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倭館)
〇 조선과 일본, 초량왜관에서 만나다·
- 일본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그는 늘 한권의 책을 곁에 두었다. 조선의 명의 허준이 쓴 동의보감이다.
- 동의보감에서 인삼의 효능을 소개하면서 일본에는 인삼 열풍이 불었고 인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인삼의 유일한 공급처는 조선 뿐, 조선은 주요 수출품인 인삼의 생 뿌리가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 요시무네는 일본에서 직접 인삼을 재배할 계획을 세우고 1721년 막부로부터 비밀업무를 부여받은 조사단이 조선으로 파견되는데 이들의 임무는 조선 인삼의 생 뿌리를 구하는 것으로 이들이 향한 곳은 조선에서 일본인이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곳, 바로 초량왜관이었다.
- 조선시대 왜관(倭館)은 어떤 곳?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사람이 머물게 하는 곳으로 왜관의 기능 ① 외교업무를 보는 공관 ② 무역을 할 수 있는 무역거래소, 두 가지 기능을 함께 하는 곳이 왜관으로 임진왜란 이전(以前)에는 일본 사신들이 한양까지 올라올 수 있었지만, 임란 이후(以後)에는 초량왜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을 관리·통제하던 공간이었던 것
〇 일본에 불어온 인삼 열풍
- 일본에서 인삼의 인기는 어느 정도?
동의보감의 전래와 함께 수요가 높아진 인삼 “천수를 누리고 늙지 않으며 목숨을 연장해 신선이 된다.” <에도 장보기 안내서>
- 만병통치약으로 각광을 받았던 인삼은 1707년 인삼 1근 가격 = 금24냥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고, 따라서 일본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던 인삼 가격으로 인삼을 먹고 병이 나은 사람이 그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다 빚을 갚지 못하고 결국은 목메 자살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인삼 열풍은 수입에만 의존했던 막부에도 막대한 재정부담
〇 초량왜관을 통한 조선 정보유출
- 일본은 결국 인삼 생 뿌리를 훔쳐갔나?
초량왜관을 드나드는 조선인 상인·역관을 매수해 인삼 생 뿌리를 구하는데 성공한 일본, 일본은 특히 조선 정보에 대한 집착으로 약재(藥材)로 쓰기위한 조선 전역의 동식물 자료까지 수집한다.
- 뿐만 아니라 조선의 기밀서적도 왜관을 통해 유출되는데 대표적으로 중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 사항을 기록한 <통문관지>, 조선 중기 유성룡이 집필한 임란 전란사 <징비록>등 국외 유출이 엄격히 금지된 조선의 서적들을 유출해 간다. “이것은 적(敵)을 정탐한 것을 적에게 고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역관들의 밀무역이 이와 같으니 한심한 일이다” <신유한, 해유록>
- 초량왜관에서의 정보유출, 조선의 대응은?
왜관하면 건물 한 동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초량왜관은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면적이 약 10여만 평이고 일본인 500여명이 상주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의 25배로 사신 일행까지 오면 1천여 명이 거주하여 정보유출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던 상황
- 초량왜관의 모습은 용두산을 경계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고 동관은 무역을 하는 교류공간이고 서관은 외교사절이 머무는 외교공간으로 관수가(총책) 재판가(교섭관) 개시대청(사무역) 고색가(생필품)가 있었고 심지어는 응방(매사육과 사냥을 맡은 관서)도 있었음
〇 일본 막부를 사로잡은 조선의 매
- 일본에서 조선의 매는 어느 정도 인기?
