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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前燈火의 朝鮮 ‘그들’이 있었다. <제2편, 의병(義兵)>

mkpark2022 2015. 9. 4. 20:17

 

 

 

風前燈火의 朝鮮 ‘그들’이 있었다. <제2편, 의병(義兵)>

 

 

일본군의 예상치 못한 복병, 의병(義兵)

-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한줄기 희망을 쏘아 올렸던 조선의 백성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역할과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던 의병들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되짚어 본다.

- 15824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20여일 만에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치닫자 선조(宣祖)와 조정대신들은 서둘러 피난길에 오른다.

-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 하지만 조선에는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복병(伏兵)이 남아있었으니, 강을 건너려는 일본군을 향해 기습공격이 시작되고 매복해 있던 조선인들의 등장에 일본군들은 당황하고 치열한 접전 끝에 육지에서 쏘아올린 첫 승전보, 일본군들을 막아낸 그들은 다름 아닌 조선의 백성 의병(義兵)’이었다.

 

임진왜란! 긴박했던 그 날

- 159241318,000명의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략하고 3시간 만에 부산진이 함락되고 이 소식을 조정에서 안 것은 나흘 뒤인 417, 이쯤 되다보니 조정에서는 힘을 쓸 겨를도 없이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상황

- 백성들에게 왕은 부모와 같은 존재로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왕은 떠나고 남겨진 백성들, 당황하기는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한양을 포위하면 왕이 당연히 항복할 줄 알았는데, 가보니 이미 왕은 피신하고 없었던 것

- 당시 선조(宣祖)의 입장에서만 보면 파천(播遷)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긴박했던 상황, 부산진이 뚫리고 동래성이 무너지면서 선조(宣祖)가 제일 신임하던 신립장군마저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다가 거의 궤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라도 피()하고 보자는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

 

임진왜란 최대의 변수, 의병의 등장 <김강식,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교수>

- <기강·정암진 전투>는 육지에서의 첫 승전보로 의병(義兵)이 이뤄낸 것, 의병은 정규군이 아니고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비정규군

- 정암진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경상도를 거쳐 곡창인 전라도로 들어가는 지름길, 일본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끄는 2,000여 명의 일본군이 공격하여 왔으나, 곽재우 의병장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작전을 펼쳐 일본군을 노루 쫓듯 물리쳤다는데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장군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선조실록 256>

- 왜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 불렀을까?

()황제에게 붉은 비단을 선물 받은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 곽재우는 이 비단으로 무관 관복 철릭을 만들어 입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당시 일본군에게 홍의는 공포의 대상이며 우리에게는 전의(戰意)의 상징인 붉은색

- 전국적인 의병의 운동?

의병은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일어났는데, 금강산의 사명대사 · 묘향산의 서산대사 · 금산의 조헌과 영규 · 나주의 김천일 · 담양의 고경명 · 화순의 최경회 · 의령의 곽재우 · 고령의 김면 · 합천의 정인홍 · 영천의 권응수 · 안동의 김희 등,

- 수도권에는 의병이 없는 이유?

조선시대 의병은 지방의 향촌조직을 기반으로 발생하며 양반들은 친척과 전호(田戶, 소작농)가노(家奴, 노비)까지 동참시킨다.

- 임금도 파천(播遷)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의병에 참여한 이유?

왜군이 부산진의 상륙 이후 대부분의 관군들은 궤멸하거나 도망간 상황으로 자기의 고향이나 가족은 스스로 지켜야 하는 백성들의 심정으로 오늘날의 향병(鄕兵)의 성격이 강한 것

- 임진왜란 초기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이 시작된 경상우도의 고령·합천·의령, 왕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호남의병 김천일·고경명 등과 관군에서 도망친 군인·도적들까지 의병에 합세

- 의병활동의 성과?

낙동 우도쪽으로 현풍·창녕·영산이 수복되고, 7월 이후에는 상주·안동·영천·경주까지 수복되면서 일본군의 동로(東路)와 서로(西路)의 진격로를 막은 의병들, 중로(中路)인 대구만 유일한 통로로 남은 셈 내년 3월에 반드시 의병을 다 처단할 테니 의병들이 쳐들어와도 따라가지 말고 성을 지켜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군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변수, 의병들이 뒷덜미를 잡은 격

 

임진왜란 의병(義兵), 어떻게 싸웠나?

