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앞장섰고, 1966년 삼성재벌 계열의 한국비료에서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을 '밀수왕초'라고 규탄하다 투옥되었으며,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다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만큼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을 시켜서는 안될 사람" 이라고 박정희에 대해 대통령자격 불가론을 펼쳤던 사람이었다.
생전에 박정희는 눈엣 가시였던 장준하의『思想界』를 세무사찰 등으로 탄압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중출마, 당선하여 언론인이 아닌 정치인으로 박정희와 대결하였다. 특히 장준하는 1973년 12월 24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서명자가 10일만에 30만 명을 돌파함으로써 박정희와의 투쟁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긴급조치 선포 1주일만인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첫 위반자로 수고되어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형집행정지 중이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계곡"에서 57세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독립군정 진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사망하기 전 어느 해 8월 15일, 기관원에 연행되었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여 비통한 심경으로 후진들에게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고 한다. "광복군 장교였던 내가, 조국광복을 위해 중국땅 수천리를 맨 발로 헤맨 내가, 오늘날 광복이 되었다고 하는 조국에서, 그것도 광복절날 끌려다녀야 하는가?" 장준하의 이 말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대통령과 연결시켜보면 분노가 섞인 것일 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잘못 전개돼온 우리 현대사의 오류와 모순을 개탄하는 순열한 민족주의자의 독백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렇듯 박정희의 정신적·이념적 그리고 '근원적'인 적수 장준하는 산계곡에서 사체로 변한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은 장준하 사인의 의혹을 증폭시키기 충분하고, 대부분의 지각있는 사람들은 타살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사망하기 전 그의 행동거지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신변정리를 한 것이다. 소중히 간직해온 임시 정부 청사에 걸었던 태극기를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하고, 32년만에 부인과 갑자기 천주교 혼례의식을 치르고, 선친과 김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며 맨손으로 벌초하고, 김대중·홍남순씨 등 재야지도자들과 은밀히 접촉했다. 이같은 행동을 보아 3·1 구국선언과 같은 유신체제를 겨냥하는 모종의 '거사'를 준비했던 것 같다. 결국 그의 심상치 않은 거동이 정보기관의 촉수에 걸리게 되고, 약사봉의 참사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사고 당시 검찰측 검시와는 별도로 가족들의 요청으로 고인의 시체를 검안했던 조철구씨가 검시 후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협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도 권력개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장준하의 의문사가 있은 지 4년 후 박정희도 심복 김재규의 저격으로 62세의 생애를 마감한다. 두 사람은 식민지 시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 이래 30년 동안 분단 - 독재 - 민주항쟁으로 뒤범벅이 된 현대사의 정점에서 치열한 갈등과 대립을 벌였다. 둘은 '현대사의 오류'가 빚은 산물일지 모른다. 우리 현대사가 더 이상 대립과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냉혹한 권력주의자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더불어 의문사를 당한 순절한 민족주의자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이 서둘러져야 할 것이다.
<사건의 주요 일지와 의문점>
사망 직후 소개된 장준하 선생 사망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해방 전에는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후에는 언론과 정치인으로 나라만을 걱정하던 장준하씨는 아직도 한창 일할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등반사고로 너무나 허망하게 일생을 끝막았다.
장씨는 17일 오전 8시 반 평소 함께 등산을 하던 호림산악회(회장 김용덕·47) 회원 40여명과 서울 운동장 앞에 모여 버스편으로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등산을 위해 떠나 이날 오전 11시 반 경 도평리에 도착, 약사봉 중턱까지 올라갔다. 장씨는 회원들이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여장을 푸는 사이 김용환씨와 함께 약사봉 정상쪽으로 2시간 가량 오르다 산세가 험해 중도에서 하산하기 시작했다.
30분 가량 내려왔을 때 장씨는 경사가 급해 소나무 가지를 잡고 바위에 발을 딛다 나뭇가지가 휘청거리면서 미끄러져 15m 아래 벼랑으로 떨어졌다. 김씨는 급히 내려와 회원들에게 알리는 한편 인근 군부대 군의관에게 부탁, 진료를 받게 했으나 사고 1시간 뒤인 오후 2시 반 경 뇌진탕으로 숨졌다.