당시 일본 막부를 사로잡은 조선의 매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매사냥은 최고 권력의 상징으로 초량 왜관을 통해 조선의 매를 수입한 일본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매사냥을 위한 전용도로를 만들 정도의 메니아로 막부 쇼군의 필수 훈련 과목이고, 아무나 매사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가문의 허락을 받아야만 할 수 있을 정도의 귀족 스포츠
※ 박용순 응사 : 대전무형문화재 제8호로 매사냥 기능 보유자로 매사냥은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에 등재
- ‘송골매’ 해동청이라고 불렀던 조선의 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새로 낙하 순간 최고 속도 370Km(박찬호 선수 153Km)로 하늘의 폭격기, 조선 전기 매사냥을 즐겼던 조선 국왕들 중 최고의 매사냥 매니아 세종대왕, 정도전도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매사냥이라고 꼽을 정도 “나의 즐거움은 흰 눈 내리는 겨울날에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넓은 들판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다” <서거정, 태평 한화>
〇 한반도 최대 골칫거리, 왜구(倭寇)
- 조선이 왜관을 만든 이유?
<왜구도권(倭寇圖卷)> 명나라 화가가 그린 그림에 묘사된 왜구의 야만적인 모습, 왜구는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며 노략질하는 야만적인 존재로 회유를 하지 않으면 약탈하는 존재로 왜구의 침략을 없애기 위한 조선의 고육지책이었던 것
※ 왜구도권 : 16세기 명나라 화가 구영(仇英)이 그린 그림으로 노략질하는 왜구를 야만적인 모습으로 묘사
- 1380년 왜구는 500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 고려는 화포를 장착한 함선으로 왜구에 맞서게 되고 고려함선의 화력에 배를 모두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도망치며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이에 저항하다 살해된 부녀자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는 과거 한반도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고 고려가 멸망하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했다.
〇 조선이 왜관을 세운 이유
- 조선의 왜구 대응정책 ① 무력으로 징벌하기도 하고 ② 회유책을 쓰기도 하는데, 회유책으로는 ① 항복하는 일본인에게 토지·식량·집 하사 ② 기술자에겐 관직을 내리는 등 강경책과 회유책을 번갈아 실시한다.
-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사회문제가 된 일본인, 불법체류자 증가와 군사기밀을 정탐하고 심지어 왜변(倭變)을 일으켜 혼란한 모습을 보고 결국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의 출입창구를 왜관으로 제한했던 것이고 대일무역과 외교통로를 대마도로 일원화하고 일본 막부도 대마도를 통해서만 조선의 왜관과 소통 가능했던 것
- 왜관안의 집들은 일본인들이 산 것인가요? 아니면 전·월세였나요?
왜관은 조선에서 통제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경비는 조선이 부담, 처음 초량왜관은 일본에서 요청을 했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일부 비용은 부담했지만 거의 조선에서 부담
- 왜관은 조선의 대일회유책으로 조·일합작의 국책사업, 연인원 조선인 125여 만 명과 일본인 2천 여 명의 경비는 조선에게는 큰 부담 “지급한 쌀과 품삯이 지극히 많아 쌀은 9천 여 섬, 은(銀)은 6천 냥에 이르렀다” <증정교린지>
- 조선의 대일외교의 기본 정책은 기미정책(羈靡政策), 이는 <굴레 기>와 <고삐 미>로 풀어줬다가 당기는 교화의 대상으로 실시한 기미정책의 상징인 것이 초량 왜관
〇 초량왜관 속 문화 충격
- 초량왜관에 나타난 조·일 문화차이는?
초량왜관 지을 때의 에피소드로 목욕탕 설치를 요구한 일본과 이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조선, 목욕탕 설치는 당시의 뜨거운 감자였고 또한, 당시 조선 사람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온 훈도시도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
- 조선과 일본의 문화차이의 대표적인 예(例) 음식 문화, 초량에서 음식 문화 교류로 당시 조선인들에게 최고의 인기 식품인 <스기야키>는 배달 및 선물용으로도 인기
※ 스기야키 : 삼나무 상자에 도미·전복 등 어패류와 각종 채소를 넣고 다시마 등으로 우려낸 육수를 부어 만든 일본 전통 요리
- 그 외에도 차에 곁들여 먹는 음식(귤·다식·과자·사탕·양갱)이 인기였고 담뱃대 · 접부채 · 양산 · 모기장 · 일본도 · 일본도박까지 유행했으며 당시 일본 제품들은 인기가 있어 상당히 고가(高價)로 거래되어 기록에는 “동래의 가난한 선비는 한양에서 사치품으로 비싼 가격에 팔아 부자가 되었다” <삽교별집>
※ 삽교별집 : 18세기 문인 안석경이 야담과 개인적인 일화 등을 기록해 둔 필기잡록
- 초량왜관을 통해 전달된 조선 음식은?
