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무소유’까지도 ‘소유’ 않고 열반 한겨레 | 입력 2010.03.11
폐암 투병하다 입적…"일체의 장례의식 말라" 유언 "머리맡 책 신문배달원에게…내 저서 더 찍지 말라"
산문집 < 무소유 > 의 작가로 친숙한 법정 스님이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살. 세수 78살.
지난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제주도 서귀포 등에서 요양해오다 최근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온 법정 스님은 이날 열반 직전 길상사로 옮겨졌다.
한국 불교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고를 거쳐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다 1956년 당대의 고승인 효봉 스님을 은사로 비구가 됐으며, < 불교신문 >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낸 뒤 1970년대 이후 조계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직접 지어 홀로 살았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 씨알의 소리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도록 활기를 불어넣었고, 1970년대에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마음과 삶을 맑히는 운동을 펼치며, 고독한 수행 생활을 해왔다. 1997년엔 서울 성북동에 길상사를 창건했고 2005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내려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가끔씩 길상사에서 법문을 해왔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법정스님은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저서에서 약속한 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아울러 법정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법정 스님은 맑고 정갈한 필치의 산문인 < 무소유 > < 오두막 편지 >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 산방한담 > < 텅빈 충만 > < 아름다운 마무리 > < 일기일회 > <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등의 책을 남겼다. 법정스님은 평소에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이에따라 조계종과 송광사, 길상사 등은 이런유지를 받들어 별도의 공식적인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기로 했으며, 다비식 이외 일체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않기로 했다. 또 조화나 부의금도 접수하지 않기로 했으며 조문객을 위해 길상사와 송광사, 스님이 17년간 머물렀던 송광사 불일암 등 3곳에 간소한 분향소만 마련했다. 다비식은 13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 송광사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1932년 10월 8일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 출가 ▲1956년 7월 15일 = 효봉 선사를 은사로 사미계 수계 ▲1959년 3월 15일 =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 15일 =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 졸업,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60∼1961년 =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 ▲1967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3년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 참여▲1975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충격, 송광사 불일암으로 돌아감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85년 경전공부 모임 법사 ▲1987∼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위원회 발족 ▲1993년 10월 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 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199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기념 첫 대중법문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하며 지부 발족 ▲1995년 김영한(법명 길상화)씨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조계종에 등록 ▲1997년 1월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취임 ▲1997년 12월 14일 대법사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바꾸고 창건 법회 ▲1998년 2월 24일 명동성당 축석 100돌 기념 초청 강연 ▲2003년 10월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강연, 파리 길상사 개원 10주년 기념 법문 ▲2003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서울=연합뉴스)
'법정 스님은 누구인가-이 시대의 연꽃과 같은 영혼의 스승'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메아리를 뜻한다.’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가꾸는데 앞장 선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를 결심했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출가에 대한 스님의 변이다.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하셨다. 그 뒤 스님은 <불교사전> 편찬 작업,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 초반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의 전신)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내셨다. 1972년 첫 에세이 집 <영혼의 모음>을 동서문화원에서 출판,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1973년 6월에는 함석헌이 주도했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합세하면서 씨알의 소리에 큰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스님은 또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기관원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가 괴롭혔다.
“피해자 처지에서 군사독재 당사자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핍박을 받는 처지였음에도 당시의 심정을 스님은 이렇게 회고하셨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위기에 봉착하자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조작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된다. 이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하였다. 그러자 독재 정권은 또다시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또 다시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그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여덟 사람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는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만든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법정 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산으로 들어가신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님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무엇 때문에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75년 10월 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 가셨다.
부도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 스님은 토굴을 다시 짓고 홀로 있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수행하듯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쓰셨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바로 34년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무소유>이다.
