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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 평양천도 하던 날

mkpark2022 2015. 10. 19. 21:24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遷都)

 



고구려 장수왕, 평양천도 하던 날

-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며 동북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고구려, 장수왕은 400여 년간 도읍지였던 국내성을 떠나 돌연 평양으로의 천도를 결행한다. 고구려 역사의 흐름을 바꾼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중심을 한반도로 좁힌 악수(惡手)인가, 고구려에 최전성기를 가져온 신의 한수?

- 고구려 최초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413년에 즉위한 후 15년이 되는 해에 장수왕은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정으로 400여 년의 도읍지였던 국내성을 떠나 평양으로 천도(遷都)하는 것, 평양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규모의 왕궁이 들어서고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견고한 산성이 축조되어 오랜 도읍을 버리고 천도를 단행한 장수왕은 고구려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친다.

- 고구려 역사의 결정적 사건인 평양천도, 지금도 여론조사를 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바꿨으면 하는 그 날의 순위에 들어올 사건으로 평양천도는 고구려의 중심을 만주에서 한반도로 옮긴 사건(?) 장수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평양 천도와 또 하나는 장수(長壽)100세 시대의 서막을 연 장수왕은 98세에 사망하는데 재위 22년 동안 많은 전쟁을 치른 광개토대왕에 비해 장수왕은 재위 79년 간 백제의 한성공격 외엔 전쟁을 치르지 않은 그야말로 태평성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적어서 장수(長壽)할 수 있지 않았을까?

- 하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전쟁을 거의 겪지 않았었는데 거의 40대에 돌아가셨고 전쟁을 치른 선조(宣祖)나 인조(仁祖)같은 경우에도 50대 중반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아 전쟁 스트레스의 영향은 아닌 듯하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유교국가에서 책도 많이 봐야하고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이라는 토론을 해야 했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신하들이 임금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아니 되옵니다!” 등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재위 637개월 보다 더 긴 영국 최장기 재위 군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장수의 아이콘으로는 빛나지만 황태자하면 젊음의 상징인데 찰스 황태자를 보면 같이 늙어가는 노인으로 왕세자 재위기간만 64.

- 장수왕에게 아버지의 명성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아버지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장수왕도 20세에 즉위하여 아버지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을 것이 넓어진 영토를 다스릴 새로운 국가 기틀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

 

평양천도의 속사정

-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국내성을 떠났다(?) 재미있는 상상이기는 한데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수도를 옮긴다는 것, 특히 고대의 수도는 모든 사회시스템의 중심으로 이를 옮긴다는 것은 도읍지 거주 지배층들의 반발을 사기 쉬운 문제이지만 큰 무리 없이 평양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아 장수왕 이전부터 기획되고 준비가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오히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

- 만주의 아이콘인 광개토왕, 평양 천도가 그의 기획이란 근거는?

광개토왕 2,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짓는데 가을 9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2> 고대사회의 불교사찰은 높은 문화수준의 상징으로 이러한 불교문화를 향유할 인구가 많아 이를 수용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 영락 9···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 “영락 14···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광개토왕릉비>

- ()의 공격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한 곳도 평양 가을 7, 동쪽지방에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8>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평양개발의 의지를 조심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는 것

- 전쟁으로 바빴던 광개토대왕,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는 <졸본성>이었으나 유리왕 때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425년간의 고구려의 수도역할로 사방이 산악지역으로 둘러싸인 천혜요새이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어려웠던 국내성의 여건으로 국가 발전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평양 천도를 결심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만주지역에서 기후가 온화하여 가장 살기 좋은 국내성이지만 산골짜기에 위치해 터가 좁은 단점으로 더 키울 수도 없어서 큰 나라의 도읍지로는 한계가 있는 국내성

- 굳이 남쪽 평양을 새 도읍지로 선택한 이유?