약과와 잔치음식, 일본은 전통적인 불교국가로 네발 달린 짐승 고기를 기피했었지만, 조선 잔칫상의 편육·쇠고기 산적 등의 맛에 눈을 뜬 일본인
- 초량 왜관을 통해 거래된 주요 무역품은?
대표적인 것은 은(銀), 일본의 은(銀)은 중국산 비단과 조선의 인삼을 결재하는 수단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은(銀)과 인삼이 고갈 되면서 패턴이 바뀌게 된다.
〇 동아시아 무역의 허브, 왜관
- 조·일 주요 수출품의 변화, 처음엔 은(銀)이 유입되고 청(淸)의 비단과 조선의 인삼이 유출됐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은이나 인삼이 고갈되면서 은→구리로 인삼→소가죽·면포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 조선은 청·일본 이외의 나라와 교역은 없었나?
공식적인 무역관계는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 동남아시아 쪽의 상품들이 일본의 나가사키 · 대마도를 거쳐 다양한 해외 상품이 왜관에 들어오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물소 뿔로 각궁의 재료 및 정1품 관복대(官服帶)에 사용하여 초량왜관은 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했던 것.
〇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교간(交奸)사건
-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교류를 엄격히 제한했던 조선은 왜관에 여인의 출입을 금하는 철저한 금녀정책을 펼치는데, 1687년 이명원이 그의 처와 딸 그리고 여동생을 남장(男裝)시켜 몰래 왜관에 잠입시키고 일본에게 사주를 받은 이명원은 세 여인에게 매춘(賣春)을 강요하고 3년 넘게 범행을 하다 결국 발각되어 극형을 당하게 되고 그 중 5명은 효수(梟首)당하여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교간사건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 갈등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당시에 충격을 주었던 사건, 교간(交奸)은 주로 신분이 낮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데 가족을 희생시킨 이명원의 사건은 특수한 경우
※ 교간(交奸) : 남성과 여성이 관계를 맺는 것
- 조선이 초량왜관에 금녀정책을 펼친 이유?
임란 전(前)에는 가족동반이 가능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인원이 늘어나고 1510년 삼포왜란 사건이 일어나면서 임란 이후부터는 초량왜관은 여인 출입 금지지역의 정책을 고수
※ 삼포왜란 : 1510년 삼포(제포, 부산포, 염포)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왜변
- 재미있는 것이 왜관 앞 아침시장에 조선 여인들이 가져온 물건들이 잘 팔렸다는데, 여인들을 내보낸 지역민들을 보고 담당 관리는 “이것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조선 여인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결국 여인들이 아침시장에서 물건 판매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교간은 어느 정도로 큰 죄?
교간을 조선의 법체계와는 달리 극형을 처한 이유 ①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로 교간은 있을 수 없는 일 ② 대외적으로 나라의 기강을 보이기 위해 강하게 처벌했던 것
- 왜관의 치외법권은 인정되었나?
왜관 총책임자인 관수의 책임 하에 관리됐던 관계로 조선의 법집행이 어려웠던 왜관내의 사건으로 치외법권과 유사한 관행이 조선과 대마도 사이에 있었던 것
- 일본에서 교간(交奸)은 불법이 아니었나?
일반 여성의 출입이 금지 된 데지마 상관, 단 기녀는 예외로 인정되고 오히려 장려한 측면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기녀를 통해 정보를 빼내는 기능으로 활용했던 것, 외국인과 일본인 기녀 사이에 태어난 혼열아는 나가사키 현에서 양육·관리했으며 시볼트라는 독일 의사와 오타키라는 기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일본 최초 여의사, 조선여인과 일본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우리의 기록에는 없는 걸 보면 교간(交奸)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차이가 존재했다는 생각(?)
