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제1편 상하이
○ 와이탄(外灘)
- 야경이 아름답고 이소룡이 떠오르는 도시, 아픈 역사의 기억을 공유한 도시이자 청년 윤봉길이 폭탄을 던진 도시
- 중국 최대의 경제도시 면적은 서울의 10배 정도, 원래 상하이는 아주 작은 항구 도시였는데 이를 환골탈퇴하게 한 사건은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하자 이후 열강의 강국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고 서양식 건물이 세워지고 상하이의 랜드마크인 동방명주는 1994년 완공된 468m의 방송탑으로 진주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아편전쟁 : 청나라가 아편 밀매를 금지하자 영국이 일으킨 전쟁
- 굴욕적이 역사의 현장이 관광명소가 됐지만 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망명하여 배를 타고 들어온 도시, 우리 땅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던 애국지사들은 경성에서 단동까지 육로로 그리고 단동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상륙했던 것
- 우리나라 최초의 암살시도사건으로 의열단원이었던 김익상이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 후 생환하여 1922년 3월 28일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로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향해 총탄을 발사하고 폭탄을 투척한 사건으로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하려던 사건이자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 결국 김익상은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상하이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쳤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는 사실
※ 의열단 : 1919년 3월 28일 김원봉이 조직한 항일결사단체
○ 신티엔디(新天地)
- 유럽 한복판처럼 느껴지는 관광명소로 프랑스 조계지(치외법권 지역) 일대의 중국 건축물을 개조하여 서양식의 쇼팽과 문화의 거리로 육성한 곳, 영국 영사관 앞 공원은 개와 자전거와 백인을 모시는 하인을 제외한 중국인들의 입장이 불가했음
※ 난징조약 : 1842년 아편전쟁으로 영국과 청나라가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상하이 개항, 홍콩 할양 등, 청이 굴욕적인 협상을 함
- 중국인의 아침 메뉴인 훈툰은 고기와 채소를 섞은 소를 얇은 피로 싸서 끓인 국물요리이고 샤오롱바오는 만두의 한 종류로 만두 안에 국물이 있어 피를 살짝 찢어 국물을 맛본 후 만두를 먹는다는 것
○ 대한제국과 임시정부
-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의 출발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던 역사 깊은 장소이고 60년 만에 다시 복원됐는데 일제의 눈을 피해 프랑스 조계지의 작은 건물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가정집과 사무실의 신세를 졌던 것
-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상하이 도시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한국정부와 국민의 요청으로 1993년 복원 됨
- 임시정부 요원들은 독립의 뜻은 같았지만 방법은 각기 달랐던 것으로 정부수립도 쉽지 않았고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된다. 하지만 전 민족이 함께했던 3.1운동이 그 바탕에 있었기에 하나일 수 있었던 것
① 이동휘 임시정부 국무총리 : 무장투쟁론
②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 외교론
③ 안창호 임시정부 내무총장 : 실력양성론
○ 루쉰공원
- 원래의 이름은 홍커우 공원이었으나 중국의 문호 루쉰을 기념하기 위해 루쉰의 묘와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매헌 윤봉길 기념관이 있는데 이 공원 이디에선가 25살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장소
※ 홍커우 공원 의거 : 1932. 4. 29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진행 중인 일왕 생일 축하 및 전승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진 사건
- <중국인 항일 운동가 쑨커즈 교수 / 푸단대학> 중국 침략 사령관이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당시 중국공사였던 시게미쓰 마모루, 노무라가 모두 이곳에 있었는데 윤봉길 의사는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폭탄을 단상에 투척했습니다. 일본 정예병이 만여 명이 있었고 기마헌병이 15명이 철통같은 경호를 하고 있는 곳에서 14m를 달려가 목표물을 맞였던 것이죠.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결국 죽었고 당시 입고 있었던 복장이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되어 침략군의 사령관이 아닌 전쟁의 영웅으로 희생자로 추앙된 것
※ 야스쿠니 신사 :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숨진 246만여 명을 신격화해 제사를 지내온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
- 김구 선생은 중국 각 지역에 있는 신문사에 장문의 편지를 썼고 다음 날 각 신문사들은 이 편지를 신문에 실었다 “···윤봉길 폭탄 투척사건의 배후는 한인애국단의 영수인 나 김구다···” 일제는 독립 운동가를 잡아들이고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되자 김구가 자신을 밝힌 것