김씨에 따르면 장씨는 이날 일행이 점심을 먹고 함께 올라가자고 말했으나 그대로 혼자 올라가기에 김씨가 뒤따라 올라갔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후략) (동아일보 1975.8.18)
당시 동아일보는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관련해 의문점을 제기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의해 더 이상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흘러왔던 것이다.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
경찰에서 실족사고로 처리된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이 있어 현지 검찰이 장씨의 사인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 18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는 현장을 둘러보고 포천경찰서에서 조사 보고해온 장씨의 사인에 몇가지 의문점이 있어 함께 등산갔다 사고현장을 혼자 목격했다는 김용환씨(41·중학강사·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38)를 불러 자세한 경위를 듣고 19일 김씨를 다시 소환했다.
검찰을 장씨의 사인에 의문이 있다고 보는 점은, ①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길이 15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씨 혼자서 아무런 장비없이 내려오려 한 점, ②사고현장 벼랑 위를 오를 때는 멀리 등산 코스를 돌아 올라갔는데 내려올때는 등산 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③사고 직후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던 점 등이다.
검찰은 특히 김씨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는 점에 대해 "사고후 신고나 인명구조가 더 급한데 그 바쁜 시간에 장씨의 시계는 왜 풀어서 찼느냐"고 김씨를 추궁, 김씨는 "자신이 장씨의 곁을 떠난 사이 다른 등산가 등이 장씨의 시계를 훔쳐갈까봐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김씨가 65년부터 3년 동안 신민당 서울 제4지구당 총무로 있었는데, 사고 당일 등산길 버스 안에서 장씨와 우연히 만났다고 진술한 점과, 김씨가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군부대에 신고한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①장씨의 가족들이 사인에 대해 별다른 이의가 없고, ②유일한 목격자인 김씨가 실족 추락을 강력히 주장하고, ③장씨가 잡았다는 소나무가 휘어져 있는 점 등을 들어 실족 추락사고로 보고 있다며, 다만 의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재조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1975. 8.19)
사건 일지
1975년 8월 17일 사건 당일 (시간은 추정시간임)
오전 6시경 자택출발
함석헌 선생 자택 방문. 함선생은 등산만류 (이소선 증언)
상봉동에서 호암산악회(회장 김용덕) 산행버스 승차 (동행자 40여명, 이중 20% 정도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음)
오전 11시경 약사봉 계곡입구 도착
오전 12시경 계곡 끝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여장을 푸는 사이 장선생이 혼자 정상쪽으로 올라감 (김용덕 증언)
오전 12시 10분 뒤따라 온 김용한이 군인들과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장선생을 만나 같이 등반시작
오전 12시 40분 ∼ 오후 1시 장선생과 김용환은 함께 정상을 거쳐 조금 내려온 지점에서 점심식사 (김용환 증언)
오후 1시 20분경 벼랑쪽으로 하산하다가 장선생이 소나무를 잡고 바위에 발을 딛는 순간 가지가 휘청거리면서 미끄러져 14m 벼랑 아래로 추락 (김용환 증언)
오후 1시 50분경 김용환은 내려와 회원들에게 사고 소식을 전달
오후 2시 10분경 김용덕, 김희로, 김응식, 김영봉, 박사범(사범은 이름이 아님) 등이 사고장소에 도착하여 장선생의 사망을 확인함
오후 3시경 가족들 익명의 전화로 사고소식 들음
오후 3시 30분경 일행 철수시작
오후 5시경 김희로의 연락을 받고 인근 군부대 유지현 중위가 위생병 1인과 같이 도착
오후 6시경 김응식의 연락을 받고 이동파출소 이수근 순경이 이동면 제중의원 의사인 이종헌을 데리고 현장 도착
오후 7시경 미망인 김희숙 여사 현장 도착
1975년 8월 18일
새벽 1시경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 심외과 원장 심구복씨와 함께 현장도착, 촉진위주의 결과 결정적 사인은 우측 후두부 함몰골절이라는 소견제시
1975년 8월 19일 오후
서울지검 및 김채현 차장검사, 일부 신문이 장준하씨의 사인에 의혹이 있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보도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발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가 목격자가 김용환씨를 다시 부른 것은 통상적인 수사의 일환이라고 주장
검찰조사 결과
- 장씨가 잡았다가 놓았다는 소나무가 휘어진 채로 있었고
- 의정부시 심외과 원장 심구복씨가 시체를 검안한 결과 추락에 의한 두개골 파열사로 진단했으며