- 훈련도 받지 않은 의병들, 어떻게 이겼나?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교란술을 쓰기 위해 휘하의 여러 부하들에게 홍의(紅衣)를 입게 하여 일본군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홍의장군은 두려움의 대상

- 또한 호남 의병장 김천일 장군이 썼던 비장의 무기, 까만 바가지는 사실은 김천일 장군 부인의 아이디어로 바가지에 까만 칠을 하여 허리춤에 차게 하고 일본군의 진영에는 쇠로 만든 진품(眞品)을 가득 쌓아 놓은 것, 이를 본 일본군은 이렇게 무거운 쇳덩이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겁을 먹게 되는 것, 또한 상자에 벌떼를 집어넣어 벌 폭탄을 만들어 사용한 조선판 생화학 무기로 당시 민간에서 사용 가능한 바가지 · 벌떼들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무기로 사용한 의병들

- 임진왜란 의병의 전술(戰術)과 전략(戰略) <박재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

무기와 수적(數的)으로 상당히 열악했던 의병들, 이들이 정예화 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특별한 전략이 필요했던 것 소규모 유격전 구사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정암진 전투> 때에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강을 건너기 위해 수위가 낮은 지역을 표시해 뒀던 일본군, 의병들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밤에 몰래 표시를 바꿔 적() 함정으로 유도하여 공격했던 것으로 지형 + 게릴라전 = 의병의 핵심 전략.

- 의병은 어떤 무기를 사용했을까?

무기를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죽창 · 창검 · 등과 같은 열악한 장비로 싸우다 의병의 활약상이 두드러지면서 관군과의 연합작전으로 무기도 지원 받음 비격진천뢰 쇠뇌(궐장노),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당시 이장손이 발명한 포탄으로 전세를 뒤바꾼 주요 무기 중 하나로 화약과 능철(쇳조각)을 넣어 폭발 시 살상력을 높이고 안쪽에 도화선을 막대에 감아 길이로 폭발 시간을 조절한 것, 쇠뇌는 석궁형식으로 간단한 조작법만 알면 손쉽게 사용할 수 있어 조선 후기에는 여성·미성년자도 사용

 

의병(義兵)의 활약, 호남을 사수하라!

-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해상보급로가 막힌 일본군은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금산성에 본진을 구축하고 전주로 가는 길목 이치고개에서 관군·의병군과 맞붙게 되는데, 바로 그때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군이 금산성을 공격하면서 일본군은 이치고개를 넘지 못한 채 철수한다.

- 일본군은 159252한양에 입성한 병력을 조선 8도에 분산 배치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 군량미를 확보하려던 일본군은 경상도지역의 곽재우호남지역의 김천일·고경명충청도지역의 조헌이 막고 있어 접근을 포기하고, 이후 정유재란 시에는 호남을 집중공략하게 된다.

10만 여 군사가 원정을 한다면 25,000명이 군량 수송 담당

- 의병(義兵)들은 군량을 어떻게 해결했나?

의병장들이 ()재산을 털어 군량 조달하여 노블레스 오브리주의 실천한 것, 대표적으로는 곽재우와 만석꾼 의병장 김면은 전() 재산을 의병활동 비용으로 바치고 정작 가족들이 문전걸식을 하는 상황을 외면하기도 했다는 것

- 일제강점기에도 독립투사들에게 이어진 ()로운 정신의 DNA가 살아 남아있었던 것, 전쟁 초기 의병들은 생활근거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여 전투가 있을 때는 싸우고 평시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 이후 의병활동이 조정에 까지 알려지면서 의병들도 관군처럼 군량·무기를 지원 받고 백성들도 십시일반으로 모아낸 의연곡(義捐穀)으로 그 많은 군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의병(義兵), 목숨으로 조선을 지키다.

- 금산성에서 벌어진 의병들의 연합공격은 수천 명이 일본군에 맞서 의병들의 혈전이 계속되고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은 결사항전으로 힘을 다해 싸웠지만 전세는 점점 더 불리해지면서 의병장 고경명도 최후를 맞는다.

