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의 조선 ‘그들’이 있었다. <제3편, 피로인(被擄人)>
〇 사라진 10만의 백성 ‘피로인’
- 최초의 일본백자 제작자인 피로인 도공(陶工)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아버지’ 이삼평은 죽은 후 신으로 모셔지는데 죽은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일본의 <인신사상(人神思想)>, 일부 피로인들은 고향을 뒤로하고 영혼마저 일본에 봉인되면서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망향의 한(恨), 조선과 일본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었던 피로인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 한다.
- 임진왜란 휴전 후(後) 3년인 1597년 음 1월 14일, 왜군14만 명을 앞세워 조선을 재침략한 정유재란(1597~8년)이 발발한 것, 순식간에 막대한 병력을 잃고 퇴각하던 조선 수군은 거제도 서쪽에서 야습을 당하고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칠량전 해전>에서 대패하게 된다.
- 파죽지세로 북진한 왜군은 구례를 지나 남원성을 함락하고 호남 전역을 점령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이고 불사르는데, 혈안이 된 무사들의 소리가 시끄럽고, 마치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비참한 광경이구나.” <1597년 8월 6일 게이넨, 조선일일기>
- 왜군이 나타나는 곳마다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처참한 살육전이 이어지면서 생사조차 알 수 없이 사라진 10만여 명의 조선 백성들, 조선은 그들을 피로인이라 불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을 묶고 끌고 가는데, 마치 원숭이 떼를 엮어서 걷게 하는 것과 같았고 소와 말을 다루듯 하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게이넨, 조선일일기>
※ 게이넨 : 일본 안요지사 주지 승려로 1597년 6월부터 약 7개월간 군의관으로 정유재란에 참전
- 우리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피로인, 포로는 전쟁관련자가 적군에 사로잡힌 경우이고 부로(俘虜)·부인(俘人)·피로인(被擄人)은 민간인이 끌려간 경우, <당할 피(被) 사로잡힐 로(擄)>로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뜻
- 임진왜란 피로인의 수는? <방기철,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전쟁 전후라서 정확한 숫자파악은 불가능하지만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조선인은 3~4만여 명이라고 하고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 피로인의 수는 그 2배가 넘는다는 기록으로 보면 약 10여만 명으로 추산
-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정설은 약 10여만 명으로 추산하지만, 학자에 따라 40만 명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당시 12만의 한성 인구 전체가 통째로 끌려간 셈
- 임진왜란 당시 민간인 납치는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숫자를 많이 축소하는 경향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축소하여, 현재 일본의 학계에서는 전체 피로인 수를 2~3만 여명으로 추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엄청난 시각차를 보이고 있는 것.
- 정유재란 당시 전쟁목적이 확실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경기·경상·전라·충청의 4도 중심으로 집중공격하여 남원성·울산성 전투에서 성과를 올리면서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 백성 피로인은 일종의 전리품인 셈
- 일본에서는 피로인 대신 스스로가 원해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으로 부르려는 시도를 했으나 도래인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는 정유재란 당시는 전투 병력만이 아닌 6개의 특수부대를 파견하는데, 금속부·공예부·보물부·축부·도서부 그리고 포로부, ‘포로부’의 존재는 침략 전부터 이미 조선인의 납치를 계획했다는 증거, 조선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건너왔다는 일본의 주장은 일제강점기 위안부에 대한 태도와 같은 억지
- 일본으로 끌려간 피로인의 운명은?
일본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심지어 외국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던 피로인, 아프리카 노예 매매는 먼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이었으나 이는 충격적인 것
〇 16C 대(對) 항해시대의 노예무역 <윤영휘, 광주대학교학술연구교수 / 서양근대사>
- 당시 조선 피로인을 사갔던 나라는 어디인가?
포루투갈 상인들, 이들은 전세계로 노예무역 범위를 넓히며 일본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초기에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노예매매
- 일본 백성들은 어떻게 노예가 되었나?
① 내란에서 포로가 된 경우 ② 가난으로 가족을 판 경우 ③ 지방영주가 화약(火藥)과 교환한 경우, 그런데 문제는 일본 정부가 포루투갈 상인들에게 일본인 노예매매를 금지시키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부터이다.
- 일본인 노예무역이 불가능해진 이유는?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국민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개탄해하고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일본인 노예매매 금지를 포루투갈에 공식요청하면서 대체 공급처 제공하여 일본인을 대신해 조선 피로인을 노예매매로 추천한 것
- 당시 <프란체스코 카틀레티> 라는 이탈리아 출신 상인의 기록을 보면 “조선 지방에서 왜군은 연령을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자와 여자, 소년소녀를 잡아 왔는데,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 <나의 세계일주기>
- 피로인은 어디까지 팔려나갔나?
