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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200년 전쟁, 한강(漢江)을 차지하라

mkpark2022 2015. 9. 15. 09:13

 

 

 


삼국시대 200년 전쟁, 한강(漢江)을 차지하라.

 


한반도 젖줄인 한강은 삼국 역사의 주 무대

- “한강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한다!삼국의 흥망성쇠가 시작된 한강, 1700년 전 한강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 고구려·백제·신라는 왜 한강을 노렸나?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삼국의 격전이 시작된다!

- 한민족 삶의 터전으로 우리 역사와 함께 흘러온 한강,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한강유역 쟁탈전, 392년 광개토대왕의 남진을 시작으로 590년 고구려의 온달장군의 아차산 공격까지 200년간 이어져 온 한강 유역 쟁탈전, 삼국은 왜 한강을 노린 것일까?

- 한강(漢江)이란 이름의 기원?

두 가지 설로 백제가 중국식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수(漢水)라 불렀다 VS 순우리말 한(크다) + 가람() = 큰 강에서 유래, 고구려에서 한강을 부르던 순 우리말은 아리(크다) + = 큰 강이라는 의미

- 과거에는 모래사장이었던 한강은 고려시대에는 사평도·사리진이라고 불렸고 1960년대는 여름 철 한강에는 수상경찰서와 물놀이 기구 대여점 그리고 남성출입금지의 여성전용 수영장도 있었고 1980년대 한강개발과 함께 사라진 한강의 진풍경 왕이 융복차림으로 말을 타고 노량교장에 거둥하여 하루 종일 무사들을 사열하다” <영조실록 11221> &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색 깃발을 사용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11>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았던 노량진에 정조(正祖)는 배다리 설치

파리 플라주(Paris Plage) : 매년 7·8월 세느 강변에 개장하는 인공해변

- 현대에도 군사훈련에 이용된 한강 백사장, 매년 국군의 날 공수특전단 낙하훈련을 시행하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의 안전한 모래 벌은 군사훈련의 최적지

-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을 차지한 백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내려온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와 비류, 형 비류는 미추홀로 지금의 인천지역에 터를 잡고 동생 온조는 한강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게 된다.

 

한강(漢江)유역에 도읍을 세운 백제

- 한강(漢江)에 도읍을 정한 이유?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 평야가 많아 농사짓기에 적합 외적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바다로 둘러싸인 분지로 천혜의 요새 이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이렇게 하늘이 내려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

- 백제 건국 이전, 한강에 살던 사람은 없었나?

그 동안 살았던 흔적으로 암사동을 비롯해 140여 곳의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어 BC18년 백제건국 이전에는 사람은 살고 있었지만 나라를 세울만한 세력이 없었던 한강유역은 세력의 공백기였기에 경쟁 없이 한강을 차지할 수 있었던 백제의 온조, 설화(說話)에서도 형을 뛰어넘는 아우를 매력적으로 묘사

 

백제 발전의 원동력, 한강

- 남한강과 북한강을 합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유역권이 넓은 한강, 이천·여주·충주·원주의 농경에 적합한 내륙평야의 경제성장과 평야를 연결하는 한강 물줄기를 통해 교통이 발달하여 한강을 거점으로 국력을 키운 백제

- 세금운송에 유리한 한강이 있는 한양을 수도로 삼은 조선, 조선 후기에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며 상업의 요지로 세금 및 각종 상업 활동의 중흥이 되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이 등장하기도 한다.

- 백제시대 한강의 역할?

기록에는 없지만 물길이 있어 백제시대에도 한강을 통해 많은 물자가 오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한강 상류인 원주 법천리에서 백제시대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조기·민어 등 바다 생선뼈가 발굴된 점으로 보아 한강을 통해 내륙까지 옮겨온 것으로 물자교역의 증거, 한강 하류를 장악한 백제는 물자교역을 통해 한강 상류의 여러 세력을 통제하며 성장하다 4세기 전성기를 맞고 근초고왕의 평양성 진격의 원동력

 

한강(漢江)을 둘러싼 200년 전쟁의 시작

- 광개토대왕 즉위 1년인 392년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시작되면서 광개토대왕은 3만 여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엄청난 기세로 남하한 고구려군은 순식간에 한강 북쪽 10여 성을 함락하고 3개월 후에는 백제 해상교역의 관문인 관미성을 함락하지만 백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396년 광개토대왕이 한강을 건너오면서 항복하게 되고 한강의 패권은 고구려로 넘어가게 된다.

