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〇 위기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왕이 되다
- 동방의 알렉산더 광개토대왕,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해 만주 벌판부터 요동의 쑹화강 · 시베리아 그리고 한강까지 “광개토왕이 공파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 편>
- 제위 22년 동안 고구려 대제국이 건설되었지만 당시 현실은 참혹하여 북방의 선비족인 연나라는 끊임없이 고구려를 침략 “연나라 왕 모용황이 궁을 태우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돌아갔다” & “미천왕의 무덤을 파고 시신을 가져갔다” <삼국사기>
- 남쪽으로는 백제가 세력을 넓히며 밀고 올라오는 상황, 조부(祖父)인 고국원왕은 371년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하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 고구려, 바로 이때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위기의 고구려를 어떻게 구해냈을까?
〇 광개토대왕 얼마나 알고 있나?
- 광개토왕의 태자시절 이름은 <담덕>으로 391년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하여 세계사 속의 알렉산더 대왕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18세에 즉위(알랙산더 22세)하여 20~30대 초반의 정복활동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유쾌·상쾌·통쾌·호쾌했던 광개토대왕 시대,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거의 없는 광개토대왕 시대, 인물에 관한 기록은 더더욱 없고 부분적으로 당시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기록만 존재.
※ 알랙산더 대왕 : BC356~BC323년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고대 마케도니아 왕
- 의외로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 조부(祖父)인 16대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17대 소수림왕은 백부(伯父), 18대 고국양왕은 즉위 6년 만에 사망하고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게 되는 것, 당시 중국은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로 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그 중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는 선비족의 모용이 <연나라>를 세우고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가 성장하고 있어 양쪽에서 압박하는 상황
※ 5호 16국 : 진나라의 멸망 뒤부터 남북조 시대 사이 5호(흉노·갈·선비·저·강)와 한(漢)족이 세운 16국
〇 숙적 연나라, 고구려에 치욕을 안기다.
- 연나라와의 악연은 고국원왕 때 깊어지는데 “전연의 모용황이 병력 4만을 거느리고 침략했다.” & “연나라 모용황이 궁을 불태우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삼국사기>
- <고국원왕>대는 전연(前燕)으로 337~370년, <광개토대왕대>는 잠시 왕조가 끊어졌다 해서 후연(後燕)으로 384년~407년 “전연의 장군이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추적하여 사로잡아 갔다.” 심지어 “미천왕의 무덤을 파고 시신을 가져갔다.” <삼국사기> 시신을 일종의 인질로 삼은 것 “고국원왕이 동생을 연(燕)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 “연(燕)왕 모용황이 이에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 당시 남쪽에서 백제의 압박은 어땠나?
고국원왕은 전연(前燕)에 패한 후 평양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는데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서거하였다.” <삼국사기>
〇 백제 근초고왕, 고국원왕을 죽이다.
- 고국원왕의 치욕 ① 연나라에 패배 ② 아버지 시신을 빼앗김 ③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 무능한 왕이었나? 무능하다기 보다는 운이 없었던 것이 고국원왕의 적수였던 전연(前燕)의 모용황은 당시 중국 최고의 지략가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 또한 백제와의 싸움에서도 맞수는 백제 최고의 군주 근초고왕으로 적수가 만만치 않았던 것.
- 고구려왕의 이름은 어떻게 정해지나?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묘호(廟號)이지만, 고구려 왕호(王號)는 무덤의 위치에 따라 장지명(葬地名)이 붙여져 동천왕·중천왕·서천왕·미천왕, 고국천왕도 고국천에서 유래
- 광개토대왕의 기록 “담덕은 나면서부터 허우대가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 <삼국사기>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고구려를 열어갈 역사적 소명을 띄고 태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지 않았을까(?)
〇 6년 만에 숙적, 백제를 굴복시키다.