가까이는 포루투갈 식민지인 마카오·베트남·인도 심지어 유럽까지 많은 피로인이 노예로 팔려갔던 것, 노예시장에서 조선인 노예를 선호한 이유 ① 근면함 ② 낮은 가격으로 위의 기록에서 그는 “조선인 노예 중 5명을 12에스쿠도에 샀다” 당시 흑인 노예 한명 가격은 약 100에스쿠도로 1/40 가격 수준의 조선인 노예 & 당시 포루투갈 조총 1정 가격은 120문이고 조선인 피로인 한명의 가격은 3문으로 조총 한 자루 가격이면 조선인 40명
- 임진왜란 때문에 세계노예무역 시장이 커졌다?
정확히 말하면 ‘은(銀)의 수요’가 늘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 임진왜란은 한·중·일이 싸운 동북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당시 모든 참전국은 은(銀)으로 전쟁비용을 충당, 따라서 전(全) 세계적으로 은(銀)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것
※ 전쟁과 노예무역 확산과의 역학관계 : 임진왜란 → 은(銀)의 수요증가 → 은광개발 활성화 → 노동력의 필요 → 세계노예무역 규모 확장
- 피로인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윤영휘 교수, 광주대 서양근대사 전공>
노예무역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가끔은 감상적이지만 이런 질문을 해보는데, 당시 노예로 끌려가던 사람은 왜 살았을까? 어떤 것이 이들의 삶의 이유였을까? 어쩌면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고통을 견디고 살았을 것
-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희망을 찾아야만 했던 최악의 순간은 국제간의 대립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피로인을 비롯한 세계적인 노예의 삶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무역규모의 변화라는 큰 구도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
- 당시의 노예는 국제적 · 경제적 역학관계에 휘말려 처참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던 사람들로 전쟁의 피해자가 오히려 그 전쟁의 자금을 조달하는 아이러니···
〇 일본에서 노예로 팔린 피로인
- 당시 일본은 해외무역에 관심이 많았는데, 주로 나가사키에서 무역이 이루어졌다. “나가사키 근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구매하는 한편 포획하기 위해 직접 조선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었고, 중국 배에서 이들을 포루투갈 상인에게 팔았다.” <1598년 9월 4일, 루이스 세쿠에이라>
※ 루이스 세쿠에이라 : 당시 일본을 관할하는 천주교 신부
- 나가사키는 슬픈 역사의 현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 투하지역, 피로인 뿐만 아니라 이후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으로 수백 년 전부터 아픈 역사가 반복됐던 곳.
〇 피로인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나?
- 일본에 남은 피로인의 삶은?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노동력이 부족하여 대부분 부역(賦役)이나 잡역에 동원, 납치하기 어려운 힘센 남자들보다 약한 어린아이·여성들을 선호했던 왜군 “양반가의 여성들 중 미색이 뛰어난 자를 납치해왔다” <쇄미록, 오희문이 쓴 일기>
- 주목할 것이 그냥 미색이 뛰어난 것이 아니고 ‘양반가 여성’의 의미는 일반적인 성적(性的)대상이 아닌 향후 일본사회 내 교양교육에 이바지할만한 사람을 목적으로 했다는 의미이고 그 외에도 바느질 등 기술을 가진 여성도 납치의 대상에 포함
- 피로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삶의 모습을 증언하는 피로인 개인의 기록은 거의 없어···
〇 피로인 강항이 쓴 <간양록(看羊錄)>
- 일본의 진면목을 기록한 <간양록>을 저술하다. “왜구(倭寇)는 영광까지 들이닥쳐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지만 항해 9일 만에 적들에게 붙잡혀 왜군들의 칼끝에 식솔들이 살해당하고, 막내아들과 딸은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고 그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 해변에는 조선인 시체가 산더미처럼 싸였다.”
- “수천척의 왜선, 타고 있는 이들 반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밤마다 이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물결 역시 흐느끼는 듯했다. 나는 기어이 살아 일본에 당도했으나 숨 쉬는 것조차 한스럽다.”
- “그러나 나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조선에서는 알지 못하는 왜국의 실상과 피로인의 삶, 나는 조선의 선비로서 진짜 일본의 참모습을 글로 남기려 한다.” <간양록>
- <간양록>의 저자 강항은 누구인가?
1567년~1618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유재란(1597년)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약 3년간의 피로인 생활을 하게 되는데, 강희맹의 5대 손으로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로 정유재란 당시에는 남원성 군량미 조달업무를 맡고 있었으나, 왜적의 남원성 함락으로 의병을 모집하다 여의치 않게 되어 가족들과 서해바다로 탈출을 시도하다 뱃길을 잃고 왜군에 사로잡히게 된다.
