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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과 "최린"
남편 이외의 사람을 잠시 사랑했다는 이유로 촉망 받던 천재화가에서 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행려병자로 죽은 나혜석(1896~1948). 그녀가 남긴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소이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렇지도 않을 한때의 외도. 남편에 대한 사랑이 변치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했던 나혜석을 어찌 비난할 수 있으랴.
그녀는 한국 최고의 여류 서양화가이다. 한말에 군수를 지낸 수원 '나부잣집'의 딸로 태어난 혜석은 진명여학교를 나온 뒤 동경여자 미술전문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뒤 1921년에 경성일보사의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였다. 일제시대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한 번의 특선과 네 번의 입상을 했고, 최고 권위를 갖고 있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했으니 '최초'와 '최고'의 영예를 동시에 누린 화가였다.
동경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여권 옹호론인 '이상적 부인'을 발표한 이래 많은 진보적인 논설을 발표한 선각자였고, 동경 여성 유학생 단체인 '조선여자친목회'를 만들어 동인지 <여자계>도 창간하였다. <폐허>지에 시와 소설도 여러 편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년은 비참함을 넘어 처참하였다. 정신장애와 반신불수의 고통 속에서 서울 원효로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50대 초반의 나이로 홀로 눈을 감았다.
행방불명이 된 지 10년 만에 행려병자가 되어 죽게 된 것은 남편 이외의 남자를 사랑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 유학시절 사랑한 사람이 있긴 했으나 폐병으로 죽었으므로 첫사랑이 흔히 그러하듯 이루어지지 못하고 끝나 버린다. 유학 도중 방학이 되어 들른 서울 집에 오빠의 친구 한 사람이 놀러와 혜석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열렬히 구애한다. 그는 상처한 지 2년이 되는 변호사 김우영이었다. 결혼한 다음해 남편의 도움으로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를 연 이후 혜석은 화가와 문인으로 이름을 날린다.
1927년에는 일본 정부의 외교관 신분이었던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 간 머물면서 야수파 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 연구소에서 수업, <자화상>, <스페인 해수욕장>, <불란서 마을 풍경> 등 야수파 화풍의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비극은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된다. 남편은 그 시절 독일에 체류중이었는데 파리에 와 있던 최린과 혜석이 그 사이에 잠시 염문을 뿌린 것이다.
최린은3.1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천도교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1926년 9월부터 1928년 3월까지 아일랜드 등 구미 30여 개 나라를 유람하고 돌아와 천도교 도령이 되는데, 마침 파리에 들렀을 때 혜석을 만난다. 혜석은 평소 존경하던 분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파리의 유명한 식당과 극장을 안내하면서 객수를 달래 주었고, 뱃놀이도 즐기며 사모의 정을 느끼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정도에서 끝난 것 같다. 나혜석이 최린을 한 때나마 사랑한 것은 사실이었다. 혜석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김우영은 무릎 꿇고 빌지 않는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는 김우영의 주장에 혜석은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이혼은 혜석에게서 4남매만 빼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쌓아올린 모든 사회적 명성을 하루아침에 앗아가 버렸다. 모든 언론은 나혜석을 '화냥년'으로 취급하였고, 단 한 사람도 혜석의 편에 서지 않았다.
나혜석은 홀로 일어섰다. <삼천리>지에 '이혼 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한 것이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 내지 전유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당시 사회의 통념과 관습에 대한 항변은 '우애 결혼, 실험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 땅 여성사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었으나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의 냉대로 문밖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어 절간을 전전하며 살아가다 죽어 무연고자 병동에서 발견된 한 구의 시체, 바로 나혜석 최후의 모습이었다.
필자 : 시인 / 이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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