- 현장에 나왔던 가족들도 추락사로 인정, 자세한 검안을 위해 장씨의 옷을 벗기려 할 때 만류한 점을 들어 장씨의 사망의혹은 없다고 보도 단순 실족사로 결론
1975년 8월 21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영결식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 나자렛 묘지에 안장
사인에 관한 의문점1
① 장준하 선생 사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직경 2cm, 중앙부에 홈에 있는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가격하여 생긴 후두부 함몰상으로 추정됨 (문국진 박사, 조철구 박사)
② 오른쪽 팔과 엉덩이의 의문의 주사자국은 보통 주사자국보다 크게 확장된 것으로서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주사한 경우에 해당되며, 마취주사후 선생의 몸을 고정시킨 뒤 후두부 급소부위를 강타했을 가능성이 높음 (문국진, 조철구 박사)
사고현장에 관한 문제점
① 김용환씨의 증언에 따르면, 추락지점에서 돌무덤이 아닌 고운 모래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현장답사 결과 사고현장은 견치석(모난돌)이었으며, 높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물체가 정지하기 어려움 곳임 (당 조사위원회의 현장답사 및 사건 1주일 후의 추모등반에서 확인)
② 현장답사 결과 김용환씨는 등반을 개시한 산 입구, 장선생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는 바위,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했음 (2차 답사)
③ 김용환씨가 지적한 야산입구에 도달해 본 결과, 그곳에는 약사봉에 이르는 등산로가 없었고, 조금 올라가서 2명의 군인과 만난 지점에서 보았다는 개울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음 (2차 답사)
④ 김용환씨는 2개의 작은 능선을 넘어서 계곡을 건너뛰었다고 증언했는데, 현장에서는 그러한 지형지물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하산한 결과 엉뚱하게도 약사계곡 유원지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음 (2차 답사)
⑤ 사고현장에서 김용환씨는 지금까지 알려진 추락지점보다 훨씬 높은 곳(고도계로 측정결과 약 75m 높이)을 지정, 그 곳에 올라가 본 결과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이었으며, 만약 그곳에서 추락하였다면 장선생의 시체가 많은 손상을 입었을 것이 경험측상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도 없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는 것은 추락사로 믿기 어려웠음 (2차, 3차 답사)
⑥ 검찰조사 결과 장선생이 잡았다가 놓쳤다는 소나무가 휘어진 상태로 있었다고 발표했으나, 김용환씨는 소나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진술함 (면담조사 및 2차 답사)
사고 당시 해소되지 않은 기타 문제점
① 김용환씨에게 평소 존경하던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일생의 충격적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호흡시의 장선생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며, 사고당시의 상황을 자기체험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가능성' 운운하면서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처럼 진술하는 등 목격자라고 하기 어려운 점이 많음 (면담조사 및 2차 답사)
② 김용환씨가 사건 10일 전에야 겨우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해제되어 등산로는 없는 8월의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장선생을 만날 수 있었는지는 의문임 (2차, 3차 답사)
③ 김용환씨는 당시 장선생을 뒤쫓아가 등반을 개시했다는 지점 주위에 집이나 논밭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당시 군인가족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지금보다 집이 많았으며, 논밭의 경우도 30여년 전부터 경작해 온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주변정황에 대한 김씨의 설명이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음 (2차 답사)
④ 김용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추락시에 장선생이 배낭을 메고 있었다는데 장선생의 안경과 지참한 보온병이 깨지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음 (사건 1주일 후 추모등반 때 제기)
⑤ 추락시 소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잡았다면 손바닥 안쪽에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상처가 없었고, 손바닥 상단에만 엎어질 때 생긴 것으로 보이는 멍이 발견되었음 (조철구 박사 증언)
