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주몽(朱蒙)
〇 200여 년 전(前) 역사코드, 고구려 신화
- 고대사회에서 한 국가가 건국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705년간 동아시아 강자로 군림하며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꿈의 역사로 기록된 고구려!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그 기반에는 바로 신화가 있었다. “신작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을 낳았는데 울음소리가 아주 크고 골격이 뛰어났다. 처음에 날 때 왼쪽 겨드랑이에서 알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 가량 되었다.” <고구려 건국 설화>
- 2,000여 년 전(前) 알에서 깨어 나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건국설화, 5되면 10Kg정도로 알에서 나온 것도 믿기 힘들지만 겨드랑이에서 그 큰 알이 나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주몽 탄생설화, 상서롭지 못한 일이어서 알을 마구간에 버렸지만 알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동물들, 다시 깊은 산속에 버렸는데 짐승들이 알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에 자주 언급되는 알, 신라 건국신화 박혁거세 · 가야 건국시조 김수로
- 고대국가에서 건국신화가 가지는 의미?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통치의 권위, 이를 신(神)들로부터 빌려와 건국의 명분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나는 신(神)과 연계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의미
〇 주몽(朱蒙), 고구려를 세우다
- 2,000년 전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고 영특했던 한 청년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고 목숨까지 위협받자 자신을 따르는 세력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통해 점차 세력을 넓혀간 그는 이웃 부족들을 아우르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BC 37년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짓고 천혜요새 오녀산성을 도읍지로 나라를 건국하는 주몽!
- 고구려 국명의 의미?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은 흘승골성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는 성이 많은 나라로 성을 이용하여 중국의 침략을 물리쳤는데, 고구려 말로 성을 뜻하는 구루(溝漊)와 높을 고(高)로 <큰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해발 820m에 위치한 오녀산성은 요새의 높이만 200m로 천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쌓음
- 고구려는 얼마나 지속된 나라?
BC 37년에 건국하여 AD 668년에 멸망하여 존속기간이 705년, 이름이 고상해서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는지 중국 신나라 왕망이 고구려 국호가 너무 고상하다고 하구려로 낮추어 부르라고 하지만 신나라는 15년 만에 후한(後漢)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 이름에서 느껴지는 고구려 기상의 출발은 아마도 영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으로는 훈춘 · 남으로는 한강 · 북서쪽으로는 만주의 평원 일대를 차지한 동북아 최강자로 군림한 나라, 하지만 한 왕조가 700여 년을 유지한다는 것은 전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주변 국가들과의 경제·문화의 교류와 유연한 외교가 어울러야 가능한 것으로 뛰어난 정치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북방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한 고구려, 온돌(溫突)은 대표적인 고구려 문화
〇 광개토대왕릉비와 주몽신화
- 고구려인이 직접 쓴 건국이야기 <광개토대왕릉비> 첫 머리에 실린 주몽신화는 추모왕의 이름부터 등장하는데, 추모는 주몽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북부여에서 태어났고 천제지자(天帝之子) 즉 하늘의 아들이고 모하백여랑(母河伯)은 어머니는 하백의 딸, 하늘의 아들이며 물의 신을 어머니로 둔 주몽, 알에서 깨고 나와 위대하고 성(聖)스러운 탄생으로 기록, (忽本西 城山上而建都?)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BC 37~ BC 19년까지 고구려를 통치하면서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황룡을 타고 승천한 것으로 마무리하는 건국신화, 탄생부터 건국까지 주몽에 대한 당대 고구려인의 인식을 반영하며 짧고 간결하게 고구려가 어떤 나라인가를 묘사
- 중국도 천자(天子)의 나라라고 지칭하는데?
중국의 천자인 같은 경우에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사람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천자가 융화한다는 의미이지만, 고구려의 천제지자는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식이라는 의미로 개념이 다른 것, 즉 중국은 하늘의 명을 받은 양자(養子) VS 고구려는 하늘의 몸을 받은 친자(親子)
-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주몽 신화가 가지는 의미, 사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몽신화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12세기에 만들어진 책이지만, 광개토대왕능 비는 5세기에 건립하여 700여 년이나 앞선 고구려 당대의 기록으로 신빙성이 높은 자료로 볼 수 있다는 것
- 금석문에 주몽신화를 새긴 이유는?