- 광개토대왕이 한강(漢江)을 노린 이유?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과 그 이전인 342년에는 중국의 전연(前燕)에게 국내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는 고구려, 백제의 공격으로 고국원왕까지 전사하게 되면서 광개토대왕은 사명감과 북방의 여러 나라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쪽전선을 안정시킬 필요성이 있는 전략상의 목표로 백제를 공격한 것

- 고구려의 공격으로 중국으로 가는 출구인 관미성을 잃은 백제, 이곳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지키는 한강 하구의 전략적 요충지로 관미성을 점령함으로써 백제의 뱃길까지 막히고 수도 한성이 고스란히 고구려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백제는 서해지배권도 잃고 도읍까지 위험에 빠진 상황

- 하지만 백제 수도를 공격하지 않았던 광개토대왕, 결국 광개토대왕 사후 양국의 전쟁은 내부적인 정치문제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지만 427년 고구려 장수왕은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고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다시 두 나라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

- 장수왕이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한 이유?

광개토대왕 때와는 달라진 국제정세로 중국에서는 북위(北魏)가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서쪽진출에 한계를 맞은 고구려, 또한 한반도 남쪽이 가지는 생산력을 주목한 장수왕, 98세까지 살았던 이름 그대로 장수왕(394~491)으로 백제 침공시기가 82.

- 472년 백제 개로왕은 북위(北魏)에 친서를 보낸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속히 장수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해 주소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 장수왕(長壽王)의 스파이 작전

475년 백제수도 한성을 공격한 고구려의 장수왕, 공격하기 전() 백제에 스파이를 보내 내부사정을 파악한 후 공격을 시작하게 되는데 장수왕이 선택한 스파이 작전, 승려 도림(道琳)고구려에 죄를 짓고 백제로 도망 왔다고 하면서 위장잠입을 하는데, 삼국시대 승려는 최고의 지식인

- 백제가 도림(道琳)을 받아들인 이유?

고구려의 정보를 역()으로 얻을 수 있다 도림이 가진 다양한 지식이 필요해서 받아들이게 되고, 또한 도림은 바둑을 통해 개로왕의 환심을 사게 된다.

- 스파이 도림의 활약?

전쟁 전, ()의 힘을 빼려 한 도림은 개로왕에게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를 부추기면서 백제의 국고를 탕진시키고 공사에 동원돼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도림은 고구려로 탈출해 백제의 상황을 알리고 장수왕은 3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으로 내려온다.

 

백제인의 바둑 사랑

- <주서(周書)>는 중국 남북조 시대 국가인 북주(北周)의 역사를 기록한 책 백제인들은 바둑이나 장기를 매우 좋아한다.” <주서 이역열전 백제조> 또한 당시 백제인들이 얼마나 바둑을 좋아했는지 보여주는 유물인 바둑판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棋局)>

- 한성백제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바둑판은 예술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걸작, 백제가 일본으로 선물한 것으로 알려진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棋局)>은 복원비용만 2억 원으로 바둑판에 새겨진 화려하고 섬세한 동물 문양은 그 자체가 예술이고 다양한 문물이 백제로 유입됐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재질의 자단은 인도·스리랑카 쪽에서 나오는 목재, 바둑돌은 상아로 동남아나 인도 쪽에서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

목화자단기국 : 일본 나라현 쇼소인 소장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으로 백제가 선물한 것으로 알려짐

 

백제 개로왕의 실정(失政)

- 미모의 아내를 가진 백제인 도미, 개로왕은 그의 부인을 탐내지만 왕의 뜻을 거부한 도미의 아내, 분노한 개로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고 배에 태워 추방시키는데 천신만고 끝에 아내도 도망쳐 기적적으로 도미와 재회를 하는 부부는 고구려 땅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설화

- 대체적으로 이 얘기는 개로왕이 대규모 토목공사로 국고를 탕진하기도 했지만 여색(女色)을 즐겼다는 왕으로써 패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로 쓰면서 개로왕의 실정을 부각시키려는 한 단면