- 잡히자마자 수차례의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던 상황으로 조카가 바닷물을 먹고 배앓이를 하자 산채로 바다에 던져버리는 왜군, 아버지를 부르며 바다 속으로 사라진 아이를 잊을 수가 없었다는 기록
- 강항이 일본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이유는?
일본의 정세를 조선에 알렸던 강항은 1598년에는 탈출하는 피로인 김석복(권율장군 노비)에게 1599년에는 왕건공 · 신정남에게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의 정세를 조선에 알렸고, 이 중 왕건공의 글이 조선 조정에 전달 “이 글을 전하께서 보실 수 있다면 왜국이 만 리 바다밖에 있다 하더라도 놈들의 간담이 눈앞에 뚜렷이 드러날 것이 옵니다” <간양록, 적중봉소>
- 강항이 가진 삶의 의지는 조선에 일본의 실상을 알리려는 일념 ① <적중봉소(賊中封疏)>는 적중에서 올리는 상소로 왜국의 형세와 우리의 국방정책을 비교하여 기록 ②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은 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의 기록으로 왜국 8도와 66주도 등 지도를 싣고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첨부 ③ <고부인격(告俘人檄)>은 포로들에게 고하는 격서로 적지에 남아있는 포로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기 위한 글 ④ <섭란사적(涉亂事迹)>은 포로시절부터 귀국했을 때까지 쓴 일기로 환란생활의 전말을 기록한 것, 이들은 정리해 나중에 <간양록>이 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왜군에 대한 복수의 결기를 담은 기록
- ‘결기(決氣)’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무덤 <도요쿠니 신사>에 쓴 기록 “대명 일본에 온 세상을 떨친 호걸이 났도다. 태평한 길을 열었으니 그의 덕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아라.” 이를 본 강항은 격분하여 붓으로 먹칠을 하고 다시 쓴다 “한 평생 경영한 게 한 줌의 흙 된단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구나. 탄알만한 네 땅 지금 남의 손에 갔느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한 행동
〇 <간양록>, 조선에서 일본을 읽다.
- 피로인의 신분으로 어떻게 정보를 모았나?
당시 일본에서는 승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자를 모르는 문맹자, 강항은 피로인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학식을 인정받아 특별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지식인인 승려 · 다케다 성주 · 일본 성리학의 대가인 <후지와라 세이카> 등 일본인 상류계층과 교류하면서 다른 지역의 양반출신 피로인들과 서신으로 교류하며 각종 정보를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
- 기록에는 일본 관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 출병한 대장의 이름 · 대립 및 이해관계 · 행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급습을 당한 조선에서는 구하기 힘든 고급정보이고 1급 군사기밀인 일본지도까지 8도 66주를 상세히 그려 보냈는데, 이 지도는 강항이 억류돼 있던 성주(城主)의 아버지 것을 빌려 보고 그린 것
- 이 분이 위대한 것이 “인간은 어떤 극(極)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되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도 삶의 이유와 역할을 찾아냈다는 인간의 위대함
- 강항은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나?
피로인 생활 중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요’에 머무르고 있을 때, 다이묘를 찾아가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고 일본의 유력 층들의 도움으로 1600년 5월 19일 피로인 생활 3여년 만에 고국 땅 부산을 밟을 수 있었던 것
- 귀국 후, 스스로를 죄인으로 자처하며 살아 책이름이 처음엔 <건차록(巾車錄)>이었는데, 건차는 죄인이 타는 수레로 적국의 포로가 된 것을 조선 양반들은 불충으로 인식했던 것
- 강항은 <간양록>이라도 남겼지만 이름도 없이 기록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수많은 피로인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의 기록 “다리 위에서 열 사람을 만나면 그중 열에 아홉은 다 조선 사람이다.” & “한숨지어 울부짖기도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 가수 조용필이 부른 <간양록>은 책에 수록된 시를 발췌하여 신봉승 선생이 작사한 곡이라는데 조선 선비가 타국에서 유서대신 쓴 비애의 정한(情恨)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곡으로 마치 죽은 자를 위한 상엿소리를 닮은 후렴구는 전율을 느낄 정도···
〇 비공식 외교 사절단, 사명대사
- 나머지 일반 피로인의 삶은?
7년간의 전쟁이 끝났으면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승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선의 고승 사명대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그가 조선의 비공식 외교관으로 일본에 파견 됐던 것.