고구려 영토를 보면 치우쳐 보일지 모르지만 평양은 한반도와 대륙의 중심으로 대동강유역의 넓은 평야는 경제적 기반으로 튼튼하고 북쪽엔 요동벌판 · 남쪽엔 한반도 한강 유역 · 서쪽 황해를 통해 국제무대에 설 수 있어 육로와 바닷길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허브역할이 가능했던 지역

- 특히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부터 중국 이주민들을 평양에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평양은 다양한 이주민의 문화가 축적된 곳이라는 것도 천도의 배경, 또한 고조선 이래 역사의 전통과 신도시의 모습을 동시에 갖춘 평양,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의 고유문화와 다양한 선진문물들이 융합이 되면서 평양스타일이 갖추어 지는 것

 

5세기 <수산리 고분>의 벽화

- 5세기 후반 고구려 귀족 부부의 삶이 그려진 고분으로 4면이 벽화로 가득 차 있는 <수산리 고분> 지붕을 바치고 있는 듯한 이국적인 사람의 모습은 서역인으로 이들의 왕래를 짐작할 수 있고 사람의 크기도 신분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그렸으며 <멜북>이라는 어깨에 메는 북은 다른 고구려 무덤에서도 발견

- 나들이 가는 무덤의 주인 부부는 부인의 시녀 5명이 같이 동반하고 볼과 이마에 연지를 찍었던 고구려인들, 치마는 5세기 평양의 화려한 부인들의 패션으로 색색의 천을 하나하나 이어붙인 색동치마, 서커스 하는 장면이 등장하여 고구려 귀족들의 여유로운 삶을 알 수 있는 벽화로 부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담은 듯한 벽화

- 1,500여 년 전의 그림으로 호전적(好戰的) 이미지가 아닌 고구려의 새로운 문화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산리 고분>벽화, 고구려는 문화국가라는 증거로 특히 색동치마는 일본의 다카마쓰 고분벽화에서도 발견되어 고구려의 영향 속에 만들어진 것으로 5세기 국제적인 평양스타일이 탄생하고 문화적 교류가 주변국으로 유통됐다는 고구려의 또 다른 키워드인 <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평양천도와 장수왕의 외교

- 우리가 쉽게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시대가 오래 되면 뭔가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서역인이 왕래하여 장수왕의 또 다른 키워드 외교, <삼국사기>의 장수왕에 관한 기록은 총 13쪽으로 A4용지 3장의 분량,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 조공관련 으로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기록들

- 평양천도 2년 전인 425년부터 491년 까지 67년 간 총 46회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 조공(租貢)은 중국의 주변국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헌상하던 행위로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답례로 하사품을 보냈는데, 실제로 조공은 곧 외교활동으로 상대국과의 정치·문화·군사의 교류를 의미하는 것

- 특히 장수왕 때는 국제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당시 5세기 중국에는 304~439년 까지 <516국 시대>420~589년 까지는 <남북조시대>로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고구려의 외교관계도 변화하면서 이를 보여주는 것이 조공관련 기록

516국 시대 : 흉노··선비··5개의 이민족이 세운 13국과 한족이 세운 3국 등 16개국이 난립하던 시대 & 남북조 시대 :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와 남방에 한족이 세운 남조가 대립하던 시기

- 5세기 고구려 주변 대륙의 강국은 유연(劉淵) · 북위(北魏) · ()으로 이들은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어서 삼국의 갈등관계가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고구려는 세 나라 모두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이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은 것, 어느 한 나라에 조공을 하면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 견제했을 것이지만 세 나라와 모두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건 굉장한 외교적 수완이 있었다는 증거로 동북아의 G4의 강대국으로 우뚝 선 고구려는 조공(朝貢)을 통해 실리외교를 추진했던 것

- <임기환 교수의 분석> 고구려가 동북아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으로 평양의 이점을 이용해 동북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외교 능력을 펼칠 수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

 

북연(北燕)의 황제 풍홍의 고구려 망명 요청

- 고구려와 북위(北魏) 사이에 위치해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북연(北燕), 북위(北魏)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북연의 황제 풍홍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 한편 북위(北魏) 역시 436년 고구려에 북연(北燕)의 침공을 알려오는데, 강대국 북위(北魏)와 우호관계인 북연(北燕)사이에 선 고구려는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장수왕의 선택은?