- 또한 도미 부부가 백제의 동맹국인 신라가 아닌 고구려 땅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은 백제의 국운이 다하고 고구려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하는 듯, 기본적으로 설화에는 당시의 시대적 인식이 반영되기 마련, 실제로 개로왕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많은 백제인들이 떠나게 되는데 그들이 향하는 곳은 고구려

- 왕권강화를 위해 시행된 토목공사로 많은 귀족세력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높음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개로왕을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연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에 도망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

- 500년 백제 도읍, 한성이 쉽게 함락된 이유?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던 고구려군 고구려의 대로 제우·재증걸루·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풍납토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

 

한성 함락, 고구려의 전력(戰力)

- 475년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군의 전력(戰力)?

삼국 중 철제무기가 가장 먼저 발달한 고구려는 중국을 위협할 만큼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15m의 높은 풍납토성을 넘는 건 쉽지 않았던 듯 고구려 병이 군사를 4갈래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을 이용하여 성문을 불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아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

- 풍납(風納)<바람드리>라는 뜻으로 남한산과 한강 사이의 바람 골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밤낮으로 해풍(海風)과 육풍(陸風)에 따라 바람방향이 바뀌어 고구려군은 성문 쪽으로 바람이 불 때 일제히 화공을 퍼부어 백제군이 불을 끌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강하게 압박

-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에 소재하는 <안악3호분 행렬도>에는 광대·악사·병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 특히 도끼를 들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오랜 세월 인류가 무기로 사용했음을 의미하고 당시 도끼는 도구이자 중요한 무기 중의 하나, 전투용 철제 도끼의 특징 무게 중심이 긴 자루 끝에 쏠려 강한 파괴력 발생 도끼날을 이용해 찍어 베는 것까지 가능, 하지만 무게중심이 멀어 다루기 쉽지 않은 도끼, 전투용으로 쓸 때 중요한 것은 속도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면 좌우로 반동을 이용해 연속으로 휘두르는 것,

- 한자의 병()자는 도끼를 두 손으로 든 모양을 상형한 것, 도끼는 가까이 온 적을 공격하는 근접전 무기로 철제 검이 발달하면서 도끼는 군권(軍權)을 상징하는 의장물로 기능이 바뀌게 되고 조선시대까지도 장수가 출정할 때 왕이 화려한 도끼를 하사하며 군사지휘권을 넘긴다는 표징이 된 것

 

사랑의 교통로 한강

- 군사·경제적 요충지였던 한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교통로 역할,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했을 당시인 475년에 고구려 안장왕(529~531년 재위)이 평소 사랑했던 여인을 만나러 평양에서 지금의 일산지역인 고봉산까지 미녀를 만나러 왔다는 기록 한씨 미녀가 높은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땅이기에 나중에 고봉이라 명명했다” <삼국사기 지리지> & “한씨 미녀가 개백현에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왕봉(행주산성)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1> 한씨 미녀는 단순한 여인이 아니라 한씨 미녀로 상징되는 한강유역의 정치세력이라는 추측, 이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왕의 정치적인 결합을 상징하는 역사적 상상력(?)

- 한강(漢江)도 잃고 미녀도 잃은 백제 개로왕은 동생 문주를 보내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구원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도착해 보니 이미 때는 늦어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성은 함락된 시점, 개로왕을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와신상담하며 한성을 다시 찾을 때를 기다린다.

 

76년만의 설욕(雪辱) 한강을 되찾은 백제

- 와신상담하며 때를 기다리던 백제 성왕(聖王)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한강 상류와 하류의 양 진영에서 공격하고 무방비상태였던 고구려군은 한강유역을 포기하고 퇴각, 백제는 한강 하류 6개군 ·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점령하며 대승을 이루고 BC18~475년의 웅진천도 전까지 무려 493년 간 백제의 도읍지였던 한성을 76년 만에 되찾은 것으로 백제 인들에게는 의미가 컷을 것

