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이명박. 세종 이래 가장 '명군' 으로 불리는 정조와 광우병 파동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이명박의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정조와 이명박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정조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과 정치적 상황은 이명박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끝끝내 '성공한 군주' 로 이름을 떨쳤다. 지금 이 시대 이명박은 정조의 어떤 점을 배워야 할 것인가. 정조와 이명박,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정조를 키운 '왕' 영조 vs 이명박 키운 '왕회장' 정주영.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함께 사도세자의 '아들' 이었던 정조는 노론과는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노론의 탄핵을 받았고, 모함과 핍박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데에는 할아버지 영조의 무한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음에도 손자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정조는 영조가 포기할 수 없는 '삼종의 혈맥' 의 유일한 종손이었다.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이는 한편 노론의 탄핵과 핍박에서 구해낸 1등 공신이었다. 조선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만인지상의 비호가 있는 한 노론의 공격은 '헛방' 에 불과한 쓸데 없는 일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정조에게서 이루려 했다. 영조가 정조에게서 본 것은 조선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다. 80살이 넘어선 그 순간까지도 영조는 단 한번도 정조를 의심하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너는 나라의 흥복이다." 라는 말로서 영조는 정조를 '선택' 했고 '성장' 시켰으며 무한히 신뢰했다. 영조가 있었기에 정조가 있었고, 정조가 있었기에 영조는 건재할 수 있었다.
영조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정조가 성장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명박 역시 '왕회장' 정주영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지금까지의 성장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이명박이 '샐러리맨의 신화' 로 추앙 받을 때까지 정주영과 이명박은 일심동체라 할 만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명박이 성공적인 샐러리맨으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정주영은 이명박을 두고 "젊은 시절 나를 보는 것 같다." 는 애정을 보였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죽는 그 순간까지 변치 않는 '믿음' 과 '애정' 을 과시했던 것에 반해 정주영과 이명박은 그렇지 못했다. 이명박은 정주영의 대통령 출마를 극구 반대하다 결국 김영삼을 도와 정주영의 '저격수' 로 돌변했다. 정주영의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난 배신이었을테고, 이명박의 입장에서 보자면 '권력의 비정함' 을 손수 실현한 것이었을테다. 이 후, 정주영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이명박을 이렇게 평가했다. "절대 이명박 같은 사람과는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영조는 정조를 버리지 않았고, 정조는 영조의 유지를 끝끝내 받들었던 것에 반해 '현대가' 의 두 거물이었던 '왕회장' 정주영과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의 끝은 이토록 좋지 않았다.
'반대' 를 극복하고 대권 차지했던 정조와 이명박
정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즉위가 힘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 의 원죄를 그대로 대물림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노론의 정치적 파상공세는 그를 수세로 몰기 충분했고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노론의 공격이 가해졌다. 아마 영조나 혜경궁 홍씨가 정조의 뒷배를 봐주지 않았다면 정조는 노론의 입김에 사지로 몰리고 말았을 것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당시 조선은 더 이상 '임금의 나라' 가 아니었다. 조선 중기부터 중전을 통해 왕실을 장악하던 서인은 이제 노론으로 변모해 임금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바로 '택군의 정치' 였다. 사도세자를 제거하던 그 순간부터 노론에게 정조는 더 이상 임금도, 택군의 대상도 아니었다. "세손(정조)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라던 홍인한의 '삼불지론' 은 당시 정조가 노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노론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영조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 입어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노론 입장에서 보자면 정조의 즉위는 아마 대단한 좌절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반대' 를 극복하고 대권을 차지한 정조처럼 이명박 역시 경선 기간 동안 엄청난 구설수와 반대에 부딪히며 청와대 입성에 성공했다. 정조만큼이나 이명박 역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구설' 과 '의혹' 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여러 구설들이 산적했지만 그 중 대미를 장식한 것은 역시 김경준의 'BBK 사건' 이었다. 김경준의 입국과 BBK 검찰 수사를 통해 이명박은 정치적인 수세에 몰리며 대통령 선거를 치룰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명박을 둘러싼 수 많은 의혹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파상공세를 펼친 것은 당시 여당이었던 정동영 측이었다. BBK 사건을 둘러싼 정동영과 이명박의 설전은 노론과 정조가 벌인 '삼불지론' 에 필적하는 치열함을 자아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처럼 이명박 또한 대통령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거대 당파였던 노론의 공세를 뚫고 즉위했던 정조와 의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여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에 당선 된 이명박의 모습은 어쩐지 묘한 공통점을 자아낸다.