- 고구려 입장에서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린 것으로 가까운 사이의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 쪽도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장수왕의 선택은 북연 황제 풍홍의 망명을 수락한다.

- 고구려가 풍홍의 망명을 받아들인 이유?

명분과 실리를 모두 따져서 풍홍을 받아들인 장수왕, 한 때는 중국의 화북 지방을 장악하던 전연(前燕)과 후연(後燕)을 이은 북연(北燕), 장수왕은 그러한 깊이 있는 문물을 눈여겨보고 인적·물적 자원이 고구려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흔히 망명하면 몇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북연의 핵심세력이 모두 고구려로 망명 “5월 연나라 왕이 용성에 남아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했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4> 대략 5만 명의 행렬로 추정

- 당시 북연의 수도 용성에 이미 진을 치고 있던 북위(北魏)의 군대, 장수왕도 용성에 3만의 군대를 보내면서 용성을 둘러싸고 대치했던 고구려와 북위군,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 군대가 북연(北燕)의 국민들을 기세등등하게 데려오는 것.

- 북위(北魏)의 입장에서도 부담이 되자 고구려에 북연(北燕) 망명객의 소환을 요구하지만 이를 거부한 장수왕으로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이었지만 만만치 않았던 고구려의 국력으로 북위(北魏) 내부 세력들의 반대가 이어지면서 고구려 원정이 무산된다.

- 북위(北魏)의 고구려 원정이 무산된 이유?

당시 북위(北魏)는 유연(劉淵)과 대립 중이어서 고구려를 공격할 여력이 없었던 것, 또한 공격을 했다가 무슨 수모를 겪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외교에 필요한 것은 국력, 막강한 국력으로 자주적인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고구려

 

풍홍 2년 만에 송()에 또 다시 망명 요청

- 436년 북위(北魏)의 공격에 고구려로 망명한 풍홍은 망명 당시에도 갑 질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 장수왕이 자신을 황제라 부르지 않고 풍군으로 부르며 황제로 대접하지 않는다며 불평을 하면서 고구려 영내에서 황제처럼 군 풍홍, 장수왕은 풍홍 태자를 볼모로 삼고 강력 대응하자 풍홍은 송()에 사신을 보내 재 망명을 요청, 도대체 왜?

- 사실 풍홍의 생각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북연(北燕)을 되찾을 생각이었으나 장수왕의 입장에서는 북위(北魏)가 동쪽으로 진출하지 않는 한 맞설 이유가 없는 것, 풍홍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되찾을 꿈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다 장수왕이 자신을 신하처럼 취급하다 보니 불만이 쌓여서 일어난 소동


풍홍의 재망명 요청에 대한 장수왕의 선택

- 풍홍의 송() 망명 요청, 고구려와 북위(北魏)의 관계변화?

풍홍을 과감하게 제거한 장수왕, ()의 입장에서는 풍홍과 연결해 북위(北魏)의 동쪽에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어서 장수왕의 입장에서는 풍홍과 송()이 연결될 경우 고구려에 불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풍홍을 제거하여 화근을 없애버린 것

- 풍홍을 이용하려던 송()의 반응은?

기분은 나빴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은 피하고 싶었던 송(), 당시 송의 적수는 고구려가 아닌 북위(北魏)로 고구려에 전쟁용 말을 요구한 송(), 800필을 보낸 장수왕은 풍홍 사건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려던 송()에게 북위(北魏)의 견제를 맡긴 것으로 결과적으로 보면 투자를 한 것, 실리를 챙기되 어느 나라와도 등지지 않은 장수왕은 세련된 외교의 달인으로 현대에도 시사점을 던지는 장수왕의 외교력

 

장수왕의 한성(漢城) 함락

- 4753만여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공격한 장수왕, 4방면으로 나누어 진격한 고구려군은 압도적인 기세로 7일 만에 북성을 점령하고 백제 개로왕도 목숨을 잃게 되면서 고구려군의 완벽한 승리로 백제의 오랜 도읍이었던 한성(漢城)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는데 당시 장수왕은 즉위 50년으로 82세의 나이

- 82세 장수왕이 한성(漢城)을 공격한 이유?

