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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등전의 조선 ‘그들’이 있었다. <제4편, 분조(分朝)>

mkpark2022 2015. 9. 5. 17:07

 

 

풍전등화의 조선 ‘그들’이 있었다. <제4편, 분조(分朝)>

 


임진왜란, 임시정부 선포하던 날

-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약 한달 만에 평양성 함락, 조선은 벼랑 끝까지 내몰리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임시정부로 탄생한 분조, 하지만 실록에는 거의 실려 있지 않은 조선 최초의 임진왜란 임시정부 분조의 이야기

- <드라마 징비록> “15926월 평안도 영변의 임시정부 조정에 비보가 날아드는데, 일본이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위협한다는 소식, 다급해진 선조(宣祖)는 명나라 요동으로 피하려 하지만 신하들의 강한 만류에 부딪히게 된다.”

- “고민 끝에 선조(宣祖)는 조정을 둘로 나누고 자신은 요동으로 피하고 조선에 남는 세자에게 임시조정을 맡기기로 결심을 하고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반대를 하지만 선조(宣祖)는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 날인 614일 선조(宣祖)와 세자 광해군은 나란히 길을 떠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조정이 둘로 나뉜 것이다.”

 

임진왜란 임시정부, 분조(分朝)

-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분조(分朝), 국가가 비상시 세자에게 국정의 일부인 인사권·상벌권 등 국정운영을 맡긴 것

- 조정(朝廷)이 건재한데 임시조정을 만든 이유는?

당시 조정이 엄청난 위기에 몰렸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은 절대적인 덕목이지만 분조(分朝)가 생긴다는 것은 왕이 동시에 두 명이 되는 셈인데 이를 감수하면서 분조를 만든다는 것은 왕실을 지키기 위한 절박감 때문

- 조선 최초의 분조탄생, 둘로 나뉜 조정(朝廷), 선조(宣祖)가 요동 행을 고집한 이유?

당시 선조(宣祖)는 평양에 있었으나 1592. 5. 20 임진강 방어선이 붕괴되자 가급적 북쪽으로 올라가려 하고 신하들은 평양을 지키자고 주장하지만, 선조(宣祖)는 좌의정 윤두수에게 세자와 함께 평양을 지키도록 명한다.

- <정강의 변>1126~1127년 금나라 군사의 공격을 받아 북송이 멸망하면서 () 황제 휘종(8) 과 흠종(9)을 납치한 사건으로 당시의 금()나라처럼 부자가 모두 납치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선조(宣祖)의 입장에서는 한 명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어서 분조의 설립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 평양을 떠나는 것에는 백성들도 반대 평양군민들이 난()을 일으켜 몽둥이로 궁비를 쳐 말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선조실록 25610>

궁비 : 왕비를 모시는 궁녀

- 결국,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피신했으나 대동강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요동으로 가겠다는 선조(宣祖)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선조실록 25613> 한 나라의 왕으로서 리더십을 보여야할 때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

-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와 마가렛 공주를 캐나다로 대피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는데 왕비가 말하기를 아이들은 나 없이 지내지 않을 것이며, 나는 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조지 6세 왕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집권층의 결사항전의 의지가 영국 국민을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됐던 것

- 국왕이 요동으로 가는 것을 반대한 신하들, 국왕은 대일항전의 구심점역할로 국왕이 국외로 나갈 경우 항전의지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 이에 선조(宣祖)는 명()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는 것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명()의 참전에 회의적이었던 신하들, ()의 도움으로 국권을 회복하더라도 결국 명()과 일본이 전쟁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을 했던 것.

- 당파를 초월해서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과 서인의 영수였던 윤두수, 특히 윤두수가 선조(宣祖)의 요동 행을 강하게 반대하자 선조(宣祖)는 타협안으로 분조를 제의 하는 것

- 조선 역사상 분조가 다시는 없었나?

1627년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소현세자에게 분조를 맡기면서 떠나게 되는데, 분조를 선택한 왕들의 공통점은 자기안위우선책임회피, 최근 신병주 교수에게 친구들이 자주 묻는 말 선조(宣祖) VS 인조(仁祖) 누가 더 무능하냐는 것, 선조(宣祖)는 피란 1VS 인조(仁祖)는 피란 3

 

분조의 주요 호종신(扈從臣)

- 분조에서 세자 광해군을 보좌한 사람은 누구?