'제거' 당한 2인자들의 운명, 홍국영 vs 이재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가장 큰 '공' 을 얻게 된 것은 당연히 정조의 '수족' 이었던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즉위와 함께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권신이 됐다. 만인지상 정조를 제외하고 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 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홍국영, 그 뿐이었다. 초기 정조 시대는 거부할 수 없는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었다. 그만큼 정조 시대의 첫 출발은 홍국영의 입김이 상당했다.
홍국영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 있던 정조를 택군하는 것으로서 철저한 '킹메이커' 를 자처했다. 노론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는 정조를 보호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끝끝내 정조를 조선의 왕으로 만들어 냈다. 정조가 임금이 되는 동시에 그가 '2인자' 로서의 최대 권력을 얻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은 '대통령' 이명박을 만든 이재오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그는 당내 비주류였던 이명박을 주류로 끌어 올리면서 이명박의 청와대 입성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 스스로 '대운하 홍보 도우미' 를 자처했던 그는 물심양면으로 이명박을 도우면서 당내 2인자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동시에 이재오의 입김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권력 역학관계로 보자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바로 이 '2인자' 들의 운명이다. 정조 시대의 완벽한 '2인자' 였던 홍국영의 권세는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걸었고, 이명박의 오른팔이었던 이재오 역시 총선에서 낙선하며 정치적 타격과 상처를 받았다. 비정한 권력의 속성상 2인자들에게 펼쳐진 미래가 대부분 장밋빛이 아니라 잿빛이었다는 점에서 살펴볼 때 홍국영의 몰락도, 이재오의 낙선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두 명 모두 '정치적 실수' 로 인해 '제거' 당하는 운명을 걸었지만 홍국영은 자신이 선택했던 군주 정조에게 직접 제거 당한 반면, 이재오는 국민에 의해 간접적으로 제거 당했다. 주군에 의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홍국영은 끝끝내 권력의 중심부로 복귀할 수 없었지만 이재오는 총선 낙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명박의 수족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당내 주류계의 중심으로 서서히 복귀하고 있다.
홍국영이 젊은 나이에 죽는 그 순간까지 정조를 그렸던 것에 비하면 이재오의 '컴백' 은 또 다른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2인자' 로 제거 당했던 이재오는 다시금 '2인자' 로 당내 복귀를 서두르며 다시 한 번 권력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불행하게도 달라진 시대의 변화 앞에 2인자들의 운명 역시 달라진 셈이다.
가장 큰 정적은 남성 아닌 '여성', 정순왕후 vs 박근혜
정조는 재위 내내 노론과 힘겨루기를 하며 정치를 했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진짜 '정적' 은 노론이 아니라 노론을 움직이고 있는 '할머니' 정순왕후였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던 정순왕후와 정조는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통해 서로를 수세에 몰아넣었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정조와 '노론'의 임금이었던 정순왕후는 사실상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상극의 입장이었다.
관계로만 따지면 정순왕후와 정조는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다. 비록 법적인 관계이지만 왕실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묶여져 있는데다가 할머니와 손자라는 상징적 연결고리도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에게도, 정조에게도 이런 관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순왕후는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인물이었고,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은언군 사건을 일으키며 정조를 압박했던 정조의 최대 '정적' 이자 '난적' 이었다.
같은 궁궐, 같은 왕실 속에서 정순왕후는 정조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괴롭혔다. 오라버니인 '김귀주' 의 복권을 요청하며 단식 한 것을 시작으로 정조의 배다른 동생인 은언군을 사지로 몰아넣으며 정조의 약점을 건드렸다. 정조 역시 이런 정순왕후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때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정순왕후의 공세를 방어했다. 정조는 노론의 '수장' 격으로 떠 받들여 지고 있던 정순왕후를 포용할 수도, 배척할 수도 없는 아주 애매한 위치에 자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공교롭게도 이명박과 박근혜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되고 난 후에도 이명박의 가장 큰 정적은 상대 후보나 야당 당수가 아니라 같은 당에서 동거동락하고 있는 '박근혜' 였다. 박근혜는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의 모든 의혹을 남김없이 까발리며 야당의 공세보다 더욱 날선 공격을 했고,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정부 정책에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이명박을 정치적 수세로 몰아 넣었다.
