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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일본의 볼모가 된 영친왕(英親王)

mkpark2022 2015. 9. 9. 23:09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일본의 볼모가 된 영친왕(英親王)

 

 

〇 일본의 볼모가 된 영친왕(英親王)

- 대한제국을 넘어 일제강점기로 격동의 시기 한가운데 그가 있었으니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1살의 나이에 황태자에 올랐으나 기약 없는 인질살이가 시작되는데··· 대한제국 황태자의 일본행, 그 배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누구보다 귀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영친왕, 그는 왜 일본으로 떠나야 했나?

- 1907년 12월 일본 동경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 한 소년이 타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황태자 11세의 영친왕, 책봉된지 불과 4개월 만에 그의 모습이 일본에서 포착된 것, 그런데 항상 그의 곁에 있던 한 사람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 그들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 영친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비운의 황태자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인물,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境界人)으로 여겨지기도···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와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오버랩되는 부분이 존재하고 실제로 1940년 7월 6일 에는 오사카에서 둘은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 영친왕(英親王)은 왜 일본에 끌려갔나?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高宗)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게 되고 순종(純宗)이 즉위를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당시 한국에 설치돼있던 통감부에서는 고종(高宗)이 일본에 반(反)하는 행위를 자주하게 되니까 일본에 우호적인 친일파 황족을 키워보자는 판단으로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을 일본에 데려가기로 한 것

※ 헤이그 밀사 사건 :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한 사건

- 일본의 표면적인 이유는 대한제국 차기 군주에게 선진학문교육을 받게 하기 위한 것, 당시 대한제국에 서양식 교육체계가 도입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어서 일면 수긍할 수 있지만 조선왕실의 전통적 왕세자 교육과정을 무시하고 데려가는 건 의심스러운 부분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

- 세자는 왕에 견줄 만큼 중요한 존재, 유학 목적만으로 일본까지?

차기(次期) 대권을 이을 왕이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역사적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볼모가 돼야했던 공민왕(원) · 소현세자(청), 이들은 나라가 힘이 없을 때 인질로 끌려간 것으로 국민들은 과거의 치욕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에 반발, 왕실에서도 강력한 반대의견을 보이자 전략을 바꾼 일본, 고종(高宗) 강제퇴위 · 군대 해산 · 항일 의병 등, 반일감정이 고조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황태자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영친왕의 일본유학을 요청, 당시 요시 힛토 황태자는 훗날 다이쇼 천황으로 임명된 인물

 

〇 고종(高宗)이 가장 사랑한 아들, 영친왕(英親王)

- 형 의친왕이 아닌 막내아들 영친왕이 황태자가 된 이유?

당시 의친왕은 31세로 순종(純宗)의 후계자로는 부담이 된다는 점과 영친왕의 생모(生母) 순헌황귀비 엄씨가 고종(高宗)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점이 작용한 것

- 순헌황귀비 엄씨는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5일 만에 궁(宮)으로 들어온 인물로 배포와 정치적 감각을 갖춘 여인으로 아관파천기(俄館播遷期)에 영친왕을 임신하여 1897년 10월 20일 출생, 불과 일주일 전(前)인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이어서 고종(高宗)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당시 고종(高宗)은 46세 엄귀비가 44세로 상당한 노산

 

〇 영친왕 일본에서 특급대우(特級待遇)를 받다.

- 일본의 볼모가 된 영친왕, 일본의 대우는?

사실 왕실을 인질로 데려갈 때는 전혀 다른 것으로 향후(向後) 대한제국을 통치하게 될 영친왕에게 호감을 얻으려 했던 일본, 영친왕을 일본화 된 대한제국의 황제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일본 황태자와 똑같이 대우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토는 어린 영친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공세를 펼치는데 은(銀)으로 된 문구류 · 최신 장난감 · 영사기까지···

- 영사기는 조선에서 부터 영친왕이 좋아했던 기기로 강압대신 서서히 영친왕의 영혼을 잠식시키기 위한 방법을 택한 것, 심지어는 일본에 갈 때 영친왕의 동갑내기 친구와 가까운 시종(侍從)까지 함께 데려오도록 배려하여 안심을 시킨다.

-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意圖)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완벽하게 일본에 적응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이었고 영친왕도 이토가 자신을 잘 도와준다고 판단을 한 것이 이토를 태사님으로 부르면서 따랐다고··· 여름방학 때는 이토와 함께 일본 일주여행을 갔을 정도, 대한제국을 통치하게 될 황태자 영친왕에게 호감을 얻기 위한 치밀한 계획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친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 이토 역시 사람이라서 어린 영친왕에게 연민이 있지 않았을까(?)