- 사명대사는 적국의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독대를 한다. “너는 도대체 어느 산에 사는 새이기에 여기 봉황의 무리 속에 뛰어 들었는가?” 이에 사명대사 왈(曰) “하루아침에 오색구름이 사라지는 바람에 잘 못하여 닭 무리 속에 떨어졌노라” 사명대사의 담대함에 탄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피로인 쇄환(刷還)을 약정한다.
- “사절단이 가는 길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온 조선인들이 가득했다” 1605년 최소 1,000여 명의 피로인이 사명대사와 함께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영화 사명당>에서 보듯이 사명대사는 조선 백성들에겐 영웅 같은 존재이고 일본에게는 두려운 존재로 사명대사는 일반적으로는 승병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특출한 장수이자 외교술까지 뛰어났던 것.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전성에 비해 조선과 국교재개를 원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당시 외교의 적임자였던 사명대사와의 만남, 다행히 피로인 쇄환(刷還)에 적극적이었던 선조(宣祖)는 교지를 내린다. “왜적에게 잡혀간 백성의 죄는 묻지 않으며, 왜적을 잡아오거나 포로로 잡혀있는 동포를 데리고 나오면 양반천민을 막론하고 벼슬을 시켜주겠다. 아울러 명(明)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소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왜국까지 쳐들어갈 계획도 있으니, 그전에 빨리 왜적의 손에서 빠져 나오라” 이후, 1607년 공식적으로 ‘회답(回答) 겸 쇄환사(刷還使)’ 파견, <살필 쇄(刷) 돌아올 환(還)>으로 잘 조사하고 돌아오라는 뜻의 쇄환사
- 전후 8년만의 <회답 겸 쇄환사> 파견, 너무 늦지 않았나?
7년간의 오랜 전쟁으로 회복하기 어려웠던 조·일(朝日)관계, 이런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양국이 교류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조선이 왜 이를 받아들였느냐하면 당시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강성해지던 상황으로 남북 양쪽 모두를 적으로 둘 수는 없었던 조선과 일본, 양국의 입장이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국교재개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
〇 피로인 귀국을 위한 ‘회답(回答) 겸 쇄환사(刷還使)’
- 통신사와 <회답 겸 쇄환사>는 무엇이 다른지?
‘통신사’는 말 그대로 신뢰가 서로 통하는 사신이라는 의미, 하지만 조선은 일본을 아직 용납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통신사 대신 ‘쇄환사’라는 용어를 사용, 일본의 국교요청에 대한 ‘회답’과 피로인을 귀국시키기 위한 ‘쇄환(刷還)’으로 조정의 목적과 의지가 뚜렷하게 담긴 <회답 겸 쇄환사>
- <회답 겸 쇄환사>, 이들의 성과는?
기대만큼 크지는 못했음 ① 1607년 1차 쇄환 1,249명 ② 1617년 2차 쇄환 321명 ③1624년 3차 쇄환 146명으로 조선으로 귀환한 피로인은 약 6~7천여 명,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일본인들의 사유재산이 된 조선 피로인을 일본인들은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
- 또한 10년·20년·30년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생활에 적응해 가는 피로인들 “쇄환인 등이 서로 이끌고 따라오며 말 앞에서 통곡하였다. 부산에 와서는 의지할 곳이 없고 고향으로 가고자해도 또 길을 알지 못하여서 이리라. 이 때문에 울부짖으며 따라오니 정경이 지극히 가련하였다” <1625년 3월 7일, 강홍중의 동사록>
※ 피로인 정착 지원제도 : 1607년 10일분 식량지급, 1624년 5일분 식량 지급
- 조선정부는 피로인 쇄환에는 적극적이었으나, 돌아온 피로인 정착정책은 부족했던 것으로 귀국과 동시에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가족·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는 소년 피로인들을 노비로 삼은 조선 양반들, 이러한 흉흉한 소문에 귀국을 포기했던 피로인들로 귀환하는 피로인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게 되는 것
〇 조선의 피로인 차별
- 조선에서 피로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피로인이라면 양반·남자도 당해야 했던 차별로 과거에 합격을 했어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정도, 피로인 신분으로 일본에서 온 힘을 다해 <간양록>을 기록했던 강항도 정작 조선으로 돌아온 후로는 행적의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음
- 피로인 중 일본의 첩자로 몰린 박수영 “1605년 비변사가 박수영이 왜적에게 빌붙어 나라를 배반한 죄를 지었으니 형벌로 다스리라고 하니 선조(宣祖)가 ‘윤허한다’고 답했다.” <선조실록> 첩자로 몰린 피로인이 한 둘이 아니고 김관이라는 사람은 조·일 국교재개를 주장하다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고 현대에 이어지는 제일동포 간첩단 사건, 그리고 조정의 허술한 정착제도와 척박한 대우로 일본에 남게 되는 피로인들도 많았던 것
〇 일본의 신(神)이 된 조선의 피로인, 도공(陶工) 이삼평
- 16세기 일본 막부 권력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다도(茶道), 이 때 인기를 끌었던 조선의 자기로 정유재란 당시 조선 도공(陶工)을 납치하라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글을 배웠거나 도공 등 기술을 가진 자들을 포로로 끌고 오라, 포로 중에 도공은 가장 먼저 보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포고문>
- 일본 규슈 아리타에는 이때 끌려온 한 도공을 기리는 비가 남아있는데, 그는 백색(白色) 자기를 만드는 흙을 찾기 위해 일본 전역을 떠돌아 다녔고, 마침내 20년만인 1616년 백자의 재료 이즈미야마 도석을 발견하여 일본 자기 사(史)에 큰 획을 긋는다.