<광개토대왕능비>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광개토왕의 위대함은 천제지자인 주몽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때에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어서 거의 역사로 믿는 분위기였을 것, 상대적으로 아직까지는 백제와 신라의 금석문에서는 흔적이 없는 건국신화,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며 하늘의 자손이라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것.
〇 신화(神話)를 재현한 의식, <동맹제>
-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에 동굴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천행사인 <동맹제>는 왕이 직접 주제하고 고구려의 시조(始祖)인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을 하늘로부터 맞이하는데 유화부인으로 대표되는 수신(隧神)을 압록강 근처로 모시고 나와 강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날 밤 사람들은 풍성하게 차린 음식과 술을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춤과 노래로 즐기는 축제
- <동맹제(同盟祭)>는 어떤 행사?
당대의 기록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나라에 큰 대회를 열어 이름을 동맹(同盟)이라 한다. 그 수도의 동쪽에는 큰 동굴이 있어 이름을 수혈(隧穴)이라고··· 나가 동쪽 끝 거리에서 제사를 지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
- 최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동굴인 수혈(隧穴)이 1983년에 확인이 됐는데, 고구려 수도 국내성(현재 중국 집안시 인근) 동쪽에 위치하고 하늘로 통하는 형상을 가진 큰 동굴로 통천굴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 가보면 신을 모실 수 있는 신비스러움이 있고 <국동대혈>의 위치로 보아 <동맹제>에서 신(神)을 맞이했던 수혈로 추정
- 알·동굴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여성과 생명의 모태, 수신(隧神)은 여자의 형상을 나무로 깎아 만든 신상으로 동굴에서 수신을 맞아 강가에 나와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천 의식은 하늘인 주몽의 아버지와 수신(隧神)인 주몽의 어머니를 모시는 의례로 <제천의식>을 통해 주몽신화를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
-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수신(隧神)이며 또한 농업의 신을 상징,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곡식종자를 준 유화부인, 곡식종자는 나라의 터전을 닦는데 보탬이 되라는 의미로 유화부인을 농업의 신으로 섬기며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천신과 수신의 후예라는 걸 체험하는 장소였던 것
- 실제로 그리스 신화도 신화가 재현되는 곳은 신전(神殿), 연극의 기원은 디오니소스를 위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맹제>를 통해 주몽설화를 연극적으로 연출 했을 것으로 추정, 2002년 월드컵에서 하나가 된 경험이 있듯이 동맹제의 모습도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우리 민족이 가진 에너지와 힘의 원천을 고구려의 <동맹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〇 고구려 문화의 꽃, <고분벽화>
- 2004년 7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古墳郡)>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고구려 고분의 특징 ① 천상(天上)의 세계를 표현 ②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 고구려인의 내세관은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믿었다는 것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음
-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고분벽화의 위대함, 1600년 전 고구려 밤하늘 여행, 다양한 별자리가 그려진 <덕흥리 고분벽화>의 천장 모습은 고구려인의 신화세계를 다채롭게 나타내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은 약 120여 개로 그 중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것은 20여 개
- 벽화 속에 그려진 신화코드를 찾아라!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덕흥리 고분 남쪽 천장에 표현된 은하수를 경계로 양쪽에 서있는 남녀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 떠다니는 듯한 선인지련(仙人持蓮)은 연꽃봉오리를 든 하늘의 신선을 상징하고 공룡으로 추측되는 그림은 길리지상(吉利之象)으로 노루의 머리에 봉황의 다리를 한 새로 길(吉)하고 이(利)로움을 상징하며 고구려판 켄타우로스는 성성지상(猩猩之象)으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하늘과 교감하는 짐승으로 인식했던 것 같고 특이한 것은 신화 그림과 짝을 이루고 있는 별자리
- 고구려 벽화의 우수성 ① 밤하늘 별자리를 신화 그림으로 남긴 것 ② 상상이 아닌 관측(觀測)을 통해 별자리를 그린 것, 고구려 북쪽 하늘의 별자리 북두칠성은 7개가 아닌 8개의 별로 육안으로 보기 힘든 제8의 별 보성(輔星)까지 그린 덕흥리 고분
- 북두칠성 아래에 그려진 그림은?