당시 광해군의 나이 18세로 세자를 위해 신경을 써서 신료를 선발한 선조(宣祖)는 정치적 경륜과 경험이 풍부한 신하들을 선발하였으나, 문제는 고령(高齡)의 나이에 분조를 호종(護從)하게 된 신하들.

- 호종신하들 중 정탁은 정유재란 시, 명령불복종 죄로 처형위기에 놓인 이순신을 옹호해 백의종군하게 만든 일등공신, 그의 중요한 업적은 분조(分朝)의 활동을 일기로 기록한 <피난행록>을 남겨 실록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분조의 활동이 확인 가능하게 한 것

 

분조의 험난한 여정(旅程)

- 1592614, 왕세자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는 영변을 출발,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이동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고, 호종대신 10여 명 남짓의 초라한 행렬

- 쏟아지는 비를 피해 노숙하는 날도 부지기수로 고된 행군에도 불구하고 이를 멈추지 않는 분조(分朝), 영변을 출발한지 20여일 만에 강원도 이천(伊川)에 도착하여 비로소 임시조정의 틀을 갖추기 시작, 사라진 줄만 알았던 조정이 건재하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기뻐하며 몰려든다.

- 분조(分朝)가 출발하기 한 달 전에 아이를 낳은 세자빈, “12일 왕세자의 빈궁께서 해산 하셨다” <1592512, 피난행록> 피난 중에 출산을 하게 되는데,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아기로 보아 일찍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

- 종묘의 신주(神主)까지 모시고 가야했던 분조, 역대 조선의 국왕과 왕비의 신주 20여 기를 모시고 이동해야 했던 것

- 종묘의 신주는 어떻게 생겼나? <이현진,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교수>

일반 사대부의 신주보다 약 30cm가 컸던 종묘의 신주는 여성의 상반신 크기와 비슷, 분조는 종묘의 신주를 어떻게 옮겼는지는 문헌으로 남아있지 않고 크기와 무게 때문에 직접 들고 다니기는 힘들었을 것, 비슷한 예로 병자호란 때 역대 임금의 신주를··· 섬거적 속에 넣어 말에 싣고 남녀종을 태우고 갔다.” <연려실기술 제26> 임진왜란 때에도 말에 실고 갔을 것으로 추정

- 조선왕실에서 종묘의 신주가 상징하는 의미?

유교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 살아계실 때에도 효를 다해야 하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효를 계속해야 했던 조선, 조상의 혼령인 신주를 두고 가는 것은 선조(先祖)를 버리는 불효로 왕실에서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종묘의 신주를 가장 먼저 챙겼고 임진왜란 발발 시에도 국왕보다 먼저 개성으로 옮겨진 종묘의 신주는 국가의 상징 역할을 했던 것

- 분조에 종묘의 신주를 맡긴 의미?

국가를 책임질 세자가 곧 광해군이고 광해군이 종묘의 신주와 사직의 위판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그에게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는 것.


분조활동의 시작, 이천(伊川) 분조

- 분조활동의 초기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 이천, 대부분 경기도 이천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사실은 강원도 이천(伊川), 이 지역은 함경도·황해도·경기도의 접경지역, 선조(宣祖)는 분조를 평안도 강계(江界)로 갈 것을 지시했으나 이동 중에 일본군이 함경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분조는 고민 끝에 강원도 이천으로 변경하게 되는데, 이는 적극항전을 주장하는 호종신들의 성향이 목적지 변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 “온 나라의 인민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東宮)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습니다.” <피난행록 1592717> 일제강점기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분조가 임시정부의 역할을 했던 것

- 임시정부하면 상해임시정부를 연상하듯이 분조가 활동한 지역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천 분조, 분조(分朝)에는 팔도 감사들의 장계(보고서)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현직 관료들이 분조에 합세하면서 의욕적으로 국난수습활동을 한다.

 

선조(宣祖)의 견제? 탄핵당한 분조

- 분조가 이천에 도착한지 보름이 되는 1592725, 선조(宣祖)가 있는 의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오는데 대간들이 분조대신들을 탄핵(彈劾)한 것, 강계로 가라는 선조(宣祖)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모든 신하들을 삭탈관직 하라는 선조(宣祖)의 어명에 분조는 긴장감에 휩싸인다.

- 분조에 재량권은 없었나?

사실 분조는 <편의종사권(便宜從事權)>이라고 임금의 지시나 명령이 없이도 일정량의 정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이를 행사하여 변경한 것, 하지만 탄핵의 핵심은 선조(宣祖)의 명을 어겼다는 것으로 실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탄핵으로 보아 조정에서는 크게 문제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고 왕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임.