⑥ 새벽 1시에 현장에 가서 임시방편으로 후래시를 들고 현장을 점검했던 검찰이 낮에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을 대동 현장검증을 실시하지 않았음 (서돈양 당시 의정부지청 검사 면답조사)
⑦ 사건발생 1주일 후 현장을 답사하고 사건 진실을 밝히려고 하던 당시 동아방송 송석형 기자는 부장으로부터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취재를 중단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음 (송석형 당시 동아방송 기자 면답조사)
⑧ 가족들이 오후 3시경 익명의 전화로 사고소식을 들었고, 동아일보사서도 거의 같은 시간에 취재기자를 수소문하고 있었다는데, 당시 산에는 전화가 없었고 인가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현장에 있던 사람이 그 시각에 연락하는 것은 불가능함 (가족들과 장봉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증언)
⑨ 장남 호권씨는 사고 직전 청와대 고위관계자로부터 몸조심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함 (장선생의 장남 호권씨의 증언)
장선생의 사망원인에 대해서 일부 관계자들이 사실과 다르게 선생이 술을 먹고 다른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계곡으로 뛰어내리다가 실족 추락사했다고 조작하여 이를 현장에서 유포시키고, 이 조작한 내용을 당시 현장에서 들은 위생병의 진술과 선우연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진술이 거의 유사한데도 불구하고, 검찰에서 그 진위를 가려내지 않았음 (실족 추락사라는 시나리오를 유포시킬 계획이 사전에 결정되었을 가능성 - SBS 제기)
당시 인근 군부대 수사과에 근무했던 오영씨는 사건 당일 밤 11시경에 현장에 도착, 첫 보고는 실족사로 올리고 다음날 추가로 현장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상부의 명령으로 수사종결 (SBS에서 오영씨 증언)
김용환씨가 목격했다는 군인 2명에 대한 조사여부와 조사결과에 대해서 밝혀진 바 없음 (사건 1주일 후 추모등반 때 제기)
장선생의 사망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기사 작성자인 당시 동아일보 장봉진 기자를 검찰에 연행하고, 편집자인 성낙오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고도, 긴급조치 사상 처음으로 기소유예 석방한 것은 사건의 원인규명을 차단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높음
그러나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작업은 매우 힘든 작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지난 1988년의 재수사(의정부지청)때는 “타살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고, 1993년 민주당의 사인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고인의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의문을 제기하는 등의 수준에서 조사를 종결했었다. 마찬가지로 양식있는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활동시한의 종결되는 관계로 고 장준하씨의 죽음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 그것이다.
이번 의문사위의 ‘규명 불능’ 결정으로 고인의 죽음은 다시 미궁으로 빠졌다. 하지만 지난 1년8개월에 걸친 위원회의 조사는 의문점의 윤곽을 구체화시키는 데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인 듯하다.
당시의 중앙정보부는 고인의 죽음 직전과 직후에 바싹 다가와 있었음이 위원회 조사 결과 밝혀졌던 것이 그것인데, 중정은 75년 3월31일‘위태분자 관찰계획’을 수립하고, 고인의 일일동향을 파악하고 감청해온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밖에도 위원회가 밝혀낸 의문점은 많다. 동행자 김씨가 사고직후 포천경찰서, 의정부지청 등을 옮겨다니며 조사를 받는 동안, 간단한 인적사항 만을 기록하는 등 사실상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중요한 의문점이다. 그러나 당시 경찰 수사지휘 계통의 직원들이 모두 숨져 이 부분은 더 이상 조사할 수 없다고 위원회 관계자는 밝혔다.
또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했던 이동파출소 순경 이아무개씨가 포천경찰서가 아니라 경기도경의 출동지시를 받은 점, 그리고 사고 발생시간이 오후 2시 30분인데 2시부터 3시 사이에 고인의 가족들에게 "사고가 났으니 현장으로 가보라"는 발신자 불명의 전화가 걸려온 점도 의문점이다.
장준하씨는 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등반하다가 12m아래 절벽으로 추락해, 실족사한 것으로 당시 경찰은 발표했으나 추락사체에 두부함몰상 이외에는 아무런 외상이 없었으며, 안경과 보온병 등에 긁힌 자국도 없었고, 당시 정보기관들이 장씨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의문점으로 제기되어 있었다. 장씨는 숨지기 직전인 73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월유신에 반대해 통일당을 창당했고, 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돼 같은 해 12월 형 집행정지로 출감했었다.
