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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웅 근초고왕, 고구려의 원수가 되다.

mkpark2022 2015. 10. 5. 21:22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 고구려의 원수가 되다.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 고구려의 원수가 되다.

- 346년 백제에 새로운 왕이 즉위한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 그러나 <정복군주>라는 키워드에 갇혀 알려지지 않았던 근초고왕의 또 다른 모습! <삼국사기>에 열 줄 남짓한 근초고왕의 기록 속의 그 실체를 파헤쳐 본다.

- <근초고왕> KBS 대하드라마,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고구려, 하지만 이들의 정복활동에 제동을 건 새로운 맞수가 등장하였으니 그 이름은 백제 13대 근초고왕,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광개토대왕 조부)은 또 다시 백제를 공격하지만 백제의 근초고왕은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급습하는 작전으로 승리를 거둔다.

- 그리고 그 해 겨울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고구려 평양성 공격, 3만여 명으로 구성된 백제의 정예군사가 고구려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하고 필사적인 항전이 이어졌지만 수세(守勢)에 몰린 고구려군, 급기야 고국원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결국 목숨을 거두고 만다.

 

고구려의 맞수 근초고왕의 등장 <이도학,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교수>

- <고구려 광개토왕>·<백제의 근초고왕>·<신라의 진흥왕>은 정복군주의 3대 천왕 근초고왕은··· 체격과 용모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원대한 식견(識見)이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의 모습으로 묘사

- 고대사에서 숫자 2·3·4·4·5·6(·····), 앞의 숫자 셋은 고대국가 기틀을 확립한 시기, 뒤의 숫자 셋은 고대국가의 전성기를 이룬 시기로 한강을 차지하고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열었던 백제의 근초고왕

- 고구려의 공격으로 시작된 백제 VS 고구려의 갈등, 1차전은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지금의 황해도 배천지역인 <치양성>공격으로 싸움을 걸었지만 패()하고, 371년에 다시 2차 공격을 하지만 백제 근초고왕의 매복 작전으로 고구려는 다시 패()하게 되고 분노한 백제의 근초고왕은 정예병력 3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된다.

- 전사원인에 대해서는 기록상 차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에는 고구려 왕 사유(고국원왕)유시(流矢)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VS 그런데 472<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근수구왕(근초고왕의 아들)이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싸움에서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백제가 고국원왕을 죽이고 시신을 확보했다는 뜻,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면 고국원왕은 빗나간 화살에 방심하다 죽은 듯한 느낌이지만 또 다른 국서에는 백제가 고국원왕을 죽이고 시신을 확보했다는 내용으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것

- 백제와 고구려, 원래부터 앙숙이었나?

<광개토대왕비>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고 비하, 사실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 5세기는 백제 VS 고구려의 갈등이 가장 심화된 시기로 근초고왕에 의해 고국원왕이 전사했으니 광개토대왕의 입장에서는 조부(祖父)를 죽인 원수라 생각했을 것

- 고구려를 바라보는 백제의 입장은?

백제는 고구려를 승냥이와 이리라는 시랑(豺狼)으로 표현,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가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데 백제는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는 우의를 매우 돈독히 하였고··· 고국원왕이 이웃 간의 우호를 깨뜨리고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중국 위서 열전, 백제> 두 번이나 고구려가 침략해 왔지만 두 번 모두 백제가 이기고 고구려의 국왕을 효수(梟首)했다는 것.

-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한 이유?

황해도 일대가 가진 경제적 가치 선진문물을 보유한 중국계 유이민의 세력 확보, 추구하는 이해관계가 서로 맞물렸던 것

- 당시 백제의 영토는 어디까지?

백제 근초고왕 시절의 백제 영토는 패하 예성강까지··· 패하를 대동강으로 보는 학설도 있으나 황해도 황주에서 발굴된 백제 토기 파편은 전성기 북쪽 경계를 말해주는 것으로 근초고왕의 북진정책과 고국원왕의 남진정책이 서로 부딪히면서 결국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

 

백제 VS 고구려, 33승의 비결은?

