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비결 <제2편> 정감록
〇 정감록, 변혁을 꿈꾸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문리HRD 학부 대우교수>
- 한국인이 즐겨 읽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금서(禁書)였던 정감록은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한다는 내용으로 각종 역모사건에 등장, 그래도 정감록은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고 결국 조선 왕조는 정감록의 예언처럼 막을 내리게 되고···
- 그런데 정감록의 예언은 이게 끝이 아니고 1950년 한반도를 덮친 전쟁의 그림자, 정감록은 전쟁까지도 예언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중에 배 일천 척이 정박한다.” <정감록>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을 떠올리게 하고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 것이다.” <정감록> 이는 중국의 참전(參戰)을 의미하는 것(?) 충분하지 못한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정감록이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 조선왕조 몰락이나 6.25전쟁 발발 등 해석하기에 따라 맞는 것처럼 보이는 정감록의 핵심은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왕이 되며 다음 도읍지는 계룡산이다.” <정감록>
- 출판본마다 다른 정감록의 내용, 그 이유는?
정감록은 이본(異本)이 많은데 그 이유는 ① 금서(禁書)라서 정본이 전해지지 않는다. ② 유사한 비결들도 제목으로는 정감록을 사용한 점, 정본이 없다면 필사자의 목적에 따라 첨삭(添削)도 가능한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정감록은 살아있는 문서로 끊임없이 변형·복제·확장되어가면서 수시로 업·그레이드가 진행된 책
- 기록상 정감록의 등장은?
공식 기록은 영조(英祖) 15년 “함경 감사에게 정감록 역년(曆年)에 관한 일 등도 조사하게 하여 엄히 처단해야 합니다.” <비변사 등록 영조 15년> 그리고 두 달 뒤의 기록 “서북 변방사람들이 정감(鄭鑑)의 참위한 글을 파다히 서로 전하여 이야기 하므로···” <조선왕조실록 영조 15년> 정감록의 내용은 이현령비현령으로 더구나 이씨 왕조가 망하는 것이 핵심으로 하여 왕실에 대한 불만 세력의 애독서가 된 것
〇 정감록, 반란사건의 배후가 되다
- 1782년 정조(正祖) 6년, 엄청난 규모의 역모사건이 발각되는데 주범은 천인(賤人) 문인방과 양반(兩班) 이경래가 함께 도모하여 양양 · 강릉 · 원주를 거쳐 도성을 함락시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만 거사는 밀고로 실패하고 조사과정에서 이들이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던 책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감록
- 태평성대의 영·정조 대의 반란이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불만세력의 권력욕, 신분사회 조선에서 양반과 천인이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이유?
당시는 정치적 변화를 꾀하는 양반들, 즉 권력에 밀린 양반 들은 점복(占卜) · 예언을 반란의 명분으로 이용하여 이를 매개로 양반과 술사(術師)가 결합하게 되는데 그것이 18세기 사회적 여건과 맞아떨어진 것
- 살주계(殺主契) · 검계(劍契)라 해서 평민저항세력 + 정감록 유포 = 왕조 교체 시도도 탄력을 받으면서 천민과 양반의 연결 고리가 된 정감록
※ 살주계(殺主契) : 노비가 주인을 죽이려고 맺은 반사회적 조직 & 검계(劍契) : 칼을 차고 다니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의 범죄 조직
- 천인이 어떻게 정감록을 읽을 수 있었을까?
조선의 르네상스인 18세기 영·정조 시대, 특히 이 시기에는 서민문화의 성장으로 서당이 급증하고 출판 서적이 증가하다 보니 문맹률이 저하되어 천인도 책을 읽을 수 있었으나 문제는 신분이 낮은 지식인은 관직 진출이 어려웠던 것으로 글을 아는 천민·서얼·잔반(몰락한 양반)들이 훈장·의원·지관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것, 하지만 정감록이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결정적 계기는 한글판 정감록의 탄생
- 사람들을 현혹한 정감록의 내용?
