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mkpark2022 2015. 9. 9. 23:05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동학농민운동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동학농민운동

- 1894(고종 31)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중봉기,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존재,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 저마다 손에는 낫과 죽창을 들고 녹두장군 전봉준을 따라 농민들이 모여 들었다 우리가 ()로써 궐기한 것은 창생(蒼生)을 도탄에서 구하고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함이다()이 일어나자 동서남북의 여러 읍들이 서로 민란을 일으키기를 바라며 들썩였다.

- <광제창생(廣濟蒼生) · 보국안민(輔國安民) ·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아래 일어선 농민들, 한 번 지펴진 불씨는 산과 들을 넘어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데, <보국안민>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제폭구민>은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하다. <광제창생>은 널리 백성을 구한다는 깃발에 담긴 동학농민운동의 핵심 주장들

-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이유?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부농민봉기, 고부 탐관오리 조병갑 진황지(陳荒地)를 백성들에게 개간하여 경작토록하게하고 징세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추수기가 되자 강제로 징수한 일이요” <전봉준 공초록 중> 강제로 만석보를 쌓게 한 후 물세까지 징수하며··· 조병갑의 갖다 붙이기식 수탈은 불효(不孝불목(不睦잡기(雜技) 등 갖은 명목으로 강제세금을 징수하여 약 2만 냥(4억 정도)로 요즈음 갑 질의 원조 격

-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 호남지역, 유독 수탈이 심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탐관오리들에게는 천국?!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체 쌀 생산량의 40%를 호남에서 생산 서울 장안에서는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을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오하기문 중>

 

고부농민봉기, 녹두장군 전봉준

- 민의(民意)를 전달할 방법이 난() 뿐이었나?

전봉둔의 부친 전창혁은 고부지역의 지식인으로 훈장이었는데 관아에 항의 문서를 제출하였다가 도리어 조병갑에게 고역을 당함, 일설에 의하면 항의 방문한 전봉준의 부친은 매를 맞아 죽었다고 하고 실제로 1894년 당시 전봉준은 상복을 입고 다녔다고 함

-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린 이유?

전봉준의 어린 시절 별명은 키가 작고 왜소하여 녹두 몸이 다부지고 피부가 하얗고 눈이 반짝거리고 주먹이 큼직했으며 담력이 있어 무슨 일이건 앞장섰다” <이이화의 녹두장군 전봉준 중> 또한, 파랑새는 팔() + () + = ()

 

고부농민봉기, 사발통문(沙鉢通文)

- 사발(沙鉢)을 놓고 돌려가며 이름을 적는데 주모자를 알 수 없게 하기 위한 사발통문, 이런 방식을 차용한 것이 요즘의 원탁회의로 회의 참가자들의 서열이 애매할 때 원탁으로 하는 것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겠는가?” <사발통문>

사발통문 : 주요 참가자와 지향하는 바를 적은 격문

- 농민들의 목표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고 탐관오리 징벌 전주성을 격파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권귀 제거

권귀(權貴)는 민씨 정권

- 이 시기는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세워지는데, 왕비의 절대적인 권한에 빌붙어서 많은 민씨들이 여기저기에서 탐관오리로 지내면서 불과 2~30년 만에 나라가 거덜나게 된다. “민씨들이 권세를 주무른 지 여러 해가 지나 국정은 날로 그릇되어 모두가 입을 모아 이 나라가 언제 망할 것인가라는 한탄이 떠돌았다” <오하기문 중>

- 고부농민봉기가 기존의 민란과 다른 점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 지역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변혁을 선언한 것, 고부민란의 또 다른 문제는 농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는 해산만 하면 요구조건을 들어준다하여 봉기군을 해산시키고 약속과는 달리 주동자 농민들을 잡아들여다 처벌하여 민심은 분노한 것,

- 전봉준은 무장현의 손화중 · 태인현의 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을 연대해 동학농민군을 결집하고 만여 명의 봉기군은 황토현에서 관군과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면서 흥덕·무장 등을 경유하여 파죽지세로 나아가 마침내 1894427일 조선왕조의 본관인 전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 농사짓던 사람들이 어떻게 관군을 이겼는가?