- 일제는 김구를 잡기 위해 60만 위엔(한화 200억원)을 현상금으로 내건다. 임시정부도 김구 선생도 더는 상하이에 머무를 수 없게 되자 미국인 피치 목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 한편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꿔 차고 마지막 길을 떠난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무덤에 찾아와 술을 부어달라고 부탁하고 김구 선생에게 “정말 마땅히 죽어야 할 곳, 의미 있게 죽어야 할 곳을 못 찾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여 그러한 의거를 기획했다고 한다, 찬바람을 뚫고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독립을 꿈꿨던 청년 윤봉길
-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 윤봉길 · 김구는 우리에게 범접하기 힘든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이봉창은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로 노는 것과 술 마시기를 좋아했던 사람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상하이 김구를 찾아와 질문하기를 “왜 일본 천황을 죽이지 못하냐? 저는 지난 31년간 모든 쾌락을 누렸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기회를 주십시오.” 하여 수류탄 2개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선언식을 한다.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봉창의사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곳은 도쿄의 일본경시청 앞
- 결국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거사는 실패하고 이봉창은 교수형을 받지만 한국과 한국인의 저항정신을 세계에 과시하는데 당시 중국의 일간지에는 “애석하게도 거사에 실패”라고 기록하고 한인애국단은 중국인의 지지를 얻고 국민당 장제스는 4억 중국인이 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 상하이 패륵로에는 80여 년 전 윤봉길과 이봉창이 거사를 앞두고 머물렀던 한인애국단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이 살았고 일본의 사건 기록에 나와 있는 집,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라진 게 아니고 아직 우린 싸우고 있다고 폭탄을 들고 몸을 던져 이를 알렸던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 위위안(豫園)
- 상하이 관광 명소로 16세기 중엽 명나라 고위관료인 판위단이 부모를 위해 조성한 저택을 개조한 정원으로 40여 개의 정자와 연못 그리고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는데 아편전쟁 때 영국군에게 약탈당하고 태평천국군의 기지로 쓰이는 등 폐허가 됐다가 관광지로 복원된 것
- 상하이 사범대학 교정에는 뜻밖에 한국과 중국인의 소녀상이 나란히 앉아있어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데 뒤 쪽 팻말에 새겨 있는 문구 “We can forgive, but we can never forget!(용서할 수는 있으나 결코 잊을 수는 없다)"
- <쑤즈량 교수 / 상하이 사범대 중국위안부역사박물관장> 이분들은 10대 때 속아서 중국으로 넘어왔어요. 그때부터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고 중국에서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이러한 불행한 일을 당한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소녀상을 세워 이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일본 정부와 외무성에서 굉장히 반대했지만 그런 압박을 물리쳤고 한국 국민과 역사학자들이 이를 지지하자 중국 정부도 외교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독일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비처럼 일본이 도쿄에 위안부 기념동상을 세운다면 역사의 짐을 덜게 될 것이고 인근 국가들의 양해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루캉 2016. 10. 25>
- 상하이에 위안소로 밝혀진 곳은 현재 170여 곳으로 사진 속에는 한국 · 중국 · 동남아 더 멀리 네덜란드의 소녀들이 있었다. “20세기 이런 수난의 역사, 특히 몇 십만 부녀자들이 일본의 성노예가 된 이런 역사를 우리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쑤즈랑 교수>
- 상하이 홍커우구 둥바오싱루에는 사진 속의 현장이 있다. 이곳에는 상하이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다이(大 一)싸롱이 있다. 집안 곳곳에는 일본이 신성시 하는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어 일본제국주의가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보여주는 현장
○ 상하이 화이하이중로
- 홍콩 영화 속의 뒷골목 같은 복잡한 주택가에는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가 전 요원들이 비밀회의를 하던 곳이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오르면 임시정부요원이자 흥사단원이었던 고 김복형 선생의 손자가 살고 있는 집
-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 요원들이 모두 상하이를 떠나는데 김복형 선생은 대중을 위한 일을 계속하라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 계속 항일을 주장하는 일을 홍보하고 임시정부를 위해 정보 수집하는 일을 계속하다 발각되어 탄압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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