- 백제와 고구려, 33승의 요인은?

다산 정약용의 논설 중 <백제론>삼국 중 제일 강성했던 백제라는 기록, 또한 백제는 온조로 부터 강력한 전투력으로 나라를 세워 오로지 부국강병에 힘썼으니···” <기언 제34권 외편 동사3 백제세가> 조선 후기 학자들 사이에서 강한 나라로 인식됐던 백제

- 당시 백제의 군사력은?

고대 전투의 승패 결정요인 군사의 수(), 당시 동원된 백제군은 3만여 명이고 고구려 역시 2~3만여 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조선시대에도 장수 한 명이 지휘할 수 있는 군사는 15천여 명 정도이고 실제 조선 후기 중앙을 지키는 <5군영> 병사의 수가 2만여 명, 조선시대에 비()해 영토·인구·생산력이 1/3정도인 삼국시대에 3만여 명의 백제군사는 상당했던 것

- 당시 백제군의 무기는?

4세기 백제는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철제무기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뾰족한 화살촉은 갑옷 등 방어막을 관통하기에 유리, 넓적한 도끼 모양이 특징인 척()형의 화살촉은 적에게 중상을 입히는데 유리한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 인간의 도구 문화 중 가장 전파력이 빠른 무기, 그런데 무기나 군사의 수가 비등했다면 승리의 열쇠는 바로 지휘부의 리더십으로 근초고왕의 지도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근초고왕, 낙랑태수의 숨겨진 진실

- 승리한 백제, 평양성을 차지했나?

고구려 고국원왕만 전사시키고 곧 바로 철수하여 이해할 수 없는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성 포기, 근초고왕의 이상행보는 이 뿐만이 아니었고 근초고왕이 중국으로 부터<진동장군 영 낙랑태수>에 책봉됐다는 것, 중국계 유이민 집단으로 알려진 낙랑군(대동강 유역)은 중국의 선진문물을 한반도에 전달하는 교역로 역할로 근초고왕이 이들의 태수인 수장 직을 받은 것

- 낙랑군의 활동지역을 두고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대체로 학계에서는 대동강(평양)유역으로 보고 있으며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 속 낙랑은 1세기 중엽에 존재한 낙랑국으로 서로 다른 것, 당시 낙랑군은 약 60년 전 한반도에서 축출되고 존재하지 않는 상태

-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근초고왕이 직접 <태수>직을 요청한 것,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존재하지도 않는 낙랑군의 수장을 자청한 근초고왕 대체 왜? 일각에서는 평양성도 치고 빠지더니 존재하지도 않는 낙랑태수(?)

- 낙랑군이란?

낙랑·대방군은 중국계 유이민 집단으로 중국의 선진문물·기술을 보유, 또한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 · 대방군은 황해도 지역으로 이곳은 교역 루트로서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 고구려와 백제의 완충지대인 이 지역이 사라지면서 고구려 VS 백제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

- 371년 동진(東晋)의로 부터 <낙랑태수(3)>로 책봉된 백제 근초고왕, 이 보다 먼저인 355년 전연(前燕)으로부터 <낙랑공(1)>에 책봉된 고구려 고국원왕, 낙랑·대방군 세력은 4세기경에는 이미 토착화되었기 때문에 옛 낙랑·대방 주민들을 염두에 둔 책봉이 아닐까(?)

- 들을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근초고왕의 행보?

품계도 낮으면서 이미 없어진 낙랑태수의 품계는? 백제·고구려 모두 탐냈던 낙랑·대방군 지역,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공식 작호를 받으려 했을 것, 백제 외교는 주로 중국의 남쪽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동진(東晋)으로부터 작호를 받아야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낙랑공 보다는 낙랑태수를 선택하여 옛 낙랑군민들에게 자신이 중국 동진(東晋)으로부터 인정받은 새로운 통수권자임을 내세운 것

- 그 이전까지만 해도 백제는 마한(馬韓) 54개의 나라 중 하나인 평범한 소국에 불과했던 것 마한의 소국으로는··· 8번째로 백제국이 있다.” <삼국지 위서 30 동이전> 372년 근초고왕은 동진에 건너가 낙랑태수에 책봉되면서 중국 무대에 백제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이후 중국 역사서 <백제전> 정사에 등장하게 하는 고도의 정치 전략을 구사한 것

- 4세기에 백제를 고대국가로 업그레이드시키는데 낙랑·대방계 주민들을 적극 활용, 실제로 근초고왕 때 서기편찬·박사제도 등을 실시하여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고 박사 고흥·왕인 등은 낙랑·대방계 출신

- 낙랑·대방군을 축출했지만 정작 지배하지 못한 고구려?

