 그렇게 얻은 부(富)는 사적으로 쓰기 마련이어서 옳지 않고 양반 중 도덕을 갖춘 군자가 상업 활동을 해야 그 이윤을 백성에게 돌려줄 수 있는 공익적인 차원에서 상업을 하라는 자신만의 뚜렷한 경제관을 세웠던 것
〇 토정 이지함, 벼슬길에 오르다
-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학자들은 추천을 받아 등용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사화(士禍)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 사림(士林) “대신들이 천거한 선사 5인 중 이지함 · 정인홍 · 최영경 · 김천일은 다 6두품의 벼슬을 받았다.” <선조실록 6년>
- 1573년 낡은 옷에 나막신을 신은 채로 포천 현감으로 부임한 이지함,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등용 책인 유일(遺逸)로 등용이 된 것 “포천현의 상황은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 <토정유고>
- 이지함은 민생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상소를 올리는데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이지함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본래 벼슬에 뜻이 없던 이지함은 병을 핑계로 현감직을 사직한다.
- 포천현감으로 재직 시 일화는 수차례 밥상을 거부하는데 결국 오곡밥에 나물국을 올리고서야 먹게 되는데 백성들의 삶에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신임 현감 이지함
〇 조선의 국부론자, 토정 이지함
- 이지함의 상소문은 어떤 내용이었나?
주요 내용은 “전라도 만경현에 고기잡이 할 수 있는 섬이 있고 황해도 풍천부에 소금을 구울 수 있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들을 임시로 빌려 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소문 중> 토정 이지함의 유랑생활은 민생대책 마련에 큰 자산! 상소문은 포천에서 무리한 세금을 걷는 대신 가능성 있는 지역에 백성들을 보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 곳에서 걷은 세금을 복지에 투자하기 위한 것
- 조정에서는 왜 이지함의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신병주 교수의 분석> 성리학의 국가 조선에서는 사·농·공·상을 천시하고 질서를 무시한 이지함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라는 것으로 이지함 상소문의 사회·경제정책은 시대를 앞서갔던 것, 상소문의 핵심은 “땅과 바다는 백가지 재용의 창고입니다.··· 은(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옥(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는 것이며 소금은 굽는데 이를 것입니다. 이 창고를 열 수만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익과 혜택은 한(限)이 없을 것입니다.” 민생을 위한 길이라면 사·농·공·상이라는 성리학적 명분은 중요치 않다는 것!
- 1776년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Nations)에서 국가의 부(富)를 증진시키는 방법을 이전과 달리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근대 경제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획기적인 저자,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이지함의 주장은 국가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민생과 국부를 주장하는 것으로 애덤 스미스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국부론을 주장
- 토정 경제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 그런데 아쉬운 점은 명분중시의 조선 사회를 개혁할 힘이 부족했던 비주류 이지함, 그래서 결국 포천현감을 사직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없는 관리의 자리는 무의미하다는 것
〇 다시 아산 현감의 벼슬길에!
- 5년 뒤인 1578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부임하게 되는데,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백성들이 연못에서 고기를 잡아 공납(貢納)으로 바치는데 이지함이 부임하여 연못을 메워버린 것, 이유인 즉은 백성들이 고기를 잡아 공납으로 바치는 것을 너무 힘겹게 생각한다는 것 “이지함이 그 못을 없애버리니 후환이 영영 끊어졌다.” <석담일기>
- 실제로 공납이 면제되는 효과가 있었을까?
못을 메운 것은 공납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리는 정치적 행동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토정 이지함이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을 것
- 아산 현감 토정 이지함이 추진한 정책은?
대표적인 것은 걸인청(乞人廳) 설치, 걸인뿐만 아니라 흉년으로 유랑민이 된 농민들을 위한 시설로 단순히 숙식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재능에 따라 기술을 가르쳐 농업이외의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걸인청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볏짚을 주어 미투리를 만들게 시켰는데 그 일을 친히 감독하여 하루에 10장씩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게 하였다.” <어우야담> 이를 저축하여 자립할 수 있는 자금을 만든 것인데 무려 450여 년 전에 이런 정책을! 요즘의 노숙자 재활기관으로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 격으로 국부와 백성의 자급을 위한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펼친 것
〇 토정 이지함이 남긴 것
- 아산 현감으로 부임한지 1년도 되지 않은 1578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이지함 “이지함은 이질을 얻어 오래지 않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세 였다.” <석남일기> 그가 백성들을 위해 구상했던 정책들 역시 세상에 펼쳐지지 못했고 그의 허망한 죽음에 고을 사람들은 마치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전한다. “읍민이 애도하기를 친척이 상을 당한 것같이 하였다.” <석남일기>
- 좀 더 빨리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고 자신의 죽음까지 예언했던 이지함은 제자 조언과의 대화 “나는 아산에서 죽을 것이고 자네(조헌)는 금산에서 죽을 것이니 산을 피하라··· 그 후에 이 말은 과연 증명이 되었다.” <동패락송> 조헌은 토정 이지함이 가장 아끼던 제자로 토정 이지함의 애민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
※ 조헌(1544~1592)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700명의 의병과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 모두 전사
-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도 이지함을 칭송하는데 “신은 세 분의 스승을 섬겼는데 이지함 · 이이 · 성혼이 그분들입니다. 세 분이 성취한 덕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마음을 맑게 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아 지극한 행적이 세상의 규범이 된 점만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이와 성혼은 기호학파 서인의 영수로써 당연한 인물이지만 의외의 인물 이지함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던 송시열이 진보적 민생주의자인 이지함을 칭송한 것은 놀라운 일
※ 송시열(1607~1689) :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조선 후기 유학자
- 19세기가 되면 북학파가 등장하는데 훗날 북학파의 사상과 통하는 이지함의 경제관, 북학파 사상의 핵심은 이지함이 주장한 상공업 진흥과 이용후생 사상, 실제 박제가는 그의 저서에서 “토정 이지함이 일찍이 외국 상선 수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그 분의 식견은 탁월하면서도 원대했다고 하겠다.” <북학의> 북학파의 사상은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보다 먼저 이지함의 사상이 토대가 되었던 것
※ 북학파 : 박지원 · 박제가 · 홍대용 등이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과 대외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
- <맹자>에 왕자이민위천(王者以民爲天)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이지함의 경제에 대한 안목도 실사구시의 정신이 깊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〇 <토정비결>의 저자는 흔히들 토정 이지함?
- <토정비결>의 저자를 흔히들 토정 이지함으로 알고 있는데 토정비결의 저자는 토정 이지함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로<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시대가 아닌 19세기 후반에 유행하게 되는데 토정 이지함의 유명세를 차용한 것
- 토정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 ① 이지함의 시문집 <토정유고>에 언급되지 않음 ② 조선 후기 세시풍속지 <경도잡지> <동국세시기>에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대중화 되었다면 이러한 저술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
- <이욱 교수의 생각>은 토정 이지함은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기보다는 백성들과 함께 생활한 자신의 경험들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했을 것으로 토정 이지함은 기인이 아닌 한 시대를 고민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폈던 학자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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