- 교간사건 방지를 위한 노력은?
사건이 벌어지자 1711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신묘약조>가 체결되는데, 거의 교간에 관련된 문제로 그 만큼 심각했다는 증거 ① 일본인이 왜관을 뛰쳐나가 여성을 강간하면 사형 ② 여성을 유인해 간통한 자 · 강간 미수한 자는 유배형 ③ 왜관에 들어간 여성을 보고도 통보하지 않고 교간한 자는 그 외의 죄를 적용하는 협정을 맺게 되는 것
〇 일본의 초량왜관 침탈 사건
- 1868년 조선 조정에 일본이 보낸 한 통의 외교문서가 올라오는데, 일본에 막부가 무너지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는 내용, 하지만 이 서계(書契)에는 늘 쓰던 도장 대신 일본 메이지 정부의 신인(新印)이 사용됐다.
- 이 서계에는 관리도 대인(代人)에서→ 공(公)으로 격하, 심지어 일본 왕→ 황제로 칭하기까지 하는데 외교관계에서 조선을 의도적으로 낮추려 한 것, 하지만 고종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던 흥선대원군은 문서격식에 맞지 않는다하여 문서 수정을 요구하며 강경 대응
- 1872년 급기야 일본은 초량왜관에 군대를 보내는데 작전을 지휘하는 자는 일본의 외무성 관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1842~1917),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초량왜관을 침탈하고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간 지속된 평화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막을 내린 것이다.
- 일본이 왜관을 침탈한 이유는?
당시 일본의 정치상황 때문으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일본 막부가 무너지고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격상(格上)된 일본의 새로운 외교 틀을 조선에 강요한 것
※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의 막부체계가 무너지고 왕정복고와 함께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과정
- 조선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된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침탈을 했던 것으로 그 때 이미 조선을 침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나(?)
- 일본이 조선을 침략의 목표로 삼은 이유?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면서 불평등 조약 체결로 당시 전국 각지에 일어난 막부타도운동과 더불어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이의 극복책으로 제기한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征韓論)
※ 막부타도운동 : 서양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은 막부 타도를 위해 각지에서 일어난 운동 & 요시다 쇼인 : 일본 에도시대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 & 정한론 : 1870년대 전후 일본 내에 대두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사상
- 서구열강에게 빼앗긴 것을 조선과 청(淸)에서 보상받자는 논리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메이지유신의 주축이었던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 중 하나인 이토 히로부미, 근대사에서 왜관은 한·일 양국의 관계를 이해하는 키워드
- 일본의 무력 침탈 이후 초량왜관의 변화?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 체결과 함께 폐쇄된 초량 왜관, 부지 내에 일본공사관을 설치하고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를 설치하여 엄연한 조선 땅을 일본이 무단 점거하는 것
- 초량왜관의 명칭은 어떻게 변했나?
현대적인 명칭으로 바뀐 용두산 일대의 초량왜관지역, 가장 상징적으로 광복 직후(直後) 동관이 위치했던 지역을 광복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근대 이후 침략의 상징적인 공간이 된 초량왜관을 <나라의 광복을 기린다>는 의미로 개칭
〇 그 날의 소회
- 일본은 지속적으로 미래를 함께 해야 하는 이웃, 왜관의 역사를 통해서 선린과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되 언제나 경각심은 잃지 말자!
- 과거 양국의 교역과 평화 공존의 상징이었던 왜관, 쓰라린 기억만을 떠올려 역사 속에 묻어둘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것도 좋지만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차원에서 복원(復原)할 수 있었으면···
- 교류의 장이자 침략의 교두보였던 왜관은 한일관계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상징
'K-his(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 장수왕, 평양천도 하던 날 (0) | 2015.10.19 |
---|---|
위기(危機)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왕이되다. (0) | 2015.10.13 |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 고구려의 원수가 되다. (0) | 2015.10.05 |
고구려, 주몽(朱蒙) (0) | 2015.09.22 |
삼국시대 200년 전쟁, 한강(漢江)을 차지하라 (0) | 2015.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