- 두 아들과 함께 했던 고경명 장군의 일가족 참전에 놀란 권율 장군 내 반드시 이 전란(戰亂)을 극복하여 그대와 수많은 의병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소이다.” <드라마 징비록의 권율장군 대사> 금산성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한 고경명과 그의 둘째 아들, 그리고 큰 아들 고종후는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

- 금산성 전투의 패배 원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의병(義兵)과 관군(官軍) 연합전술의 실패로 의병에 비해 전의가 부족했던 관군, 왜군들은 관군을 집중 공격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까지 무너진 것, 그리고 한 달 후,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연합군의 2차 금산성 전투 때에는 충청감사 윤선각이 의병들을 휘하에 두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지원을 해주지 않아 겨우 700여명이 동원되어 일본군과 싸우지만 엄청난 병력차로 의병들은 전멸하여 <칠백의총>을 이룬 것이고 임진왜란은 이름 없는 의병(義兵)들의 피로 쓴 기록

칠백의총(七百義塚) :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조헌을 포함 700여 의사자들의 유골을 모아 만든 무덤

 

임진왜란, 의승(義僧)의 활약 <혜각 스님, 골굴사>

- 임진왜란 당시 의승(義僧)의 활약은?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의승장으로는 공주의 영규대사 · 금강산의 사명대사 · 묘향산의 서산대사, 최초로 의승군을 모집했던 사람은 영규대사로 공주에서 의승군을 소집해서 청주성 전투와 금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거점으로 의승군을 조직해 전국 의승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당시 나이 73, 임란 후기에는 그 제자였던 사명대사가 뜻을 이어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는 등 이외에도 수많은 승려들이 임진왜란 시 기꺼이 승군이 되어 의병들과 함께 싸움에 임하게 된다.

- 의승들은 일본군에 맞서 어떻게 싸운 것일까?

당시 기록에는 화포기술을 배우는 승려들이 많았는데 승군이 스스로 수개월의 양식을 가지고 와 조총과 도창(刀槍) 등을 배우려 하니··· 훈련하게 하고···” <선조실록 273> 일반 의병(義兵)들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때는 무기를 들고 싸웠고, 또한 의승들은 산속의 지리에 능통하여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점과 전통무술을 통해 꾸준히 심신단련을 해왔기 때문에 전쟁에 도움이 됐을 것

-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나라 조선, 승려들이 의승이 된 이유는?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은 불살생, 그렇지만 계율에는 개차(開遮)이라고 특수한 경우에는 계율을 깨트려 오히려 그 의미를 지킨다는 조항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났던 승병들의 정신으로 이것은 민족과 함께하는 호국정신의 발로이자 더 큰 살생을 막으려 했던 승려들의 참 뜻으로 절박함에서 나온 백성들의 저항 의지가 조선을 지켜낸 것.

 

의병(義兵)의 관군화, 선조(宣祖)의 속내는?

- 15926명나라에서 파병된 4만여 병사가 조선에 도착하고 조선군의 전력(戰力)에 한층 힘이 실리게 되는데, 조정에서는 뜻밖의 어명이 내려진다. “결국 전쟁이 끝나면 이들은 사병이 될 가능성이 많고 이는 곧 정여립과 같은 역도가 될 수 있다의병의 관군화를 지시하는 선조(宣祖)와 이에 반발하는 의병들

- 전쟁 초기 의병을 독려하던 선조(宣祖)태도변화, 그 속내는?

전쟁 초기 선조(宣祖)가 피난 무렵에는 의병의 활동으로 반격의 물꼬를 트게 되고 의병이야말로 천군만마!” 하지만 의병수가 증가하고 군량미가 부족하게 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세가 조선에 유리해지자 이제 의병에게 줄 군량미가 아까워진 것(?).

- 나라의 지원혜택을 노리는 사이비 의병 발생의 기록은?

가짜 의병들도 있었으나 극소수인데, 이를 빙자해 잘 싸우는 의병들까지 모두 문제를 삼은 것, 이는 의병장들이 반란을 꾀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고 실제 경상감찰사 김수는 곽재우가 관곡과 무기를 훔쳤다며 모함했던 것으로 선조(宣祖)의 입장에서 보면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로 불만의 화살이 자신에게 오는 것이 두려워 싹을 자르겠다는 심정(?)

- 의병(義兵)이 관군에 편입되면 체계적 지원으로 좋지 않을까?