머리가 둘이며 몸은 하나인 동물 바로 옆의 문자 ‘지축일신양두(地軸一身兩頭)’ 북두칠성 아래에 그렸다는 것은 의도적인 장치로 신화와 별자리를 연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몸통은 지구의 회전축인 지축을 두 개의 머리는 북극과 남극을 표현, 굽어있는 몸체는 지구의 자전(自轉)을 표현한 게 아닐지···, 지구를 형상화한 고구려인의 놀랍고 뛰어난 천문지식
- 해와 달은 어떤 모습?
역사 속의 별자리 그림들은 모두 원형으로 그리고 있는데, 아마 당시에도 천체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 같고, 당연히 해와 달도 둥글게 그렸지만 크기가 다르다는 점, 태양 속에는 삼족오(三足烏)를 달 속에는 두꺼비를 그려 태양보다 달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을 사는 불사의 신화를 달에 부여시킨 것으로 옥토끼·두꺼비·계수나무를 통해 이를 읽을 수 있는 것
- 고구려인에게 하늘은 어떤 의미?
하늘과 땅, 생과 사의 두 세계는 서로 다르지 않으며 고구려인들에게 하늘은 가까운 존재이자 그 속에 영원히 살고자한 마음을 표현한 자료로 볼 수 있는 것
- 고구려인의 천문학이 조선으로 계승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리는데 “본래 석각본(고구려의 석각 천문도)이 평양에 있었으나, 전란 중 강에 빠져 잃어버렸다. 조선을 건국한 1392년 평양 석각본을 발견한 태조가 돌에 새길 것을 지시하였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권근의 발문 중>
- 그런데 하늘을 그린 벽화가 시기에 따라 변화되면서 고구려 벽화의 내용도 바뀌게 되는데, 불교의 융성기인 5세기 중엽에는 연꽃장식이 유행, 고구려 벽화의 최고봉인 사신도, 특히 <강서대묘사신도>는 화려한 색채와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이 특징
- 고구려인들의 벽화 주제는 시대의 흐름과 종교나 신앙에 따라 변해갔으나 하늘과 주몽에 대한 신앙은 지속, 특히 주몽은 고구려 말기에 당(唐)이 요동성을 공격할 때 주몽사당에서 지켜달라는 기원을 행하는 의식을 보면 역시 끝까지 주몽을 신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
〇 고구려의 정신적 기반, <주몽신화>
- “백발백중의 명궁이었던 주몽, 부여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 모두는 주몽을 시기하게 되자 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과 상의하여 부여를 떠나기로 결심, 마구간에서 일하면서 좋은 말을 골라 혀에 바늘을 꽂는 비책(秘策)을 사용하고 바늘 때문에 먹지 못한 야윈 말을 금와왕에게서 물려받은 주몽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그가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고 졸본 땅에 이른 주몽은 초막을 짓고 나라를 세우니 그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주몽신화>
- 반드시 죽음의 위기를 맞는 신화 속 주인공, 시련을 이겨내며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서사구조는 동·서양의 공통점,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고안해 그리스 군을 승리로 이끈 영웅
- 동·서양의 신화 속 주인공들이 닮았는데?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신들의 혈통이 있어야만 하는 것, 그러니까 동·서양의 영웅들이 인간으로써 능력이 출중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신(神)의 혈통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시련을 겪는 것은 신(神)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과정들
- 신화에서 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 주몽의 남달랐던 어린 시절은 4살 때의 이야기 “파리들이 눈을 핥아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세요. 어머니가 대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이규보의 동명왕 편> 도저히 믿기 어려운 주몽의 어린 시절, <주몽>은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뜻으로 신궁(神弓)의 유전자가 주몽에서 유래된 듯···
- 영화 <베트멘> 시리즈 제작자 “미국은 이미 서양신화로 만들어진 슈퍼히어로들로 포화상태이다. 한국의 문화유산과 역사에서도 새로운 캐릭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유슬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콘텐츠 인사이트’ 간담회에서
- 우리의 고대 신화를 만만하게 생각한 이유는 만화·인형극 등을 통해 어린 시절에만 접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 보편의 영웅 서사를 갖춘 주몽 신화는 세계를 무대로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콘텐츠로 시대에 맞게 재(再)해석만 된다면 <니벨룽엔의 반지>가 반지의 제왕과 바그너가 오페라로 만들었듯이 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이 우리에게 필요.