게다가 정순왕후가 오라비였던 김귀주의 복권에 사력을 다했던 것처럼 박근혜 역시 자신의 계파인 '친박연대' 의 한나라당 복귀를 최대의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이명박은 이런 박근혜의 행보를 바라보며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포용할수도, 배척할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다. 박근혜를 포용하기엔 그녀의 정치적 입지가 너무 크고, 배척하기엔 박근혜의 '독자노선' 이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박근혜는 정순왕후가 그랬던 것처럼 이명박의 '당선' 을 끝까지 반대한 인물은 아니다. "이회창의 출마는 정도가 아니다." 라는 말 한마디로 대선 판도를 뒤 바꿔 놨던 박근혜는 따지고 보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잠깐의 순간을 제외하고 나면 이명박의 최대 정적이자 난적, 포용할수도 몰아낼수도 없는 정치인이 박근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명박은 정조와 마찬가지로 동시대 가장 막강한 여성 정치인과 권력 투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대의 '건설' 정책, 화성과 대운하.
정조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조선' 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지만 그 중 가장 백미였던 것은 단연 수원 화성의 건축이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의 건축을 통해 조선의 미래와 희망을 읽었다. 노론의 반대와 최대 건설 정책이라는 부담 속에서도 정조는 수원 화성의 건축을 밀어부쳤다. 정조에게 있어서 화성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정치적 생명력' 이었다.
이는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을 만든것이 '청계천' 과 '대운하' 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명박은 '청계천 신화' 위에 '대운하' 이슈를 던져 놓음으로써 대선 판도를 완전히 이명박 천하로 바꿔놨다. 그리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운하는 이명박의 1등 공약으로 손 꼽히며 지금까지 변함없는 위상을 떨치고 있다. 정조의 수원 화성 건축과 마찬가지로 이명박의 대운하 역시 당대에서 보기 드문 최대 건설 정책이자 이명박의 정치적 생명력이다.
그러나 정조의 수원 화성은 국민의 불같은 반대와 안 좋은 여론에 "안 할지도 모른다" 고 하면서 뒤에서는 몰래 하는 '대운하' 따위의 초라한 작품은 결코 아니었다. 정조는 화성을 건축하면서 당시 조선이 투자할 수 있는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모두 실험했다. 그리고 이런 정조의 비전 속에서 정약용의 과학기술과 채제공의 꼼꼼한 관리는 빛을 발해 '10년 계획' 으로 짜여졌던 수원 화성을 3년 만에 완성시키며 조선 최고의 '건축물' 로 성장시켰다.
게다가 정조는 수원 화성을 짓는 순간 동안 단 한 번도백성들을 강제 노역시키지 않았다. 채제공조차 "백성들의 부역은 법적으로 허용된 것입니다." 라고 간언할 정도였지만 정조는 끝까지 백성들에게 월급을 주며 화성을 완성시켰다. 화성의 건설과 함께 몰락했던 농민들은 월급을 받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고 재기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수원 화성은 조선 최대의 '건설 사업' 이었던 동시에 최대의 '복지 사업' 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화성 건설 동안 단 한번도 백성의 뜻을 거슬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즉시 화성 건설을 중지하게 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정조에게 있어서 화성 건설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백성들의 삶과 안위였다. 천재지변을 무릅쓰고 화성 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정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런 군주의 배려에 백성들은 더욱 감동했다.
그러나 대운하는 어떤가. 200년 전 '만인지상' 이었던 정조조차 화성을 건설하는 일에 백성들의 뜻과 마음을 거스르지 않았거늘, 2008년 지금 추진되고 있는 '대운하' 는 국민 대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특유의 '마이웨이' 로만 변질되고 있다. 정조의 수원 화성에는 건설과 복지, 과학과 학문, 미래와 희망이 가득했던 당대 최고의 '이슈'였으나 이명박의 대운하에는 걱정과 근심, 파괴와 불안만이 가득한 '불행' 이다.