- 대한제국의 황태자로서 민족적 자의식(自意識)이 부족한 점은 안타까운 것 아닌가? 하지만 일본의 무서움을 피부로 느끼는 황태자, 오히려 이토와 친해져서 조국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을까(?)로 반문(反問)하고 싶은 것

 

〇 영친왕(英親王)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란?

-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 서른 살의 한국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고 세 발의 총성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이토, 영친왕이 이토와 함께 일본여행에서 돌아온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 영친왕(英親王)은 이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나?

실제로 이토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던 영친왕은 고종(高宗)에게 보낸 전보에도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에게 부정적으로 표현, 여기에서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것이 국가적인 사안으로 볼 때는 이토를 죽였다는 것 자체가 앞으로 대한제국에 어떤 또 다른 가혹한 요구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영친왕에게는 무서운 일이었을 것으로 추론해본다.

- 당장 그 다음 해인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면서 황실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공식적으로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황실의 지위가 격하되어 순종(純宗)은 이왕 · 영친왕은 이왕세자로 대한제국의 황실은 일본 황실의 일부(一部)로 편입되는 설움을 당한다.

- 이토 죽음 후(後) 영친왕의 행보는?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해 1940년에는 중장까지 올랐던 영친왕, 군인의 적성에 맞았던지 휘하장병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으며 군인으로써의 두각을 나타낸다.

- 영친왕이 일본의 군인이 되어야만 했나?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등 전통적으로 황족(皇族)은 군인 신분으로 의친왕의 첫째 아들 이건도 군인 신분이었던 것

 

〇 영친왕의 한일정략결혼

- 1920년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지 10년으로 영친왕이 일본에 온지도 벌써 14년이 흘렀고 신문기사에 영친왕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영친왕과 일본 황실 여인의 결혼, 날짜와 상대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결혼 소식에 정작 당사자인 영친왕도 오늘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것, 당사자들도 모르게 극비리에 진행된 결혼은 영친왕의 인생과 고국에 큰 충격을 던진 사건으로 4월 28일 영친왕은 일본 황족 이방자와 결혼

- 결론적으로 말하면 1940년대 한국에 거류했던 일본인이 70만 명으로 한국인구 2300만 명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는 한국인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제결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결혼을 시키는데, 그 일환으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결혼을 하게 되는 것

※ 내선일체(內鮮一體) : 일본과 대한제국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강점기 한민족 말살정책으로 사용

- 일본은 조선의 황족들을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는데, 고종(高宗)의 막내 딸 덕혜옹주도 소 다케유키와와 결혼, 의친왕의 첫째 아들 이건도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했으며 의친왕의 두 번 째 아들인 이우는 정략결혼을 뿌리치고 한국인 박찬주와 결혼, 조선 황실의 기대주였던 이우는 총명하고 자기주장도 확고한 인물로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군인의 길을 걷다가 비극적으로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출근길에 히로시마 원폭에 피폭되어 사망하게 된다.

- 일본인과 결혼한 영친왕, 한국 내(內) 비난여론은?

독립신문에 기고된 내용 “이은(영친왕)이 원수의 여자를 취한 것에 대해 최후의 죄를 묻겠다. 오늘부터 영친왕으로의 존칭을 패하리라” <독립신문 1920년 5월 8일>

- 이들의 결혼은 고종(高宗)황제 승하시기와 맞물리면서 고종의 죽음을 독살의혹으로 반일(反日) 여론이 팽배했던 시기로 결혼식이 연기되어 이듬해 1920년 4월 28일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내가 결혼식 날 타고 온 의장마차가 도리이자카 언덕을 오를 때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 <이방자 수기집>

- 이방자는 어떤 사람?

당시 11개 가문의 50여 명이 소수(小數) 일본 황족출신으로 당시는 황족을 인간이 아닌 신(神)으로 여기던 시절, 이탈리아에서 출생한 이방자의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고 이방자는 신(新)여성으로 요시히토 황태자와 혼담(婚談)까지 오갔던 사이

 

〇 국제 정략결혼 영친왕의 심경

- 정략결혼에 대한 영친왕의 속내는?