아쉽게도 영·정조 시대의 정감록은 모두 폐기되어 내용을 알 수 없음 “삼자(三字)·육자(六字) 등의 흉악한 말은 참으로 너무나 불측한 것이었습니다.” <정조실록> 흉언의 실체 ① 조선왕조는 곧 망한다. ② 계룡산을 도읍지로 하는 새나라 등장 ③ 새 나라의 창건자는 정씨 진인(眞人) ④ 정씨 진인(眞人)의 출현장소는 해도(海島), 17~8세기 당시 섬은 미지의 세계로 섬에서 나타날 초월적 존재를 기대하여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누군가가 일어날 수 있는 명분이 된다는 것
〇 정감록, 왜 정씨인가?
- 정몽주 “안티 이씨조선, 응답하라 고려 Again!” 개국 전(前)부터 조선왕조를 반대하고 이씨의 손에 살해된 인물 & 정도전 “신뢰의 원조로 조선의 설계자, 이씨 조선의 재건축” 개국공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다툼에 밀려 반역자로 몰려 비참하게 죽음 & 정여립 “천하는 공공재(公共財), 이씨들의 왕권 독점 반대!”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 정여립은 현실적인 사상을 가졌음에도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당시 각종 참위설·비결이 유행했었고 이들 모두는 체제 비판적인 인물들
※ 참위설 :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일식·월식·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
- 정감록을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선 정감(鄭鑑)이라는 이름은 매우 상징적으로 정씨는 조선 왕실과 불화한 큰 선비가 유독 많았던 가문이라는 상징성이 있고 정감의 감(鑑)은 거울 감으로 고대부터 예언의 도구로 사용된 거울은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비춰주는 신령한 힘을 가진 것
- 어쨌든 정감록의 인기 배경은 16세기 이후 팽배해진 조선의 위기의식이 누적이 되고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한편으로 보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누적된 문제들이 쌓여가지 않았나(?)
〇 정감록, 조정의 대응은?
- 역모사건에 연루된 정감록, 조정의 대응은?
여러 차례의 반란 시도에 투옥·귀양 등으로 강경하게 대응을 하지만 각종 역모·괘서 사건에 꾸준히 등장하는 정감록은 홍경래의 난에도 영향을 미친 것 “다행히 세상을 구하는 성인이 청천강 이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위의 가양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였다.” &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므로 차마 무찌를 수 없어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기병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다.” <홍경래의 난 격문> 정감록이 익숙한 백성들에게 홍경래의 난 격문은 큰 반향을 일으킨 것
- 정감록이 오랫동안 지지 받은 이유는?
정감록이 가지는 특징이 장기적인 인기를 보장했던 것, 한마디로 정감록은 예언의 호수로 천문·점성·음양오행설적인 요소들이 정감록에 모두 들어있고, 다음으로 빼어놓을 수 없는 풍수까지 아우르는 정감록,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륵신앙으로 진인(眞人)의 존재는 미륵 신앙적 새로운 세상을 예언한 것, 게다가 18~9세기 조선 후기 서양의 기독교적 요소들이 흡수하여 취향불문·종교불문하고 다양한 요소를 반영한 정감록에 의지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었다는 것
〇 정감록, 동학(東學)을 만나다
- 1894년 4월 26일, 동학 접주 전봉준은 전주성 전투 전날 부하들에게 나눠준 부적 “궁을부를 태워 마시면 적군의 총과 화살을 피할 수 있다.” 궁을(弓乙)이란 정감록의 핵심 개념인 궁궁을을에서 따온 말로 다음날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정감록은 동학에 흡수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한다.