의문사위의 규명불능 결정은 의문의 윤곽으로 접근하면서 더욱 많은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이 갖는 역사적 의미>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1972년 10월 박대통령이 유신을 단행하여 국가권력을 집중, 대통령이 모든 국가권력 위에 군림하는 통치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사회영역 전반에 걸쳐 관료적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1973년 8월에는 유신에 반대하던 김대중씨를 납치·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1975년 4월에는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려 군대를 학교에 진주시킴으로써 학생들의 민주화요구를 완전히 차단하는등 박정희 개인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일체의 개인·집단·계층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최대의 강압·물리적 폭력을 자행하는 등 극단적인 국가테러 시대였으며,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정희의 음모가 노골적으로 행동화되던 시대였다. 독재의 시대,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독재정권에 항거한 실천적 민주주의자, 광복군에 참여 독립운동을 했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민족주의자,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없이 전폭적인 지지와 긍정의 자세를 보인 바와 같이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아온 자주 통일주의자, 진실만을 국민에게 당당하게 전달하고자 한 자유언론인의 종언을 의미했다.
따라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을 진상규명하는 것은 독립운동가요 민주화운동 지도자의 한 분인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언제까지나 의문 속에 묻어놓을 수 없으며, 다시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 의문의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준하 선생 사인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이를 시발로 백범 암살 등 과거 건국 초기의 정치적 암살사건들과 그 후 독재정권하의 각종 의문사에 대한 진상도 명쾌히 밝혀, 은폐되고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고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지음, 「한국현대사 이야기 주머니」, 1993, 62-69p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1983, 313p
김삼웅, 「한국현대사 뒷얘기」, 가람기획, 1995
김동춘 , 「유령을 부르는가」 한겨레신문 (1999.5.16)
민주당,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활동 보고서」(199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 유적지 서울·경인지역 기초조사·발굴작업 보고 서」, 200.12
전대열, 「말따로 몸따로」, 廣越出版社, 1991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peacewave.or.kr/
노동배의 홈페이지 돌베개 http://home.taegu.net/~roh0815/home.htm
동아일보, 한국일보, 한겨레신문 등
민주당 장준하선생사인규명조사위원회(위원장 한광옥), 1993에서 발췌
누리집 국사사랑 http://ji2000.hihome.com/pchang/3.htm
<참조 기사>
張俊河씨 별세 享年56세
등산갔다 실족… 뇌진탕으로
사상계 사장이었으며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장준하씨가 17일 오후 2시반경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에 등반갔다가 실족, 뇌진탕으로 별세했다. 향년 56세. 장씨는 사상계 잡지를 내면서 62년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막사이사이 언론문화부문상을 탔고, 7대국회 때엔 신민당 후보로 동대문을구에서 출마, 옥중당선 됐었다. 그는 통일당 창당과 함께 당적으로 옮겨 통일당최고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신민당과 통일당의 합당을 촉진하기 위해 통일당을 탈당, 근래엔 당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장씨는 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2월 3일 형집행정지로 출감했었다.(1975.년 8월 19일, 화요일,조선일보 1면)
萬物相
광복군 장교였던 장준하씨가 임정 요인의 귀국교섭을 위해 이범석, 김준엽씨 등과 고국강토에 발을 디딘 것은 1945년 8월 18일 이었다. 하필이면 그가 30년후의 이 감격적인 날 바로 그 전야에 유명을 달리해야 했던지 모를일이다. 이날 동지끼리 술을 나누자고 약속했다던데 영전에 술을 따라 바치는 유명(幽明)의 술자리가 되고만 것이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임정요원들을 모시고 고국땅에 내리자 환영인파도 없이 장갑차에 태워 불투명한 셀룰로이드 창밖으로 고국을 대했던 일을 못내 섭섭해했던 고인은 임정요인이 정부국무위원으로서가 아니라 망명투사라는 개인자격으로 돌아왔던 일을 두고 그의 인생의 실족이 시작되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끝내 실족으로 운명하고만 것이다. 옛선조들이 취산(醉山)한다 함은 재야에 묻혀 청빈하게 산다는 뜻이요 요즈음 등산용어로 취산이란 여름산의 직사광, 기하급수로 느는 자외선, 풍압에 의한 산소희박등의 복합 스트레스가 몰아온 운동 능력의 쇠퇴를 뜻하며 실족의 가장 잦은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때마침 고인이 등반했을 때는 태풍의 영향아래 풍압이 컸고 올들어 최고기온이란 여건이 취산현상을 일으키게 했음직하다. 