이명박은 정조의 수원 화성을 배워야 한다. 정조는 화성 건축을 둘러싼 걱정과 근심을 스스로 해명하고 증명하는 것으로 환희와 기쁨으로 바꿔 놨다. 이명박이 그토록 추진하고 싶어 하는 대운하가 국민의 인정과 지지를 받으며 순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국민과 서슴없이 토론하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 비전이 하잘 것 없다고 보여질 때는 과감히 '포기' 할 줄 아는 미덕도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정조와 이명박의 '차이점' 만큼이나 조선 최대의 건설 정책이었던 '수원 화성' 과 대한민국 최대의 건설 정책인 '대운하' 는 참 많이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바깥에서의 '역습', 천주교와 광우병.
정조 시대의 '정치적 혼란' 은 내부에서도 계속됐지만 바깥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바로 '천주교' 의 유입이 그것인데 왕조 국가였던 조선에 있어서 천주교의 유입은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악질 중 악질이었다. 노론은 천주교 사건을 빌미삼아 천주교를 많이 믿고 있던 남인 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려는 정치적 음모를 세웠고 정조는 이런 정치적 움직임 속에서 꼼짝없이 '천주교' 에 발목을 잡혀버리는 형국이 되었다.
이명박은 또 어떤가. 이명박의 위기는 친박 계열과의 권력 투쟁 속에서도 비롯됐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광우병' 유입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때 80% 의 지지율을 기록했던 이명박은 광우병 파동과 함께 20%대의 지지율로 내려앉았고 정부 여당인 한나라당 역시 50%대의 지지율에서 30%대의 지지율의 정당으로 폭락했다. 취임 2개월 동안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광우병 만큼 이명박의 발목을 잡은 사건도 드물다.
질병보다 무서운 '천주교 사건' 과 진짜 무서운 질병인 '광우병 파동' 은 정조나 이명박이 의도한 것 이라기보다는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정치적 역습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정조는 어떻게 천주교 사건을 해결했을까. 재밌게도 정조는 천주교 사건을 '문체반정' 을 통해 노론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남인들 뿐 아니라 대다수의 천주교인까지 보호하는 정치적 유려함을 선보였다.
"천주교가 날뛰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바로 잘못된 문제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문체는 누구 때문이냐. 바로 너희 노론 때문이 아니냐." 는 것이 바로 정조의 논리였고 이 논리에 노론은 뒷통수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정조는 천주교 사건을 문체반정으로 극복하면서 오히려 조선의 문화를 다문화, 다양화, 개별화 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전략은 정조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동시에 사회 혼란을 안정시키는 명군다운 해결책이었다.
그렇다면 이명박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바깥에서의 역습' 을 당한 것은 이명박이나 정조나 마찬가지지만 이명박은 '광우병 파동' 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촛불 집회에 나간 청소년들을 핍박하는 정치적 행패부터 시작해 제대로 된 해명도, 확실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정신 없어하는 정부의 모습은 광우병 파동보다 더욱 어둡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진짜 '리더쉽' 은 바로 위기 속에서 발휘된다. 정조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을 통해 조선 최고의 명군임을 스스로 입증했지만 이명박은 여전히 안개 속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봤던 이명박의 '불도저' 리더십은 지금쯤 나사 하나가 빠진 '망가진' 불도저로 변모해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명박의 시대에 '정조' 를 논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명박과 정조는 닮은 것만큼 참 많이 다르다. 정조의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명박의 시대 역시 혼란스럽다. 정조의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명박의 시대도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고 있다. 그러나 정조는 그 혼란과 변화의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비전을 관철하는 것을 통해 조선의 미래와 희망을 제시했다. 정조에 비교해 봤을 때, 지금 이명박은 어디로 가고 있나.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명박이 '실패한 대통령' 이 되길 바라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조의 성공이 곧 조선의 성공이었듯, 이명박 정부의 성공이 대한민국의 성공임을 우리 국민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이명박의 시대에 '정조' 의 업적과 발자취를 살펴보며 새삼 이명박 정부가 지금의 위기를 뚫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과연 이명박은 끝끝내 '정조' 와 같은 명군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아직은 먼 나라 꿈같은 이야기지만 이명박이 결국은 '성공한 대통령' 으로 반드시 남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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