오랜 기간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받아온 신라, 고구려에 볼모로 왕자를 보내고 신라 내에도 고구려군이 주둔했었는데, 이러한 신라가 고구려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으로 433<나제동맹>을 결성하면서 백제와 손을 잡게 되자 남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지고 특히 과거 백제 근초고왕의 침략을 받았던 평양은 수도가 된 상황에서 평양방어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 한반도 남부의 정세변화 수도 평양을 지키기 위한 방어망 구축 등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한성(漢城)을 공격했다고 볼 수 있는 것

- 보다 3년 전()472, 당시 최대 강국인 북위(北魏)에 국서를 보낸 백제 개로왕은 군사를 요청하며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제를 보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 북위(北魏)에 고구려 정벌을 강력하게 요청한 백제로 보아 고구려가 강하게 백제를 압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 북위(北魏)가 도와줄 것이라 판단했던 백제 개로왕, 하지만 북위(北魏)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고구려 장수왕은 개로왕 보다 한 수 위로 결국 북위(北魏)는 백제의 요청을 거부한다.

- 개로왕이 보낸 국서의 내용에 많은 것이 기록 지금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행위가 끊임이 없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변화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록으로 당시 고구려 내부의 정치상황도 한성공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

- 제대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악수(惡手)를 둔 개로왕은 바둑 때문에 한성(漢城)을 잃게 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 스파이 승려 도림은 뛰어난 바둑실력으로 개로왕의 신임을 얻게 되고 개로왕에게 대규모 토목공사를 부추기며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킨다.

- 82세에 한성(漢城)을 함락시킨 장수왕이 주변국가에 존재감을 확인시킨 것으로 금강유역까지 남하하여 <남성골 산성(세종시 위치)>은 고구려군이 475년 한성(漢城) 점령 후 백제군을 뒤 쫒아 내려와 머물렀던 곳, 대표적인 <충주 고구려비>5세기 무렵 고구려가 남쪽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 장수왕 때에 고구려 최전성기의 영토를 이룩한 것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장수왕

- <드라마 중에서 장수왕의 독백> “내가 고구려왕으로 재위한지 79년 이웃나라들은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나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공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지켜왔다. 어느덧 내게도 삶의 짐을 내려놓을 시간이 닥쳐왔다. 북위의 효문황제는 나를 위해 베로 만든 옷을 입고 애도를 표했다.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광활한 고구려를 지배하면서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과연 역사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 북위(北魏)의 황제가 장수왕의 죽음을 애도한 이유?

예외적이었던 북위 황제의 애도의식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장수왕의 입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장수왕 사후에 별도로 호칭을 내려 추증한 북위(北魏)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요동군개국공(太傅遼東君開國公) 장수왕에게 최고의 예우를 한 북위 황제

- 북위(北魏) 황제가 장수왕을 높인 이유?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장수왕, 장수왕의 재위기간(413~491)에 주변국들은 왕도 바뀌고 나라도 바뀌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유연(劉淵)7· 북위(北魏)6· ()9명으로 심지어 나라도 남진으로 바뀌고 · 백제는 7· 신라는 4명의 왕이 바뀌는 상황에서 장수왕 혼자서 독야청청한 것, 좋은 왕이 오래 집권하는 것은 국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좋은 정책을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 오랜 기간 안정적이 사회의 모습을 갖춰나가 고구려 최전성기를 구축하고 뛰어난 외교술의 발휘는 장수왕의 장수(長壽)에 의해 완성된 업적들로 고구려 사람들도 왕의 장수를 기리지 않았을까? 장수왕의 가장 빛나는 한 수는 평양 천도(遷都) 쌈지뜨면 지나니 대해(大海)로 나가라!”는 좁은 곳에서 허덕이다간 큰 흐름에서 뒤지게 된다는 바둑의 격언, 평양 천도가 대해(大海)로 나간 한 수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