그현상은 발의 순발적인 힘을 나타내는 뛰기의 정확성을 쇠퇴시키고 안쪽발로 서있을 수 있는 균형력을 현격하게 감퇴시키며, 주의력이나 정신력 집중테스트에서도 그 감퇴가 입증되고 있다. 실족한다는 것은 발을 잘못 디뎌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같은 여름산의 자연현상이 복합되어 일어나기에 순응력없는 고산산행이나 여름산행에는 무리가 배제돼야 한다. 고전적 취산을 하다가 현대적 취산으로 숨져간 고인은 숱한 옛 취산 선비의 유풍인 기골과 청빈만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틀전인 광복절에 김구, 이범석등 그가 따랐던 임정시 정부의 태극기, 바로 그 앞에서 윤봉길의사 등이 맹세를 했던 그 태극기를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 그의 구국인생의 상징적 마무리가 된 것이다. 그가 숨진 약사봉의 약사관음은 그의 넋을 길이 달래줄 것이다.(1975년 8월 19일, 화요일, 조선일보 1면, 만물상)
나뭇가지 휘청… 미끄러져 별세한 장준하씨, 빈소에 조문객 맞아
장준하씨는 어처구니 없는 등반사고로 세상을 끝마쳤다. 장씨는 이날 오전 6시 자택을 나서 8시 30분쯤 평소 함께 등산하던 虎林산악회(회장 金容德·47) 회원 45명과 서울운동장에 모여 관광버스편으로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등산을 떠나 오전 11시 30분쯤 약사봉 중턱까지 올라갔다. 장씨는 회원들이 이곳에서 여장을 푸는 사이 회원인 金龍煥씨(41·동대문구 이문동) 와 함께 약사봉 정상쪽으로 1시간 가량 오르다 경사가 급해 소나무가지를 잡고 바위에 발을 딛는 순간 나뭇가지가 휘청거리면서 미끄러져 11m 벼랑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오후 2시쯤 혼자 내려와 회원들에게 사고 소식을 알리는 한편 인근 군부대에 연락 군의관에게 진료를 받게 했으나 장씨는 사고 2시간쯤 뒤인 오후 2시쯤 뇌진탕으로 숨졌다는 것. 장씨의 유해는 비보를 듣고 17일 오후 6시쯤 현장에 달려갔던 미망인 김희숙여사(46)와 장남 豪權씨(27) 등 가족들에 의해 동대문구 상봉동 114의 35호 전세집으로 운구되어 18일 오전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됐다. 장씨의 별세소식이 전해지자 咸錫憲(함석헌), 梁好民(양호민), 金俊燁(김준엽), 桂勳悌(계훈제)씨 등 친지들은 17일 저녁 장씨집을 찾아 밤을 새우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고 18일에는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와 민주통일당 梁一東(양일동) 당수, 신민당 高興門(고흥문)부총재, 金玉吉(김옥길)이대총장, 鄭一亨(정일형)의원, 金東吉(김동길)교수, 金燦國(김찬국)교수 등 1백여명이 빈소를 다녀갔고, 외유중인 김영삼총재등 20여명이 조화를 보내왔다. (1975년 8월 19일, 화요일, 조선일보 7면)
故장준하씨 영결식
어제 명동성당서 천오백명 모여
고 장준하 선생의 영결미사가 21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미망인 김희숙여사와 3남2녀등 유가족과 白樂濬(백낙준), 兪鎭午(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朴順天(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金弘壹(김홍일), 김준엽, 김동길, 천관우, 양호민씨와 평소 고인을 따르던 시민 등 천오백여명이 참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도미사를 통해 『선생의 나라사랑, 겨레사랑은 깊고 진실했다.』고 말하고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고 죽어서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갈길을 밝혀 줄 것』이라고 고인을 추도했다. 이어 李海榮(이해영)목사의 성경봉독과 문동환, 서남동목사의 추모기도가 있었다. 영결식이 끝난뒤 유해는 곧 장지인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 나자렛 묘지에 안장됐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8시 쯤 서울 동대문구 상봉동 114의 35 고인의 자택에서 가족 영결미사가 있었다.(1975년 8월 22일, 금요일, 조선일보 7면)
오늘의 헌법 (유신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
“오늘의 헌법 (유신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이에 우리 국민은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1973년 12월 23일 상오 10시 서울 YMCA회관 회의실. 통일당 張俊河 최고위원이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수십 명의 보도진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咸錫憲·白樂濬·金壽煥·白基玩·桂勳梯·兪鎭午씨 등 각계 지도급 인사 3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 간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張俊河 선생은 白基玩씨와 더불어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다.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광복군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張俊河선생. 그는 정부수립 이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골짜기에서 불귀의 객이 될 때까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 5·16쿠데타 때까지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무기로, 그 이후에는 직접 몸을 던져 독재와 싸웠다. 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 (78)은 張俊河 선생을 ‘애국자·혁명가·인격자이며 권모술수와 배금주의를 배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서러워했다. 