- 선조(宣祖)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노력한 분조, 수령을 임명할 때도 한시적이라는 의미로 권차(權差)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고, 수시로 선조(宣祖)에게 업무상황을 보고한다.

권차(權差) : 임시로 발령하여 벼슬을 임명하는 것

- 당시의 장계를 분석해 보면 지극히 미안 합니다” <피난행록, 1592. 7. 23> “참으로 미안 합니다” <피난행록 1592. 7. 28> “매우 미안 합니다” <피난행록 1592. 8. 19> 미안하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그 만큼 선조(宣祖)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는 증거, 하지만 여기의 미안은 현대 의미의 Sorry와는 조금 다른 표현으로 국왕의 권한을 대리하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다는 의미

- 선조(宣祖)가 왕세자 분조를 위로한 사례는?

기록에는 없으나 선조(宣祖)의 경우도 분조에 대해서는 신경을 썼던 듯 동궁을 모시는 신하들이 날씨가 추운데 옷이 얇으니 걱정스럽다. 각 고을로 하여금 의복의 자료를 일부 나눠주게 하라.” <선조실록 2586> 분조 역시 최종책임자는 선조(宣祖)로 분조의 예산도 지원하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참장 곽몽징이 ()황제가 하사한 은 2만 냥을 가지고 오다.” <선조실록 25624> 이 은()의 행방이 궁금했는데 <피난행록>에 기록된 은의 행방 ()을 하사하였는데 당상관은 20냥이고 당하관은 각 10냥이었다.” <피난행록 159296>

 

분조(分朝)의 활약

- 전국의 의병들에게 격문을 보내 대일항전을 촉구하여 임진왜란 초기 반전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분조, 세자가 쓴 격문은 남아있지 않은데 의병장 김천일의 문집에 기록된 광해군의 격문 내용 나라의 존속과 멸망이 오직 제군이 적을 죽이는 데 달렸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라. 힘써 큰 공을 길러라” <김천일, 건재문집> & “김천일의 군중에 왕세자께서 친필유서를 내리자 여러 군사들이 감격하여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727일 피난행록>

- 분조(分朝)의 격려로 의병들은 대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고 사기가 진작됐을 것, 특히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우리와 함께 적진(敵陣)에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던 것, 의병들의 사기고취 + 분조의 실질적 지원 ()을 베거나 곡물을 지원한 천민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하여 공명첩을 발급한다든지 천민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허통(許通)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하여 분조의 지원 아래 관군보다 높은 성과를 보인 의병.

공명첩 : 수취인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백지 임명장

- 임진왜란 초(), 비변사에서는 백성들을 의병으로 나서게 할 방안까지 논의하여 의병이 전쟁을 극복하게 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한 분조(分朝), 분조는 강원도 이천에서 평안도 · 황해도 지역을 이동하며 군사작전을 펼쳐 일본군의 연계를 필사적으로 막고 분조의 활약으로 전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다.

 

분조의 해체?

- 15931월 평양성 전투, 조명(朝明)연합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투 3일 만에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선조(宣祖)는 분조를 폐할 것을 명하고, 분조는 1593120일 임무를 마치고 평안도 정주로 귀환하게 되면서 임란 초기 조선의 임시정부 역할을 했던 분조(分朝)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 선조(宣祖)가 분조를 폐한 이유?

() 제독 이여송이 평양성 수복 이후 선조(宣祖)에게 직접 전쟁을 지휘할 것을 요청 하지만 조정에 대신들이 없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좀처럼 남하(南下)하지 않자 그러면 합조(合朝)하라고 제안했던 것, 또한 기본적으로 임시조정 분조(分朝)는 대조(大朝)와 합해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군량의 원활한 지원을 위해 선조(宣祖)가 직접 나서라고 요구한 것

- 7개 월 간의 분조활동이 전란극복에 미친 영향?

분조(分朝)는 적극적인 전략구상이 아닌 일시적인 판단으로 탄생한 조직이긴 하지만,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결국 대일항전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또 분조에서 전국적인 항전을 일으키는 중심이 됐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

- 격전(激戰)이 치열했던 임진왜란 초반 1(15924~15934)의 골든타임의 시기는 광해군의 분조의 시기와 겹치는 시간으로 평양성 수복과 여세를 몰아 행주대첩의 승리로 한양수복 등 전세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당시 백성들에게는 우리의 콘트롤 타워가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분조(分朝), 임진왜란 격전의 한 가운데는 그들, 분조(分朝)가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