1984년 스님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다. 4박 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이 1,080배를 하게 하고, 윤좌 모임을 열어 참선 실수실참을 하게끔 매년 여름 실시되던 여름 선 수련회 기틀을 잡았다. 매년 7월과 8월, 불과 두 달간 열리는 수련회 연 참가 인원은 평균 500여 명으로 불자는 물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큰 호응을 받았다. 송광사 수련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뒤 웬만한 큰 사찰들은 거의 여름철 선 수련회를 실시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어느 날 스님은 다시 한 번 버리고 떠나신다. 17년 간이나 살았던 정든 불일암을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 등쌀에 그조차 뒤로 하시고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드셨다. 1992년 일이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사실과 마주선다. 나라 지도자가 신앙하는 종교에 앞서 충성하려는 너무나 얄팍한 몇몇 사람 처사였음을 접한 스님은 아연실색하셨다. 그 어이없는 심정을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로 발표하신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시게 된다. 날로 각박해져만 가고 메말라만 가는 우리 심성을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자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신 것이다. 주변 친지들의 권유와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작은 역할이나마 하시겠다며 1993년 8월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 시키고 1994년 1월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하며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스님 최조의 대중 강연을 하시며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뜻을 함께 하겠다는 회원들을 오늘까지 17년 째 이끌어 주고 계시다.
한편 법정 스님이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고 김영한) 보살이 성북동 대원각 터 7천여 평을 스님께 시주함에 따라 1997년 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인 길상사가 개산되었다.
법정 스님의 이와 같은 발자취에 따라 오늘날 대중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하는 스님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는 불교계의 어른 스님으로, 주옥같은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온 국민의 스승으로, 한평생 청정하고 올곧게 수행하며 대중들 영혼을 맑히는 이 시대의 큰 스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처럼 법정 스님하면 떠올리게 되는 용어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 낱말은 무소유다.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하셨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 이래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은둔하는 삶을 사셨다. 수많은 상좌와 지인들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하셨다. 이렇게 맑은 삶을 스님은 주옥같은 산문으로 풀어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셨다.
무엇보다 스님의 간결하면서도 쉬움 말씀은 일반 독자들이 불교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데 큰 발자국을 남기셨다. 1976년 범우사에서 펴낸 <무소유>는 초판 발행 한 뒤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명 에세이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밖에 <산에는 꽃이 피네>, <일기일회> 들은 수십만 독자가 찾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법정과 김 추기경, 종교벽 넘은 교류 '감동'
법정(法頂·78)스님이 11일 입적했다. 지난해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데 이어 또 한명의 종교계 거목이 별세하자 허전함과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사회에 '어른'으로 존경받아온 두 종교인은 생전 종교의 벽을 허물고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 큰 감동을 안겼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7년 12월14일 법정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개원법회에 김 추기경이 방문해 축사했다. 이에대한 화답으로 법정스님은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강론을 하기도 했다.
98년 2월24일 명동성당 연단에 선 법정스님은 "김추기경의 넓은 도량에 보답하기 위해 찾아왔다"며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인연’과 ‘천주님의 뜻’에 감사한다"고 말문을 열어 신도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김 추기경이 선종하자 법정스님은 한 매체에 추모사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를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 "가슴이 먹먹하고 망연자실해졌다"며 길상사 개원에 자신의 초청을 받아들였던 일을 추억했다.
"첫 만남의 자리에서도 농담과 유머로써 종교간의 벽, 개인간의 거리를 금방 허물어뜨렸다. 그 인간애와 감사함이 늘 내 마음속에 일렁이고 있다. 그리고 또 어느 해인가는 부처님오신날이 되었는데, 소식도 없이 갑자기 절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나와 나란히 앉아 연등 아래서 함께 음악회를 즐기기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또 "인간의 추구는 영적인 온전함에 있다. 우리가 늘 기도하고 참회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깨어지고 부서진 영혼을 다시 온전한 하나로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다"며 수도자로서의 공감을 표시했다.
법정스님을 이 글 말미에 "지금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오래도록 살아 계실 것이다. 위대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썼다.
법정스님은 천주교 수녀원과 수도원에서도 자주 강연했고,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 제작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때문에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이 탄생했다는 후문이다.
㈔맑고향기롭게는 네티즌들이 가려 뽑은 스님의 주요 어록을 공개하며 스님을 추모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산방한담' 중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중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례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1997년 12월14일 '길상사 창건 법문' 중
lovelypsyche@newsis.com
이해인 수녀, 법정스님 추모글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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