1차 봉기 시 11,000명 정도의 동학농민군이 모이게 되는데, 워낙 많은 농민군이 모이게 되어 농민군 옷은 모두 흰색으로 온 산을 하얗게 뒤덮여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 반면 관군의 수는 약2,200여 명 정도로 숫자는 적었지만 화력이 우세했던 관군은 방심하여 전()날 소를 잡고 회식을 하여 술 취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농민, 동학(東學)을 만나다

- 왜 동학농민군인가?

조선 신분제도의 근간이 된 유교(儒敎), 반면 인간사회의 평등을 주장한 동학(東學), 또 하나는 유무상자(有無相資)라고 해서 19세기 후반은 오랜 기근으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웠던 시기로 서로 돕고 살자는 사상이 크게 받아들여짐, 또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미의 동학사상은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 평등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 수탈에 시달린 농민들에게는 희망으로 다가 온 동학(東學), 특히 전봉준 등 지휘부가 모두 동학교도들이어서 <동학농민운동>

유무상자(有無相資) :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자는 동학의 가르침

-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한 소년 백범 김구, 이유인 즉 상놈 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대우를 없앤다고··· 동학에 입도하고 싶은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백범일지 중> & “10여 읍()이 일시에 봉기하여 열흘 정도에 수만 명이 모여들었고 동학이 난민과 함께 어우러진 것이 이때부터였다” <오하기문 중>

- 1차 동학농민 봉기, 동학교도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참여하여 무엇을 남겼나?

1894427일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57일 정부군과 평화협정으로 <전주화약>을 맺는데 최초의 <··민 신사협정>, 전라감사 김학진과 합의에서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 설치><12개조 폐정개혁안>에 합의하고 농민군은 자진해산한다.

 

12개조 폐정개혁안과 집강소(執綱所)

- 12개조 폐정개혁안 탐관오리 응징 노비문서 소각 청춘과부 재가(再嫁) 허락 무명잡세 폐지 토지 평균 분작 등등, 1894년 당시까지 과부들은 재가금지 재가한 여인의 아들은 동쪽 반열과 서쪽 반열(동서반)의 관직에 임명하지 못한다” <경국대전 이전 경과직조 중> 예전에는 할아버지들끼리 혼약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신랑이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너는 죽어도 그 집의 귀신이 되거라~ 해서 보내고 평생을 그 집에서 일하며 살게 되는 청춘과부도 있었는데, 이를 처음 문제로 제기한 동학농민군, 실제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도 과부와 재혼한 인물

- 폐정개혁안, 어떻게 실현했나?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집강소 내()의 활동은 노비 해방 토지 소작권을 평등하게 나눠줌 억울한 피해를 입은 농민들 구제, 특히 평민이 무덤으로 쓰기 위해 좋은 땅을 마련해 두었으나 양반이 세력을 이용해 강제로 무덤을 쓴다거나 하여 억울해 했었는데 이런 것들을 해소시켜 준 사례가 있다.

- 집강소는 농민주체의 개혁기구 귀천(貴賤)과 노소에 구애됨이 없이 똑같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노예와 주인이 함께 동학에 입도한 경우에는··· 마치 벗들이 교제하는 것 같았다” <오하기문 중>

-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상황 자체가 거의 혁명적 상황, 게다가 농민들이 그 지역을 접수한 상태에서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 신분제타파는 조선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혁명적사건으로 집강소를 통해 민관이 함께 실현하려 했다는 것에 큰 의미

-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그 해에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동학농민군의 주장인 노비제도 완전 폐지 · 재정 개혁 · 과부재가 허용 등이 갑오개혁에 반영된 사례

갑오개혁 : 18947월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주도한 과거제 폐지 · 도량형 통일 등 근대적 제도개혁

 

동학농민군, 다시 깃발을 올리다

- 동학농민군 진압에 실패한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189455~7일 청()군은 아산만에 도착, 그러자 일본에서도 출병을 단행하여 56일 일본군이 인천에 도착하지만 속셈은 따로 있었으니 611일 새벽 일본군 경복궁 기습 공격사건, 그들은 보호라는 명분아래 고종(高宗)과 왕비를 인질로 잡고 조선의 심장부를 점령한다.