- 궁궁을을(弓弓乙乙)이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일부는 활궁 자에서 활활이라고 읽는 경우가 있고 활활(闊闊)은 트일 확 자로 확 트인 들판(?) 살리는 기운(?) 한편으로는 궁을(弓乙)을 같이 써서 앉을 좌로 난리가 일어났을 때 집에 있으라는 의미로 궁궁을을은 피난처 혹은 해결 방안을 의미하는 것
- 동학(東學)에 가면 달라지는데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에는 최고의 명약과 부적은 태극이자 궁궁, 태극은 궁(弓)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을(乙)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정감록이 예언서의 종합백과사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동학과도 통하게 되고 “양반쌍놈 구별이 없어지고 예법이 사라진 다음에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정감록>
- 정감록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동학과 일맥상통하게 되고 동학의 정감록 흡수 증거는 궁을부로 동학의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에는 정감록의 내용이 곳곳에 보이기도 하고 “부(富)하고 귀한 사람 이전 시절 빈천(貧賤)이요. 빈(貧)하고 천(賤)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 <용담유사> &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는다.” <정감록>
- 그리고 동학이 실제 운동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동학지도자 손화중이 선운사 마애여래좌상의 명치에서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 실제 비결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비결 획득 소문 이후 손화중 휘하의 동학교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실제 신봉 여부와는 관계없이 정감록의 신앙을 동학이 활용한 것이고 동학에 흡수되면서 체제 저항운동에 활용된 것
〇 일제강점기의 정감록
- 조선왕조 몰락, 정감록 예언의 실현?
조선왕조의 몰락은 맞혔으나 빗나간 예언은 이상(理想) 사회가 아닌 참혹한 일제강점기의 시작,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유지된 정감록의 인기로 지금까지의 정감록이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이 시점이 되면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을 한다는 미래를 예언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 당시 일제는 정감록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대응을 했나?
150여 년만인 1923년 일본에서 최초로 정감록 출간, 조선시대 금서(禁書) 정감록이 일본에서 출판된 속사정은? 정감록을 편집 간행한 인물은 <호소이 하지메>로 3.1운동 이후 독립 관련 움직임에 예민했던 일제는 조선독립예언(?) 정감록의 확산이 불편했던 것, 하지만 조선 후기 금서 지정 이후에도 필사적으로 이어온 정감록의 생명력, 호소이 하지메도 이를 막을 수 없다면 정감록을 공식적으로 간행하여 나름대로 생각했던 허구성을 낱낱이 폭로하겠다는 의도였던 것
※ 호소이 하지메(1886~1934) : 일본의 대표적 혐한론자로 조선전통문화 연구를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 정당성을 주장
- 정감록의 허구성 폭로, 호소이 하지메의 계략은 성공했을까?
계략은 실패하고 오히려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되는 베스트셀러가 된 정감록은 금서(禁書)라서 읽을 수 없던 일반 백성들도 쉽게 구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고 더 반가운 것은 1923년 김용주가 서문 없는 정감록을 우리나라에서 간행
- 정감록의 두 얼굴(?)
<백승종 교수의 분석>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정감록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간행하는 과정에서 혁명적·변혁적 내용은 약화시킴으로 일본의 의도대로 편집했던 것, 하지만 일본의 출판으로 오히려 대중화 된 정감록
- 한편으로는 독립을 꿈꾸게 한 정감록이지만 정감록 열풍이 일으킨 피해도 심각하여 끊이지 않았던 정감록 사건·사고, 일제강점기 때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는 1937년 백백교 사건으로 정감록을 활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교주로 자처하면서 재산을 끌어 모은 충격과 공포의 사건으로 너무도 엽기적인 사건이라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현대 종교사기 사건과 비슷한 사건
※ 백백교(白白敎) 사건 : 1928~1936년 까지 백백교 교주와 그의 제자들이 10년 동안 3백여 명의 남녀노소 신도들을 살육한 사건
- 정감록은 변혁에 대한 열망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 반면 혹세무민으로 누군가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흉기로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
〇 정감록, 진실 혹은 거짓?
-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맞았지만 정감록에서 말하는 이상사회는 오지 않았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국토가 반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 결국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사람들, 그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기약 없는 피난길에 나서고 3년 간 이어진 참혹한 전쟁, 절망 속에서 정감록의 생명력은 다시 한 번 되 살아 난다.