- 396년 한강을 건너 직접 백제 공격에 나선 광개토대왕, 수륙(水陸) 양공작전을 펼쳐 삼면 입체공격으로 순식간에 한성을 포위하고 오랜 숙적 백제와 벌이는 치열한 전투로 백제 17대 아신왕은 무릎을 꿇게 되고 수십 년의 원한을 단 6년 만에 설욕한 광개토왕.
- 어떻게 6년 만에 백제를 굴복시켰나?
광개토대왕은 391년 즉위부터 백제를 처음 공격, 당시 백제는 16대 진사왕 “진사왕은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덕(광개토왕)이 용맹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했다.” <삼국사기>
- 승기(勝氣)를 잡은 결정적 싸움인 319년 관미성 전투, 관미성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해상교역의 관문으로 관미성이 점령되면서 백제의 해상관문이 봉쇄, 이때 고구려하면 말 탄 기병(騎兵)의 고정관념을 깨는 고구려의 수군(水軍)이 새롭게 등장 “백제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 관미성 위치에 관한 설(說)
① 인천 강화 교동도라는 설(說) ② 통일전망대 부근의 오두산성이라는 설이 유력설로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강에서 떨어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했다고 전해지는 오두산성의 공격은 당연히 수군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수군과 기병의 수륙 양공을 펼친 광개토대왕
- <관미성 함락>의 여세를 몰아 396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 “58성 700촌을 획득하여··· 성을 포위하여···” & “백제왕(아신왕)이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면서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광개토대왕비> 이 항복은 광개토대왕에게는 오랜 원수를 갚았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린 적(敵)에 대한 징벌로 이것이 있어야 만이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권위를 다시 세울 수 있기 때문
- 백제는 항복했으나 수도를 빼앗기지 않았다?
수도를 지킨 것뿐만 아니라 임진강 일대까지 회복한 기록을 보면 단지 불리한 전황으로 전략적 항복을 선언한 것, 백제는 백제대로 자존심이 있어 적어도 한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방어망 구축이 필요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회복한 것
〇 신라를 후원하여 왜를 쳐부수다.
- 전열(戰列)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선 백제 아신왕 “백제왕이 왜와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보냈다.” <삼국사기> 당시 백제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남부지역의 확실한 주도권 장악을 해서 힘을 모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겠다며 신라를 압박하는 전술을 쓰다보니까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 9년(399년)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로 기록
- 백제·가야·왜의 연합으로 위기에 처한 약소국 신라 “왜인이 그 나라에 가득 찼다.” & “태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 “10년(400년) 태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 여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했다.” &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야의 종발성에 이르니 적이 곧 항복하였다.” <광개토대왕 비> 전황(戰況)의 기록
〇 광개토대왕, 거란정벌의 의미는?
- 더 놀라운 사실은 남방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동시에 또 다른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의 또 다른 상대는 거란으로 요하 상류인 시라무렌강 남쪽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민족이 소수림왕 8년부터 오랫동안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었던 것
- 광개토대왕의 거란정벌, 그 경제적 이득은?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중국대륙에 진출하는데 거란정벌은 영토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거란의 시라무렌 강 유역은 황무지처럼 보이지만 이 지역은 염전지역, 당시 고구려에서는 구하기 힘든 소금은 공납물로 지정 “고구려는 조세를 한꺼번에 거둬들이게 하여 맥·포·어·소금·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동옥저> 거란장악을 통해 소금이 흐르는 강을 얻게 되는 것
- 뿐만 아니라 얕은 구릉과 드넓은 초원으로 최적의 목축지인 시라무렌강 유역 “염수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여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와 말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 비> 광개토대왕의 거란정벌은 고구려의 경제 살리기인 셈
- 광개토대왕의 즉위 전의 기록 “기근이 있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人相食).” <삼국사기> 그래서 경제적 기반을 확대해 나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정복활동을 통해 충족될 수 있는 가능성을 광개토대왕이 열어갔다고 볼 수 있을 것
- 거란정벌의 원래 목적은 소수림왕 대에 끌려간 고구려 백성을 구출하는 것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오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또 고구려가 빼앗겼던 백성 1만 여 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의 첫 번째 업적으로 기록
- 거란지역은 지금까지의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지만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시라무렌강 유역은 후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그 지역을 점령하면 고구려가 후연의 중심부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거란정벌의 군사적 이점 ① 후연(後燕)의 중심부 공격 루트 ② 기병운영의 핵심인 말 확보로 거란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
〇 후연(後燕)과의 한판승부, 요동을 정벌하라
- 400년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5만여 대군을 보내 왜군을 물리치고 그 때 요동에서 급보가 날아오는데 후연(後燕)의 군사 3만이 쳐들어 왔다는 것 “후연이 신성과 남소심의 두 성을 쳐서 빼앗고 땅 700여 리를 넓히고 5천여 호를 옮기어 돌아갔다.” <삼국사기> 만주벌판 요동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싸웠던 고구려와 후연(後燕), 피할 수 없는 한판대결에서 광개토대왕은 어떻게 요동을 되찾을 것인가?