당시 한반도의 정세는 중국은 혼란스러운 516국 시대에 도래하고 고구려는 313년 낙랑을 314년에는 대방을 축출하기는 하지만 정작 장악하지는 못한 것, 왜냐하면 중국 서북방면의 새로운 강자 전연(前燕)의 등장으로 이곳에 신경을 쓰다 보니 남쪽 경계가 소홀해지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백제가 공격한 것

516: <흉노··선비··>의 다섯 오랑캐를 뜻함

-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차지하지 않은 이유?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군사·주민 등 유지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단순한 고구려를 향한 경고(?) 납득이 되는 점이 고구려를 단계적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교통로를 따라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인 것으로 HIT & RUN<치고 빠지기 식> 공격을 한다.

- 369년 음 11근초고왕 2411, 한강 남쪽에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황색은 중앙을 뜻하며 황제의 색으로 우월감이나 긍지의 표시로 백제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

 

정복군주 근초고왕, 동아시아 연합의 중앙에 서다.

-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대왕> 왕을 잃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고구려, 안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보강하며 대대적인 반격의 기회를 노린다. 이에 맞서는 백제는 새로운 연합전선을 형성 동진·가야·신라 나아가 왜()까지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 들이는데, 고구려와는 달리 주변 국가들을 한데 묶어낸 백제, 근초고왕은 많은 국가를 어떻게 연합할 수 있었을까?

- 백제의 입장에서는 강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주변 국가와 손을 잡은 것, 특히 4세기 이후에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여 신생국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고구려를 이기는 것

- 멀리 떨어진 왜()까지 포섭한 이유?

당시의 왜()는 낙랑·대방군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는데 낙랑·대방군이 없어지자 교역루트가 필요할 것을 알고 먼저 접근한 근초고왕 백제 초고왕은··· 오색채견 각 한 필과 각궁전 ·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선물하였다.” <일본서기, 신공왕후 46> 근초고왕은 싸움만 잘 한 것이 아니라 마케팅의 왕으로 가야 탁순국을 방문한 왜()의 사신을 초청하여 백제의 진귀한 보물창고를 보여주자 왜()의 사신은 깜짝 놀란다. 당시 가야를 통해 철을 수입하던 왜() “우리 백제에는 양질의 철이 많으니 이제 우리랑 교역하자!” 한 것

철정(鐵梃) : 덩이쇠로 당시 화폐와 같은 가치척도의 역할 수행

 

근초고왕과 칠지도, 숨겨진 진실은?

- 백제와 왜() 교역의 상징인 칠지도, 살상용 무기가 아니고 하늘과 땅을 잇는 세계수(世界樹)를 형상화한 것으로 굿에 사용하던 신목(神木)의 형태에서 비롯, 현재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서 근초고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헌사(獻詞)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근초고왕의 하사품(下賜品)이라는 증거 고대사회에서 칼·도끼를 준다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신임의 증표 전시후세(展示後世), 후세 사람에게 전하여 보이라는 명령어 당시 백제는 고구려왕까지 죽이며 최전성기를 맞이한 상황으로 왜왕(倭王)에게 칠지도를 헌사 할 이유가 없는 것

임나일본부설 : 4세기 중엽~6세기까지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임나일본부>를 통해 지배했다는 주장, 그 근거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바쳤다고 주장