金이사장은 자서전 '長征(장정)'에서 그를 “광복군 때부터 평생 연인처럼 고락을 함께한 사람”으로 쓸 만큼 그와 평생지기이다. ‘사상계’를 빼놓고는 그의 반독재투쟁사를 말하기 어렵다. 그의 손아래 동서로 사상계에서 편집부장을 지낸 劉庚煥씨(61· 전 문화일보 논설실장)는 “張俊河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신앙에 가까운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 사상계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오히려 반독재 정론지로서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 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 ’란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 58년 12월 자유당 정권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개악 시켜 통과시킨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張俊河 선생은 61년 7월호에 실린 咸錫憲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목의 글로 중앙정보부장 앞에 불려가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빨리 민정이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 또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밀수왕초’, ‘매혈자’등으로 몰아부치고 국가 원수모독죄 등으로 구속된다. 이러한 투쟁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반유신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의 반독재투쟁에 대해 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65)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로 몰아가려는 반통일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했다. 劉庚煥씨는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 반공주의자였다.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朴正熙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쿠데타는 후세에 좋지 않다는 신념으로 朴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회고했다. 張俊河 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은 그가 광복군 대위 시절 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피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피빛으로.
<任昌龍기자> (1998년 8월 7일, 서울신문)
俊河선생 "비극의 수수께끼"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張俊河 선생이 숨져 누워있던 약사봉 골짜기의 이 표석문의 ‘멋 훗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당시 검찰의 ‘추락사’발표는 실로 의혹투성이었다. 그때 徐燉洋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 張俊河 선생은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는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金龍煥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徐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 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날 낮 金龍煥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 이때문에 당시 ‘재야대통령’이라고 불리던 張선생의 사인을 서둘러 추락사로 발표한 의혹을 샀다. “집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를 보니 겨드랑이 밑 양쪽 팔에 피멍이 있었어요. 엉덩이와 팔 두군데 주사기로 찔린 듯한 자국도 있었고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사체가 너무 깨끗했습니다. 순간 양쪽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갔다고 직감했지요” 서울 상봉동 셋집에서 장례 대소사를 떠맡았던 劉庚煥씨의 증언이다. 또 金龍煥씨가 말한 하산코스가 등산장비 없이는 도저히 내려오기 어려운 벼랑이어서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張俊河 선생이 갖고 있던 커피보온병과 끼고 있던 안경이 17m 높이의 벼랑에서 돌밭으로 떨어져 말짱했다는 불가사의한 의혹 등도 나왔다. 劉庚煥씨는 또 “소나무가 휘어진 자국이라며 金龍煥이 말한 부분에 동그랗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휘어져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칼로 벗겨 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1998년 8월 7일, 서울신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장준하 兄의 영전에 안병욱(安秉煜, 崇田大 교수)