- 요동, 왜 중요한가?
요하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로 나뉘는데,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북진(北進) VS 후연(後燕)은 요서지역을 차지하고 동진(東進)으로 두 강국이 맞붙는 요동지역, 넓은 농경지가 많은 요동지역은 고구려 농업의 기반이고 다양한 자원을 보유한 산업적 기반으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지역
- 또한 물자교역을 위한 교통로로 산둥반도와 연결하여 한반도와 중국을 있는 바닷길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 요동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VS 하북 지역의 본거지를 잃고 요동을 공격한 후연(後燕),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이다가 후연을 제압하고 요동을 완전하게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이후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고수한다. “광개토대왕이 병력을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니, 연의 장수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요동확보는 물론 요서지역의 숙군성 점령은 후연의 심장부까지 진출했다는 의미
- 하늘도 도와준 기회로 407년 후연의 내부 쿠데타로 황제 모용희가 피살되면서 후연이 무너지고 북연(北燕)이 들어서는데, <고구려의 후예> 고운이 북연의 황제에 즉위하는 것 “고운의 조부 고화는 본래 고구려인이다.” <삼국사기> 광개토대왕은 북연에 사신을 급파하고 동족의 예를 차린다.
- 후연(後燕)과 달리 우호관계를 맺은 고구려와 북연(北燕)
고구려 출신인 고운이 왕이 된 것도 있지만 당시 신흥강국인 북위(386~534년)가 등장하면서 북위를 상대해야 하는 북연은 고구려 요동전선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
- 거란정벌을 통한 경제적 이득은 가축·소금이었지만, 요동정벌을 통한 경제적 이득은 바로 철광석으로 전투의 필수적 자원, 정복전쟁을 통해 경제적·전략적 자원을 확보한 광개토대왕
〇 광개토대왕의 전술(戰術)
- 광개토대왕의 핵심 전력은 철갑기병 = 중장기병 = 개마기병으로도 각기 불리는데, 철갑 옷은 작은 쇳조각을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이어붙인 갑옷으로 판갑옷보다 활동성이 좋고 화살을 막는데 유리, 삼실총 갑주무사도에 등장하는 신발을 어떤 학자는 겨울철 아이젠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추측도 하지만, 아이젠의 역할을 하기엔 너무 긴 송곳으로 보아 기병이 속력을 잃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적의 보병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
- 광개토대왕은 철갑기병을 어떻게 운용했나?
이해를 돕기 위해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 등장하는 철갑기병, 무장상태가 가벼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기마병 창수는 한 손에 방패 다른 손에는 창을 사용했을 가능성, 부월수는 창수보다 더 가까이 온 적을 치기위해 사용한 도끼로 삼국시대의 진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삼국시대 병종구성
- 왜 북연(北燕)을 치지 않았나?
