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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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海 한용운
본관은 淸州. 호는 만해 (萬海).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洪城)에서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 (건양 1)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감.
그 뒤 1905년 (광무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가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10년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하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惹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함.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하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써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함.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 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 불교청년회를 청년동맹으로 개칭하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면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관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단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장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으며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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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 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됨.
주요작품으로는 소설 <흑풍>, 장편소설 <박명(薄命)>, 시집 <님의 침묵>과 <조선불교 유신론> <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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