兄의 급서의 비보를 듣고 한참동안 망연자실하였습니다. 더구나 여름 등산길에 실족으로 참변을 당하였으니 우리의 슬픔과 놀라움은 비할데가 없습니다. 장兄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너무 홀연히 가셨습니다. 저는 30대 후반기에 처음으로 兄을 뵙고 사상계지의 일원이 되어 자유당 독제정치하에서 자유민주언론의 용감한 기수가 되어 투쟁하는 兄을 도우며 20년동안 막역한 친구의 한사람으로 兄이 살아가시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兄은 정말 용감하였습니다. 천만인이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로매진하는 강직성과 투쟁력을 가지셨습니다. 兄은 너무나 벅찬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제집한간 못쓰고, 가난속에 늘 시달리고, 병으로 고생하고 수차 옥고를 치르면서도 兄의 송죽과 같은 절개와 철석과 같은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兄의 인격, 정신과 생활을 일관하는 근본신조는 세가지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투철한 애국혼입니다. 앞으로 1백번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兄은 한국에 탄생하여 민중의 벗이 되고 동포의 봉사자가 되어 활동하실 것입니다. 나는 많은 애국동지를 보았습니다마는 兄은 정말 나라를 위하여 살신성인하는 실천적 애국자였습니다. 兄의 애국충절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둘째는 놀라운 자유혼입니다. 일제시대에 동경에 가서 신학생으로 공부할 때부터 兄의 자유혼은 싹텄습니다. 중국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고 중경으로 망명, 해방후에는 김구선생의 비서가 되어 활약, 민주언론의 창달을 위하여, 사상계지 발간, 그 후 국회의원으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활약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많은 고초를 겪는 동안 兄의 존재를 밑에서 떠받든 강한 힘은 자유에 대한 불사조와 같은 신념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막사이사이 언론상이 兄에게 수여되었을 때가 兄의 생애 최고의 해였습니다. 자유언론의 기수로서 兄이 한국사회에 끼친 업적은 후대에 길이 남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셋째는 정의혼입니다. 참과 거짓, 의와 불의, 진리와 허상, 시와 비를 준엄하게 가르고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의 신념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兄의 용기와 저항정신은 천하 누구도 兄을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신념이 강하고 용기가 있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장준하 兄이라고 늘 대답하였습니다. 兄은 1년 사시장철 푸르고 싱싱한 상록수의 강인한 기상과 곧은 의지력을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본 군의관 앞에서 한국 청년의 용기와 저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취도 하지 않고 생손을 수술할 때에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버티던 兄의 그 무서운 기개에 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兄의 만년은 가난과 병고와 실의속에서 고독하였습니다. 그 고독한 심정을 홀로 달래기 위하여 산에 자주 오르시면서 호연지기를 길렀습니다. 산을 사랑하던 兄은 산에서 갔습니다. 兄이 가고 나니 우리의 신변은 한층 더 삭막해 집니다. 백옥과 같은 하얀 살결에 밝은 웃음을 띄우시면서 조용조용히 얘기하시던 兄의 인품과 인상은 나의 뇌리에서 죽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兄을 아끼고 따르던 여러 인사들의 가슴속에 장준하 兄의 혼은 불멸의 별이 되어 빛날 것입니다. 兄이 가시니 한국의 강산의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존경하는 장兄, 울면서 이 글을 씁니다. 오직 명복을 빌 따름입니다. (1975년 8월 19일 화요일 조선일보 6면)
張俊河선생 유족들의 생활
"월급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17살때 시집왔다는 張俊河 선생의 미망인 金熙淑여사(71)의 말이다. 사상계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張俊河 선생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남은 것은 20만원짜리 월세방과 쌀 한 됫박뿐이었다고 전해진다.
한 문상객이 미망인의 손을 붙들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거냐"며 울자 망연자실해 있던 金여사는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라고 남의 얘기 하듯 했다고 한다. 白基玩씨는 "문상올 사람들에게 자기 먹을 쌀을 가져오라고 연락을 했었다"며 "당시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전셋집을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지나칠 만큼의 청빈에 대한 그의 결벽증은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사상계에 대한 탄압으로 항상 빚에 쪼들렸던 것도 이유가 됐다. 3남 2녀중 장·차남인 호권·호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세 아들중 호준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한신대를 나와 목사로 있다. 딸들은 이대를 졸업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 각각 살고 있다. "생활이 어렵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金여사는 "그냥 세끼 밥먹고 살만하지요" 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서울신문, 1998년 8월 7일)
출처 :
http://www.demos.or.kr/data/viewbody.html?code=datacenter&dkind=importance&number=3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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