단순한 영토 확장만이 아닌 전략적 · 외교적 실리를 고려했던 광개토대왕, 북연(北燕)은 북위와 고구려 중간에 위치하면서 완충역할을 했던 것이고 고구려의 후예였던 고운이라는 동족국가에 대한 예우 측면도 있었을 것
〇 대왕의 꿈, 광개토대왕 비
- 광활한 만주벌판과 한반도를 거침없이 내달렸던 최고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 흔들리던 고구려를 바로 잡고 위대한 고구려의 기틀을 마련하여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찬란한 업적을 기록했는데 만주벌판 한 가운데 우뚝 선 광개토대왕 비, 여기에 그가 꿈꾸던 고구려가 있다.
- 실제 광개토대왕비의 크기?
위용에 감탄하는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39m 너비 2m로 새겨진 글자는 1,770여 자로 고대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4면에 연대순으로 기록, 국강상(國岡上)은 왕의 무덤의 위치 · 광개토경(廣開土境)은 땅을 널리 개척하다 · 평안(平安)은 나라를 평안하게 하다 · 호태왕(好太王)은 훌륭한 왕을 기리는 극존칭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12자 중 핵심 글자는?
토(土), 역사상 어느 왕도 가지지 못했던 칭호로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백성들이 살기 좋은 땅을 얻기를 바랐던 광개토대왕, 서녕기업(庶寧其業)은 백성들이 평안히 생업에 힘쓰고 · 국부민(國富民)은 나라가 부강하여 백성들이 풍족해지고 · 오곡풍속(五穀豊熟)은 오곡이 풍성히 잘 익었다, 광개토대왕이 추구하는 정복의 땅은 궁극적인 애민의 철학이 담긴 토(土), 애민정신이 깃든 또 하나의 다른 글자 연호 영락(永樂), 영원히 백성을 즐겁게 하라는 의미
- 애민 · 영락은 고구려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것?
광개토대왕도 백제 · 신라에 대한 민족적 동질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태왕은 백제왕이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광개토대왕 비>
- 비문의 마지막 수묘인연호, 능을 지키는 문지기에 대한 정책이나 내용 “내가 죽은 뒤 만년까지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몸소 다니며 공략해 온 한예(韓穢)만을 데려다가 하라.” <광개토대왕 비> 한예(韓穢)는 한반도에 살고 있던 백제·신라·가야 사람과 예인(穢人)은 동예와 임진강 지역에 살던 예족(穢族), 한예(韓穢)에게 무덤을 지키도록 한다는 것은 이들을 고구려 백성으로 포용했다는 의미
- 광개토대왕비의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와 다른 민족인 왜·거란·후연에 대한 강력한 응징 “광개토대왕이 왜(倭)를 궤멸했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광개토대왕 비> 반면 같은 계열 민족에게는 정복활동은 했지만 이후에 은덕을 할애했다는 것에 주목
- 위기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후 어떻게 바뀌었나?
농경을 통한 정착생활과 북방민족과 교역문화를 확립하고 고구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광개토대왕은 요즈음의 CEO형 군주의 면목을 보이는 것
- 광개토대왕의 내치(內治)는?
아쉽게도 구체적인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고 고구려에서 불교를 공인한 17대 소수림왕, 광개토대왕의 내치인 불교 번성의 흔적, 평양지역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고 율령(律令)의 기틀을 확립했다는 기록, 결과적으로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튼튼한 국가의 기틀을 만들고 새로운 고구려로 리모델링한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만든 고구려를 가장 고구려답게 만든 왕
- 39세에 사망한 광개토대왕, 죽음에 관한 기록?
구체적인 기록은 없어서 “알고 싶은 것은 많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심지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광개토대왕의 무덤, 비문 근처의 <태왕릉>이나 <장군총> 둘 중 하나인 것은 분명, 광개토대왕이 진정 원한 것은 넓은 영토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갈 백성들의 행복한 삶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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