〇 두 명의 동명왕(東明王)
- 고대사의 무대였던 만주평원의 젓줄인 송화강, 이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특별한 이야기 “신화 같은 이야기였어요. 한 나그네가 급하게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배가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강가에서 큰 자라 한 마리가 오더니 그를 등에 지고 강을 건넜다고···” <쪼우펑궈, 조원현 팔가촌> 2010년도 인터뷰한 내용으로 2000년 전의 신화가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
- 전설 속 주인공 나그네는 혹시 주몽이 아닐까?
송화강 유역이라면 아마도 고구려 시조 주몽이 아닌 부여의 시조 동명(東明)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부여와 고구려의 <동명왕>은 동명이인인가? 혹은 같은 사람인가?
- 먼저 부여는 어떤 국가였나?
낯설게 느껴지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부여, 송화강 평야지대의 서쪽유역 5부족 연맹체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졌던 부여는 사방 2천리 · 인구 8만호, 당시 고구려 인구는 3만 호로 2~3세기 동북아 초강대국으로 만주평야 일대에 자리매김하여 우리 민족사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부여
※ 역대 국가의 존속기간 ① 조선 518년 (1392~1910) ② 고려 474년 (918~1392) ③ 고구려 705년 (BC37~AD668) ④ 부여 700여 년 (BC2세기경~494) ⑤ 백제 678년 (BC18~ AD660) ⑥ 신라 992년 (BC57~935)
〇 주몽 신화는 동명 신화를 차용했다?
- <부여 동명왕 신화>는 하늘로부터 달걀의 기운을 받아 아이를 임신하는 시종,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려진 아이를 동물들이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구한다. 동명(東明)이라 이름 지은 아이는 노비로 키워졌고 활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아이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진 왕은 동명을 죽이려 하고 남쪽으로 달아난 동명은 엄호수강에 이른다.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자리를 만들고 마침내 동명은 강을 건너 부여를 건국한다.
- 두 명의 동명왕(?)
문학 작품이라면 표절이랄 정도로 모티브가 똑같은 <고구려 주몽 신화>와 <부여의 동명 신화> 역사적 순서로 보아 부여 동명 신화가 먼저, 따라서 고구려 주몽신화는 부여 동명신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동명(東明)은 부여 임금이고 주몽(朱蒙)은 고구려 임금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은 성이 고씨이고 휘가 주몽이다. 라고 하여 비로소 동명과 주몽을 합하여 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시는 부여의 동명왕이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해동역사, 한치윤>
- 한치윤의 주장도 자료로 보면 타당성이 있는 것이 동명왕은 부여족 전체의 시조로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이기에 주몽을 동명이라 불렀을 것
- 굳이 부여 동명 신화를 차용한 이유?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니까, 결국은 동명 신화로 표현되는 부여의 정통성이 누구냐? 신화는 단순히 건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신화를 통해 구현된 나라가 얼마나 정통성이 있느냐의 문제로 부여족이 정통을 내세우니까 부여 동명 신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
- 주목되는 점은 주몽 신화가 결국은 12세기 고려시대에 다시 부활, 문인 이규보의 <동명왕 편>에서 고구려 주몽 신화를 엮은 한시로 총 1,410자에 달하는 대서사시를 쓴는데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 괴상하고 황당한 이야기려니 생각하였다. 여러 번 거듭 읽어 음미하면서 차차로 그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상이 아니요 성(聖)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이었다.” 12세기 고려 무신정권의 국난시대를 살았던 이규보에게 힘이 됐던 주몽 신화
- 고려 중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신라 중심의 역사계승의식이 강했는데, 고려 후기로 오면 고구려 계승의식이 발현되고 주몽 신화를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부각시키면서 주몽 신화가 우리 민족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각인되게 되는 것
- 신화(神話)에는 나를 나답게 우리를 우리답게 할 수 있는 문화적 원형이 있는데 그 것을 찾는 능력을 우리는 지금 잊고 있는 게 아닌지? “햇빛에 바래면 역사(歷史)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된다.” <이병주 소설 ‘산하’ 중> 신화나 설화 속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우리 역사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K-his(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관(倭館) (0) | 2015.10.12 |
---|---|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 고구려의 원수가 되다. (0) | 2015.10.05 |
삼국시대 200년 전쟁, 한강(漢江)을 차지하라 (0) | 2015.09.15 |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일본의 볼모가 된 영친왕(英親王) (0) | 2015.09.09 |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0) | 2015.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