- “호랑이와 토끼해를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솥의 발같이 대치하리라??” <정감록> 1950년은 경인년 호랑이해로 6.25발발을 예견? & “금강산 서쪽 오대산 북쪽은 12년간 도둑의 소굴이 된다.” <정감록> 이는 금강산과 오대산 사이에 있는 휴전선을 의미? 그렇다면 12년의 의미는? 12년 일 수도 있고 12간지일 수도··· 그러면 진인(眞人)은 언제 오나? 이미 왔다는 것으로 진인(眞人)은 True Man으로 6.25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헨리 트루만으로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트루만을 진인으로 생각했던 것
- 신축성 있는 정감록의 해석으로 1945년 이후 커진 미국의 영향력으로 한국의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도 미국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지는데, 때마침 트루만이 진인(眞人)으로 등장하여 국제 정세를 반영한 정감록 풀이
〇 정감록이 예언한 피난처, 십승지
- 경북 영주시 풍기읍, 이곳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 중 제 일승지로 십승지는 난리를 피해 안심하게 살 수 있는 열 곳을 의미한다.
- 풍기에는 정감록을 믿고 이주한 사람들, 즉 감록파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데, 오늘날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감록 하나만 믿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 이런 일들이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일어나면서 십승지로 이주한 사람들이 발생하고 특히 일제강점기 때 많은 사람이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지금도 속리산 한 가운데에는 감록촌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도 충청도 사투리가 아닌 황해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
- 정감록의 일승지인 풍기는 개성 사람들이 이주하여 인삼농사를 시작하면서 풍기에는 인삼 및 인조견이 발달하는데 이는 감록파의 영향으로 알려지고 있다.
〇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
- 십승지는 정감록에서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꿈을 보전할 수 있다고 전하는 열 곳의 장소로 강원도의 태백, 경북의 봉화·풍기·안동·개령·예천, 충북의 진천·마곡, 경남의 가야와 두류산(지리산)으로 대체로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 위치한 십승지
-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이유는?
십승지가 남쪽에 있는 이유는 남선사상의 영향으로 통인신라 이후 남쪽이 우리 역사의 주 무대여서 전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고 한반도의 위기의 침략인 병자호란·정묘호란은 북쪽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북쪽 사람들은 따뜻하고 역사적 주류인 남쪽을 선호했던 것
- 십승지가 되기 위한 조건?
십승지의 중요 조건은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삼재를 정감록적으로 정리하면 자연재해·전쟁·전염병으로 그러한 것들로부터 안전한 곳은 역시 산 속 깊은 곳
- 지금도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지?
사실상 지금은 감록촌은 해체가 됐다고 볼 수 있고 일부 후손들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1970년대 이후 거세게 일어난 도시화 · 산업화로 감록파의 후예들도 대부분 대도시로 이주하고 현대사회에서 감록촌은 사실상 소멸
- 곤궁했던 시대에 민중의 희망이었던 정감록, 옛 사람들의 이상(理想)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였을 것으로 예언 속의 새 세상은 “밤도 낮처럼 환해지며 들에는 백가지 곡식이 풍성하고 만 가지 과일이 다 굵고 커서 음식이 풍성하게 된다.” <정감록>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사라진 정감록에 대한 믿음.
〇 오늘날 정감록이 가지는 의미
- 현대사회에 정감록은 더 이상 필요 없고 정감록은 민중의 정치 참여가 불가능했던 전근대 사회의 유물로 우리 시대의 정감록은 투표용지로 투표용지 안에는 통일·복지·성장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 & 정감록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고 과거에서 현재로 보낸 경고장이고 수신자는 권력자이고 권력자들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백성들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
-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에서 피운 연꽃으로 고난의 역사 속에서 희망의 싹이 된 정감록 &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사회는 예언에 기대지 않는 사회로 우리가 다가가야 하는 사회는 누구나 노력하는 만큼 성취할 수 있는 사회로 예언의 기능을 상실한 정감록, 하지만 그 안에 담겼던 변혁의 꿈은 지금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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