3·1운동과 고종(高宗)의 승하 시점으로 영친왕은 결혼과는 별개로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국생활을 10년 이상 경험하면서 깊은 얘기를 나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상황의 외로운 영친왕에게 의지가 되어준 사랑

- 당시로서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자란 선남선녀, 둘의 만남은 개인적으로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 고종(高宗)의 승하로 슬픔에 빠진 영친왕을 진심으로 위로한 이방자 여사를 영친왕은 자신을 위해 끝까지 함께 갈 사람으로 확신을 했을 것 “결혼 당시의 즐거움이란 누구에게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행복감이 한층 더 절실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왕세자님은 가정적으로 심한 역경 속에서 성장하셨으니 신혼의 행복이 더 한층 즐거웠던 것은 물론입니다.” <이방자 수기집>

- 영친왕은 대한제국의 황태자라는 상징적 위치, 개인적 감정보다 민족을 우선(于先)시 했어야 하고 나라가 저 꼴인데 본인의 안락에 도피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영친왕의 유약(幼弱)함은 있는 듯··· 조선의 왕세자 교육을 받았더라면 지조와 절개를 지켰을 것인데 일본의 왕세자 교육으로?

- 결혼 1년 후(後) 아들 이진의 출산으로 1922년 4월 26일 첫 아들과 함께 처음 귀국하여 왕실의 어른을 만나고 종묘(宗廟)에 인사도 드리고 하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前) 8개원 된 아들의 급사(急死), 밝혀지지 않은 사망원인은 독살설 · 소화불량 등등

 

〇 영친왕(英親王) 유럽순방, 이대로 괜찮은가?

- 첫째 아들 죽음 5년 후(後)인 1927년에 1년간의 유럽여행을 떠난 영친왕 내외(內外), 1927년 5월 23일 요코하마 항(港)을 출발해 총 21개국 53개 도시를 방문하고 방문소식을 보도한 유럽의 각국 신문들 “마사코(이방자)의 가장 즐거운 추억은 1927년 4월부터 약 1년에 걸친 유럽여행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적지(戰迹地)를 개인 자격으로 시찰한다는 명분이었으며 각국에서 아주 따뜻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남프랑스에서 맛본 카니발의 흥분, 여행이 끝나갈 무렵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前) 겨울 한 달 동안에는 프랑스인 친일파 은행가의 호의로 칸 교외에 있는 호화로운 별장에서 보냈습니다.” 이 영상 필름은 그 은행가가 기념으로 제작해 두 전하께 선물한 것으로 추정, 영친왕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듯···

- 영친왕이 유럽순방기간 동안 기록했던 일기를 공개했는데 기관 및 단체를 돌아 본 소감과 각국의 정세(政勢)를 비교적 자세하게 담고 있다. 특히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기록한 대목이 눈에 띄는데 1차 대전 후 격동(激動)의 시기에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영국은 독일과 러시아와 현상을 회복해서 자신들의 상업적 처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프랑스는 반대로 단지 독일에게만 배상금을 원한다.”

※ 민족자결주의 : 각 민족에게는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정치이론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영향 ① 영국과 인도, 이집트 ② 회교도와 투르크 ③ 석화광부의 집단파업 ④ 실업자 구제문제 ⑤ 아일랜드 문제

- 당시 국내의 상황은?

1927년 2월 15일 독립을 위해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성된 대표적 항일단체인 <신간회 설립>과 1927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00여 명이 중국 군경에게 붙잡힌 <길림대검거사건>으로 목숨을 걸고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는 외침이 여전했던 한 해, 유럽여행의 1년의 기간은 대한제국의 황태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특권으로 그가 왜 이런 특별한 경험과 소중한 기회를 조국의 안녕을 위해 쏟고자 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 헤이그 사건 때는 조선의 실정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가 없었지만 유럽언론이 영친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한 기회를 외교적으로 활용했었어야 했을 것

- 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실 1차 세계대전 이후(以後) 민족자결주의 영향으로 많은 식민지들이 연(連)이어 독립하는 시기에 유럽순방을 즐기는 영친왕의 행적은 한일강제병합에 무비판적(無批判的)인 태도로 보일 수 있는 것으로 일본은 결국 영친왕을 홍보수단으로 이용한 것이고 의도(意圖)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일본에 협조한 결과가 돼버린 것

- 한국에서는 영친왕의 유럽순방을 알고 있었나?

언론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고국에 알려진 황태자의 유럽순방, 김구선생 같은 경우는 영친왕의 상해임시정부 합류(合流)를 기하여 영친왕 망명계획까지 추진하지만 사전(事前)에 누설되어 일본의 방해공작, 악명(惡名) 높은 일본인 형사 ‘미화’를 영친왕의 경호원으로 투입하여 상해를 경유하는 영친왕을 배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독립군의 접근(接近)을 원천봉쇄한 것

- 영친왕은 상해임시정부의 존재를 알았을까?