관군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의병수를 대폭 축소하는 것이 문제, 심지어 군량 부족을 핑계로 의병들을 강제 귀농조치를 시키는 등, 사실은 통합을 가장한 의병해체 작업인 셈, 또한 선조(宣祖)1597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군사가 대패하자 수군을 해산시켜버리는데 모든 조치는 믿을 곳은 명나라 뿐··· 나머지는 있으나마나라는 선조(宣祖)의 생각으로 전쟁의 후유증을 크게 만든 것

- 선조(宣祖)뿐만 아니라 당시 수령들의 부정부패도 문제,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면 백성들에게 수탈한 군량미를 승진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심지어 훈련도감 이자해가 군량을 훔쳐가 기생에게 주고, 진휼청 이문빈은 백성을 구제할 곡식으로 주찬 비용을 마련···” <선조실록 2711>

- 이는 평시라도 문제가 있는 상황인데, 전쟁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백성들은 마실 물까지 아껴서 바쳤는데 마실 물로 세차를 하고 목욕을 한 셈, 요즘도 방산비리· 군납비리의 문제가 많은데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의 위기를 자신의 출세기회로 삼는 자들이 있는 법

 

의병장 김덕령의 죽음, 그 진실은?

- 1596년 조선 땅 곳곳에는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로 차고 넘쳐나고 굶주림이 극에 달한 백성들 사이에선 급기야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충청도 일대의 <이몽학의 난> ()은 곧 진압됐지만 조사과정에서 나타나는 뜻밖의 이름, 전국 의병들의 수장(首將) 김덕령 장군이 거론 된 것, 반란의 혐의를 쓰고 선조(宣祖)의 친국으로 여섯 차례에 걸친 심문에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지만 나라에 세운 공이 없으니 죽어도 좋소!하면서 장살을 당하게 되는 정치적 희생양이 되고 만다.

김덕령(1567~1596)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을 총괄하는 총융장에 임명된 인물

- 실제로 의병들이 반란에 가담했는지?

실제로 일부 의병들은 백성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는데, 백성들의 분노의 대상이 왜적에서 조선 조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부분, 오랜 전쟁과 심각한 기근에 관리들의 수탈까지 겹친 상황에서 지친 일부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으로 <1594년 송유진의 난> & <1596년 이몽학의 난>이 대표적, 안타까운 것은 백성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던 김덕령 의병장이 이렇게 되자 능력 있고 용맹하던 의병들은 모두 숨어버리면서 이후 전쟁에는 의병(義兵)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

 

잊혀진 이름, 조선의 의병(義兵)

- 이런 와중에도 주목되는 선조(宣祖)의 발언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도 함락하지 못하였다임진왜란의 극복은 오로지 명나라 힘 때문이었다는 것

- 이런 흐름이 임진왜란 이후 이행된 공신책봉에서도 그대로 반영이 되는데,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호송하는 공을 세운 호성공신이 86이고 실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18밖에 되지 않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공신은 5이나 되고 조선 스스로 얻어낸 성과는 격하시키면서 명군(明軍)의 참전을 이끌어낸 자신의 덕이라며 자신을 호송한 공신은 요리사와 마부까지 호성공신에 포함

- 곽재우 등 주요 의병장들은 선무공신에서 제외, 그 이후에 다시 선무원정공신 9,060명에 곽재우 등 주요 의병장 등이 포함, 이 숫자는 거의 모두가 선무원정공신에 포함된 것으로 의병활동의 수혜자는 선조(宣祖)와 지배층이고 의병으로 나섰던 백성들에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현실, 심지어 의병들의 전공(戰功)을 가로챈 관리들은 거짓으로 장계를 올리기도 하고 의병들은 우리가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고 전투에 집중합시다.’ 라는 모습을 보인 의병들

- 당시에 의병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있었다면 이후 정유재란 ·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들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 이름 없는 산하(山河)에 묻힌 의병들을 위한 비문 의병(義兵)이라 쓰고 조국(祖國)이라 읽는다.’ & ‘산천초목이 우거질 수 있는 것은 이름 없는 들풀이 거름이 되어 주었기 때문···’ & ‘그대들의 혼과 얼이 우리 역사에 의로움을 심었으니 천만년이 지난들 어찌 그 얼을 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