- 고구려가 한강을 뺏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왕위계승분쟁으로 내부적 혼란에 빠졌던 고구려, 게다가 급박하게 변화한 국제정세로 서쪽에 북주(北周)라는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고 측근의 북제(北齊)는 군대를 보내 요서지역을 압박하고 있는데, 북쪽에는 유연(劉淵)이 망하고 새로운 유목국가 돌궐(突厥)이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서쪽 국경선에 먹구름이 모이자 그 곳에 군사력에 집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약해진 남쪽수비를 틈타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공격한 것

 

신라의 스파이 거칠부

- 승려의 신분으로 고구려에 잠입한 신라의 거칠부는 고구려의 고승(高僧) 혜량법사를 만나고 거칠부의 정체를 꿰뚫어 본 혜량법사는 거칠부를 신라로 돌려보내며 나중에라도 자신을 해치지 말 것을 당부하는데 실제로 551년 진흥왕대 한강유역을 공격하며 신라의 선봉장이 된 거칠부는 한강유역 죽령 이북의 남한강 지역인 10개 군을 차지하게 된다.

거칠부(? ~ 579) : 신라의 장군으로 551년 고구려 공격의 선봉장

- 고구려의 혜량법사, 통찰력은 놀라우나 거칠부를 놓아준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왕위계승분쟁으로 전국이 혼란해진 고구려, 고구려가 망()해간다고 판단을 한 혜량법사, 지방까지 큰 충격을 준 고구려 중앙의 혼란, 후에 거칠부는 혜량법사를 진흥왕에게 추천하고 고구려 출신이지만 신라 최고의 승려인 국사(國師)까지 올라가게 된다.

- 한강유역 재탈환을 위한 고구려의 노력은?

북제(北齊돌궐(突厥)의 압박으로 내부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고구려, 정작 백제가 경계해야 될 대상은 고구려가 아닌 신라

 

한강을 노린 신라의 배신

- 서해(西海)의 지배권을 좌우한 한강 하류, 내륙에 위치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육로로 중국과 교류했던 터라 중국으로 통하는 관문인 한강유역에 관한 갈망이 대단하여 553년 백제와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고구려와 밀약을 체결하여 한강을 차지한다.

- 한강 쟁탈전만큼 복잡한 삼국의 동맹관계, 5세기 고구려 남진정책으로 <백제·신라가 동맹>, 6세기 한강을 노린 <신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체결, 7세기 신라의 견제를 위해 <고구려·백제가 동맹>을 맺게 된다.

- 삼국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나라가 한 나라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지된 힘의 균형, 세 개의 동맹 모습을 봤는데 이 동맹이 똑같은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동맹의 수준이나 결합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제동맹도 있지만 동맹이라기보다는 비밀리에 밀약으로 불가침을 맺은 고구려와 신라 등등··· 극적인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삼국의 동맹관계는 한강유역을 두고 동맹과 배신을 거듭하게 된다.

 

한강(漢江)유역을 지켜낸 신라

- 삼국시대 한강유역의 군사요충지 아차산성, 590년 한강유역 재탈환에 나선 고구려 온달장군은 신라의 거센 반격으로 실패하면서 온달장군도 전사하고 신라는 삼국통일까지 한강유역을 지배하게 된다.

- 200년 전쟁의 마지막 격전지 아차산성, 남쪽으로 풍납토성·몽촌토성이 한 눈에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로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공격을 시도하지만 신라는 삼국통일까지 한강유역을 사수하는데 성공한다.

- 역시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이 손에 넣게 된다는 것을 역사에서 보여 주는데, 삼국 중 발전이 가장 늦었던 신라이지만 결국에는 한강을 차지하게 되는 것, 한강 주변에 종횡(縱橫)으로 위치한 신라 산성을 크게 보면 경기도를 감싼 형태이고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한강을 감싼 형태로 배치한 것을 보면 신라가 얼마나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지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

- 한강유역이 중요한 것은 틀림이 없고 또 그것 때문에 백제·고구려·신라가 각축전을 벌인 것도 사실, 다만 삼국은 각 나라마다 한강이 가지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백제에게는 건국의 터전이며 도읍지로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곳, 고구려에게는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적극 경쟁의지는 낮은 지역, 반면 신라는 반드시 점령하고 지켜야 하는 지역으로 점령하면 성을 쌓는 형식을 반복하여 한 번 차지한 땅은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신라, 또한 오늘 날까지 수많은 사람의 삶의 격전장인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