일본군 고위 장교로써 고국의 독립운동 정황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

 

〇 일본의 평민(平民)이 된 영친왕

-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천황의 육성이 전(傳)해지는데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한 것, 그리고 1947년 5월 3일 연합군은 일본국 신헌법을 실시하게 되면서 천황(天皇)은 권력을 빼앗긴 상징적 존재가 되었고 황족들은 평민이 되면서 막대한 재산과 면세혜택은 사라지고 영친왕의 처지도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황태자의 운명은 여전히 일본의 국운(國運)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 당시 영친왕을 비롯한 조선 왕족을 관리하던 기구인 이왕직(李王職)에서 영친왕의 재산을 관리했었는데, 영친왕의 재산은 종전(終戰) 인플레이션 전(前)의 가치로 천만 엔이 넘어 세간에는 천황(天皇) 다음으로 큰 부자는 이왕가라고 할 정도

※ 이왕직(李王職) : 일제강점기 대한제국 황실과 관련한 사무일체를 담당하던 기구

- 이러한 혜택이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해체되기 시작하고 1947년 10월 공식적인 법에 의해 기존에 누렸던 황족의 권리를 전면박탈당하면서 일체의 경제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는 영친왕은 엄청난 세금과 사기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게 되는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〇 영친왕 국적(國籍)을 스스로 포기하다

- 영친왕의 국적 포기, 이유는?

보이스카우트에서 활동하던 영친왕의 둘째 아들 이구,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의 도움으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 수학하여 졸업을 하게 되어 아들 이구를 만나러 미국에 가길 원했던 영친왕은 일본에 귀화를 하여 여권을 얻은 후(後) 미국에 가게 된다.

- 영친왕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의 명문 MIT 졸업식에 가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에 여권을 요청하는데, 당시 조선의 왕실을 견제하는 분위기로 발급되지 않자 결국 아들의 졸업식 참석을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미국에 가게 된다.

- 그나마 유럽여행은 대한제국의 황태자 신분으로 갔었는데, 이제는 아예 일본인 신분으로··· 부성애가 변명이 되지 않는 상황,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자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었던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금도 귀화하지 못하고 갖은 고통을 겪고 살고 있는 무국적자와 그 후손들이 일본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영친왕.

- 안타깝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는 것이 예컨대 귀화 당시 영친왕의 상황을 보면, 장인(丈人)은 일본 전범(戰犯)으로 구속되고 같은 육사동료인 조선인 홍사익은 처형당하고 미군정 하(下)의 대한제국은 좌·우파의 대립의 혼란 상황에서 아들의 졸업식 참석, 이러한 역사의 격랑(激浪) 한가운데 있던 개인의 선택을 누가 쉽사리 판단할 수 있을까?

- 하지만 대의(大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했던 시대, ‘개인으로 살고 싶다’는 영친왕의 말이 비겁해 보이는 것이 모든 기득권을 잃은 뒤 한 말이라서 더욱 더···

- 영친왕이 고국을 위해 노력한 것은 없나?

한국전쟁 당시 제일교포를 중심으로 의용군 모집 · 구호물자 마련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밀항해 온 학생들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입학지원 · 기숙사 제공 등은 영친왕 나름의 애국이었을 것, 또한 1951년 최초로 한국어 입문서 A first book of Korean <조선어 회화 입문> 영한사전을 만드는데, I eat meat.(나는 고기를 먹으오) 식으로 궁중 어법으로 표기한 것, 11살에 떠난 고국의 언어를 기억할 정도로 정체성을 간직했던 것이고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머물었던 장소 낙선재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평생 간직한 영친왕

 

〇 고국으로 돌아온 침묵의 황태자, 영친왕

-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이후(以後)로는 조선 왕실에 대한 견제가 커지는데, 정치적인 부담으로 영친왕은 귀국을 하지 못하다가 1963년 뇌혈전증으로 실어증(失語症)과 반신불수의 상태로 환국하게 되는 것

- 국가의 상징적 인물이 자기연민에 빠졌을 때, 그 인물을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는지 본보기가 되어준 영친왕 ①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② 1897년 10월 20일 영친왕, 고종의 넷째 아들로 탄생 ③ 1907년 8월 7일 영친왕, 대한제국 황태자 즉위 ④ 1907년 12월 5일 영친왕,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 스러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상징, 그러나 일본인으로 살았던 삶, 56년 만에 돌아온 해방된 조국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불운한 역사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수많은 민초들,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