- 뒤이어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야욕을 드러내고, 이에 삼남지방에서 다시 일어난 동학농민군 조선을 침범하고 있는 저 간악한 왜적들을 우리가 어찌 용납할 것이오.” 다시 일어선 동학농민군, 그들의 구호는 달라져 있었다!

- <척양척왜(斥洋斥倭)> 서양과 일본세력을 몰아내자는 것으로 ()봉건의 1차 봉기 때는 수탈 때문에 일어섰다면 2차 봉기는 반()외세로 바뀐 것, 결정적 계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공격사건으로 고종(高宗)과 명성왕후가 있는 함화당을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부수고 무차별 살육을 자행하자 농민봉기군은 우리의 적()은 외세라고 판단했던 것

- 2차 봉기군의 규모는?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전라도 남접 농민군이 2만여 명 전주에 들어가 소집한 군사··· 공주로 향할 때도 각도의 백성이 더 많았다” <전봉준 공초록> 이로 보아 3~4만 여명 정도가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

- 1차 봉기와는 다르게 최시형 교주가 명령을 내리면서 동학 총궐기로 들불처럼 활발해 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호랑이가 집에 쳐들어 왔는데 앉아서 죽을 수 있느냐?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동학운동은 조정으로 부터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온 농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선을 구하고자 봉기하다니?! <동학농민운동>의 반()봉건은 어디까지나 제도나 탐관오리가 대상이고 왕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는 증거

- 2차 봉기, 척왜(斥倭)가 된 까닭은?

정부에서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여 55~7일 아산만에 도착, 이어서 57일 일본군 해군 육전대 420명이 서울에 도착하고 그 후 부산에 상륙하여 북상하면서 부산에서 평양까지 일본군의 군용전선(軍用電線) 및 병참선(兵站線)을 매설 “5월부터 동래에서 내륙으로 일본군 5~6만 명이나 상경하였다··· 돌을 뽑아내고 숲을 벌채하여 40리마다 병참부를 설치하였다.” <고성부총쇄록> & “724일에 일본군 천여명과 기마 70여 필이··· 계속해서 지나갔고··· 배를 타거나 육로를 이용해 서울로 직행하고 있다.” <금번집략> 사실 그 당시 농민들 입장에서도 저들이 대규모 전쟁을 할 것 같다는 분위기를 감지한 것, 우연의 일치인지 임진왜란 당시 침략경로와 일치하는 병참선, 이를 감지한 동학농민군의 지휘부에서도 이 상황에서는 척왜(斥倭)에 치중하게 되는 것

 

녹두꽃은 떨어지고···

- 189411<우금치 전투>, 일본의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이 시작되고 우금치에서의 동학농민군 VS 관군·일본군의 전투, 고개를 넘기 위해 하루 50여 차례의 결사항전의 치열한 전투, 하지만 일본군의 화력은 상상 이상으로 일본군의 화력에 무너진 동학혁명군, 7일간의 전투 우금치 계곡과 봉황산 마루는 쓰러진 농민군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산 밑 개천은 여러 날 동안 줄곧 핏물이 흘렀다나라를 향한 국민들의 외침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 한 차례도 이기지 못했나?

일본군에 맞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의 결사항전, 일본군이 두 차례 후퇴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 일방적으로 농민군이 패배 보이는 대로 총살하고 있다. 우리 일본군 한 사람이 2~3백 명의 적을 상대한다.” <사마다 군조의 편지 중> 일본군 전사자는 1명에 불과

 

동학농민군 VS 일본군

- 일본군보다 농민 수()가 훨씬 많았던 상황, 비참하게 패배한 이유?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로 당시 일본군 주력무기는 <영국산 스나이더 소총>으로 특징은 뒤에서 탄환을 장전하는 후()장식으로 엎드려 연속사격이 가능하여 1분에 15발 사격가능, 반면에 동학농민군의 재래식 화승총은 전()장식으로 탄약 총구에 장전하여 재장전에 2~3분이나 소요됐던 것으로 재장전을 하기 위해 일어서야만 했던 것이 치명적

-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은 동학농민군으로 판단했던 것, ()과의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동학군을 진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후비보병 제 19대대를 서둘러서 추가로 투입한 것

- 후비보병 제19 대대의 정체는?