- 아리타 주민들이 도공을 찬양하며 세운 신사에는 그가 만든 일본 최초의 백자가 남아있고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에서 신(神)이 되어 이삼평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 신(神)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을 신사에서 신으로 모시는 관습인 인신사상, 신(神)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의미, 또한 섭씨 1,250도의 고온(高溫)에서 도자기를 굽는 고온소성의 세라믹 혁명을 이끌었던 이삼평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 “400년에 걸쳐 하나의 산(山)을 도자기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즈미야마 자석장 안내판>
- 도자기 제작기술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일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고, 사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는 도자기 제작기술이 전무(全無)했었고 16세기 도자기 제작기술은 중국·조선·베트남에만 존재했던 것, 정유재란 시(時) 약 1,000여명의 조선 도공(陶工)을 납치해 당시 세계 4번 째 도자기 제작국가가 된 일본은 17세기에는 유럽으로 수출하기 까지도···, 신(神)이 된 피로인들은 영혼마저 일본에 묶여있는 셈
- 또한 일본 도자기의 장인(匠人) 심수관은 정유재란 피로인이었던 심당길의 후손으로 14대 째 청송 심씨 성(姓)을 유지하고 있는 가문, 그의 인터뷰 내용 “이 마을 곳곳에 망향의 언덕이 있습니다. 그 언덕에 서면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조상들은 그 바다 건너 한국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방향이 다릅니다. 한국 쪽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저 바다만 건너면 한국이 있다는 생각으로 망향의 언덕위에 서서 주머니 속에 간직하던 망건을 꺼내 쓰고 고향의 부모님을 향해 절을 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도자기 가문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고국을 잊지 못하는 400년의 망향가는 선조(先祖)들이 사용하던 망건으로 대신하며 아직도 대를 잇고 있다.
〇 일본에서 신(神)이 된 피로인
- 피로인들 중에는 도공보다 안타까운 삶을 살았던 신(神)이 된 피로인, 양부모에 의해 살해되어 동자신이 된 다쿠의 <고려 콘겐>, 조선의 똑똑한 아이를 양자로 삼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변하여 양부모는 아이를 살해하고, 그 후 계속 집에 우환이 겹쳐져 이를 막기 위해 다시 신(神)으로 모셔졌다는 안타까운 사연
- 또한 나이 10세에 피로인이 된 홍호연, 일본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후손들을 위해 주군(主君)이 죽었을 때 따라서 할복자살했던 인물, 일반적인 할복은 주군의 49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하지만 후손들을 위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고 주군을 따라 바로 할복하게 되는 것, 그의 마지막 유서에 쓰여 있는 한 글자는 ‘참을 인(忍)’ 자신의 후손만이라도 지켜내겠다는 마음이었을 것
- 안타까운 것은 조선 정부는 조선에 투항한 항왜에게는 관대했으나, 반면 일본에 끌려갔다가 고국을 잊지 못하고 돌아온 피로인들에게는 냉대했던 것, 사실 이들은 일본에서의 생활로 누구보다도 일본을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경험을 전후(戰後) 복구에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었으나 “조선남자로 전후(戰後)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혀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 <정희득 월봉해상록> 하지만 조선정부는 피로인들을 냉대로만 일관했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
- 역사 속에 잊혀진 존재 피로인, 전쟁이 주는 상처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피로인의 연구, 한·일 양국이 서로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좀 더 점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
- 일본의 어느 역사학자는 “임진왜란은 일본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유학이었다.” <도코도미 소호> 야만적 침략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의 고통과 운명에 걸맞지 않는 자신들의 눈높이의 사치(奢侈)라는 단어, 오히려 ‘가장 수치(羞恥)스러운 유학이었다.’ 라고 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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