- 1953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 백제의 하이테크 기술을 일본에 선보인 것으로 고대국가 국력의 척도인 제철산업, 칠지도에 담긴 <선세이래미유차도(先世以來未有此刀)>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다는 백제인의 자부심, 칠지도의 상감기법은 강철표면에 글씨를 새긴 후 금실을 넣고 두드려 완성하여 4세기 당시 상감기법의 기술이 없던 왜()에게는 21세기 최첨단 반도체 산업과 같은 제철산업을 선보인 것, 칠지도 하사 후 백제의 동맹국이 된 왜(), 근초고왕의 뛰어 난 외교술로 칠지도를 하사하고 용병(傭兵)을 제공받고 왜()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 이러한 외교력을 적용시키는데 이의 증표인 또 다른 유물들.

 

백제 금동관모의 비밀 <최완규, 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 백제금동관모는 <공주 수촌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관모 측면에 가죽 끈을 묶어 머리에 쓰는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이런 물품은 8곳에서 출토되었는데 <공주 수촌리>8점은 백제 한성시대로 추정되고 <나주 신촌리>1점은 백제 웅진시대로 추정

- 금동관모는 누가 썼나?

귀하고 값비싼 금으로 전체 도금하여 왕족에 버금가는 세력이 썼을 가능성 한성을 제외한 다양한 지방에서 출토 각각 다른 형태의 고분에서 출토되어 금동관모의 주인들이 각기 다른 문화적 기반을 가진 세력가 뛰어난 세공기술이 돋보여 중앙에서 금동관모를 제작해 각 지방에 하사했을 듯, 이를 종합해 보면 금동관모를 매개물로 지방 세력을 백제 편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백제 지방 통치력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

백제왕과 중앙관료들이 썼던 관모는 별도로 출토되고 있음

- 일본에서 발견된 금동관모의 정체는?

일본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백제 중앙이 지방을 통치하 듯 왜나라 역시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 때로는 적()이 될 수 있는 고구려와 신라, 그 배후에 있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어 해상교역로를 확보하고 서방(西方)인 중국 등과 안전한 교역을 하면서 해상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 근초고왕의 통치전략인 <거점지배(據點支配)>는 직접 영토를 지배하지 않더라도 우호관계 등을 통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물론 배신의 위험성이야 있겠지만 당시 백제의 입장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의 선택이 아니었겠는가? 원대한 식견(?)

 

근초고왕의 최후

-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서기편찬 등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근초고왕, 고구려를 넘어 누구보다 강한 백제를 꿈꾸고 국방·정치·사회·문화 등 백제의 전성기를 열면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근초고왕은 재위 30년 만에 죽음을 맞는다. “근초고왕 30(375) 겨울 11, 임금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조> 그의 결말은 역사 속 단 한 줄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 영웅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단출한 기록, 지웠거나··· 잃었거나···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로 있었던 사건들을 계속 이어가면서 기록하지만 <삼국사기>는 축약형으로 전해진 기록이어서 근초고왕의 기록은 24줄에 불과하고 즉위부터 20년까지는 공백이어서 다른 사료를 통해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인물

- 근초고왕의 사인은?

재위 30년이면 아마도 천수(天壽)를 누리고 사망한 듯···

 

근초고왕의 무덤, 서울 강남에서 발견되다?

- <석촌동 고분군> 서울 송파구에 위치하고 1983~1987년에 발굴, 한 변의 길이가 50m<고구려 장군총>보다 더 큰 규모로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 중국 동진(東晋)의 도자기 조각 · 금제 영락 등이 출토 외적규모가 크고 4~5세기 왕릉 급 무덤

- 석촌동의 유래는 고분의 돌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돌이 많은 마을<돌마리>에서 유래, 한강하류에서 시작된 백제 한성시대는 BC18~AD475년까지 약 500년으로 백제역사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것은 최근 <풍납토성·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백제 초기의 왕궁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급격한 도시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었고 88올림픽 시설물 등을 설치하면서 한성시대의 백제유적이 너무 많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현실

- 근초고왕의 죽음, 이후 백제는?

2년 후에는 근수구왕이 또 다시 고구려 평양성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에 밀리게 되고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 개로왕이 붙잡히고 참살당하면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遷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