당시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일본군 수는 약 2천여 명으로 토벌의 핵심역할을 한 후비보병 제19대대는 700여 명으로 이들은 7년간의 군대생활을 한 베테랑 군사들로 구성 근대 독일식 전법(戰法)을 습득한 최정예 부대로 일본군의 치밀한 토벌작전은 서로(西路중로(中路동로(東路)의 세 갈래로 나눠서 작전을 전개하여 토끼몰이 식으로 한양에서부터 서남해안으로 밀어붙인 일본군

 

치밀하고 잔혹한 일본군의 학살

- 동학농민군 학살, 일본의 지령은?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 일본군,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희생자 수를 줄여서 보고하는데 나중에 학살이 가져올 위험성을 인식했던 것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렬함을 요하니 모조리 살육해야 한다.” <가와카미 병참 총감의 전보>

- 학살의 책임자는 누구?

당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군벌들의 전체적인 책임, 구체적인 동학농민군 토벌 총지휘는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

- 일본의 입장에서는 침략에 저항하는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단계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 이 부대는 1년 후() 명성왕후를 시해하게 되는데, 심지어 조선의 관군마저 동학농민의 편이 아니고 일본 편

-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 선 민보군 · 보부상, 일부 과격한 농민군의 무기고 탈취와 군량의 헌납요구 등으로 피해를 입었던 이들이 토벌에 앞장섰던 것, 일본군을 앞에 두고 내부에서 하나가 되지 못했던 조선,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농민군이지만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 마치 임진왜란 때 일본이라는 외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宣祖)와 조정의 관료들이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해 모아진 의병을 해체해 버린 경우와 같아 안타까운 일

민보군(民保軍) :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양반·유생·향리들이 지원자를 모집해 구성한 민병대

- 당시 동학농민군 학살에 이용된 <우지개> 자신들이 추수한 볏짚에 처형당한 농민들, 또 다른 처형도구 작두 그리고 동학농민군 학살의 현장인 충남 태안의 목네미 샘은 네 명을 세워놓고 한 명을 지명하여 셋의 목을 치게 되면 너를 살려준다고 하고서 실행하고 나면 이제는 네 차례다면서 처형하여 네 명의 목이 떨어졌다 하여 <목네미 샘>이 됐다는 것, 갑오년에 일본군이 했던 짓은 얼마나 심했든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고 심지어는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에 참여했던 한 일본군 대위는 작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일본군 병사가 쓴 일기> 학살을 한 일본군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것

 

동학농민군, 그 후

- 동학농민군의 최후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데 전봉준은 1894122일 순창에서 체포된 후 1895329일 처형되는데 당시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 없었던 전봉준, <안도현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작 제목이 <서울로 가는 봉준이>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넨 말 오늘 나는 알겠네.” <안도현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 또 다른 지도부였던 강경파 김개남의 비참한 최후, 양반지주들의 분노로 서울로 압송되기도 전()에 능지처참당해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상황, “역적으로 낙인찍혀 족보를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용어로 교과서에 등장한 것도 근래이고 그 전()에는 동학난으로 기록됐던 것

- 그렇다면 조병갑은 어떻게 되었나?

이후 복직돼 고등법원 판사가 된 조병갑은 1898년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판결하는데 현대사에서 친일파들이 독립군 출신들을 처단하는 격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목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인 동학농민운동

- 갑오년에 패배당하고 난 뒤에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에서 탄압을 받고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에도 오랜 시간 반란으로 낙인 찍혀 교과서에도 <동학난>으로 매도됐었는데 여기에는 일본군들이 교묘하게 그렇게 만든 것도 있지만 양반·지주층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과거에 나쁜 짓을 했던 사람으로 매도한 우리 내부의 책임도 있는 것,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때 명예회복사업 시작해서 110년이 지난 20043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어 공식적인 이름은 <동학농민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