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前燈火의 朝鮮 ‘그들’이 있었다. <제1편, 항왜(抗倭)>
〇 왜장(倭將) 사야카, 조선에 투항한 날
- 임진왜란 당시 조국 일본을 등지고 왜군과 맞서 싸운 왜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조선군에 투항한 일본군, 그들을 가리켜 <항왜>라 부른다.
- 실록에 기록된 항왜 수만 1만여 명! 이들 중 전쟁에 공을 세운 항왜들은 조선의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완전한 조선인이 된 이들도 있었으나 아무도 그들의 활약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임진왜란 7년에 걸친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는데 일조한 그들의 활약상을 알아본다.
- <드라마 징비록> “1592년 4월, 조선 침략을 위해 출격한 왜군의 선봉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왜군의 조총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조선군,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로 치닫고 있었다. 패배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조선의 운명 앞에 왜군 선봉부대 장수가 3,000여 명의 병사들은 이끌고 나타났다. 왜장 사야카의 뜻밖의 투항, 그는 왜 총구를 돌려 왜군과 싸우기를 선택한 것일까?”
-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에만 있었나? <방기철, 선문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왜군과 맞서 싸운 왜군, 항왜(降倭)는 1397년 조선 초 태조 때 처음 항왜의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이들은 삼포(三浦)에 거주,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쟁 중이라서 많은 수의 항왜가 등장하면서 임진왜란 하면 <항왜>가 떠오르는 것
〇 왜장(倭將) 사야카, 그가 조선에 투항한 이유?
- 왜군 제2군을 이끈 장수로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이었던 사야카, 반전의 한마디 “투항 하겠소!”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경상도관찰사 김수에게 투항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 기록에는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투항을 한 후, 김수가 이끄는 부대를 따라다니면서 왜적 격파에 공을 세운다.
- 직접 투항 이유를 밝힌 사야카 “내 일찍이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 번 와서 보기가 소원이었고, 이 나라의 교화에 젖고 싶은 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내 마음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야카의 효유서>
- 전쟁 발발 초기, 사야카의 투항은 누구도 믿기 힘든 상황, 당시 일본군은 연전연승 상황이어서 패전으로 인한 투항이 아니었기 때문, 사야카도 조선이 자신을 믿지 못하리라 예상했던지 투항한지 5일 후에 다시 병마절도사에게 강화서를 보내 조선에 귀순의사를 밝힌다.
※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황개의 거짓 투항에 속아 대패한 삼국지의 상황의 예
- 사야카의 투항, 조선에서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야카가 효유서와 강화서를 썼다면 믿을 수도 있었을 것이 당시 일본에서 한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승려 뿐 이었으므로 이를 직접 썼다는 것은 유학에 대한 관심과 조선을 동경했다고 판단했을 것
- 임진왜란 초기에는 항왜 모두를 처단하는 진살정책을 취하다 이후 항왜의 처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지는데, 김응서는 이들이 기여하는 바가 크므로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또한 진살정책을 쓰기엔 너무도 많은 3,000 여명의 군사와 같이 투항한 사야카
〇 사야카는 어떤 인물?
- 투항 당시 22세의 나이로 선봉장이면 그 만큼 무예가 출중했다는 의미이고 사야카는 <사이카> 부대의 일원, 당시 일본에서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사격술이 뛰어난 철포부대가 있었는데 철포부대의 최강인 와카야마현의 사이카 부대로 그 부대의 일원으로 추정하고 사이카 부대와 각별했던 지방 영주들은 반(反)히데요시 세력이었는데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지방영주들을 제거하던 상황
- 일본은 전국통일 과정에서 많은 가문이 희생되면서 반(反)히데요시 세력이 등장하고 그런 과정에서 사야카 역시 반(反)히데요시 세력으로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없었던 것
- 히데요시도 이러한 반대세력의 상황을 인식하고 나고야성에 어좌소를 설치해 조선에 출정할 지방 영주들의 가족이 살도록 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이들을 잘 돌보겠다는 의도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인질로 삼은 것, 그래서 그만큼 조선 침략의 명분이 없다는 것을 사야카는 확신을 했고, 또한 따르는 병사들과도 어느 정도 정서의 교류는 이뤄졌을 것
※ 어좌소 : 나고야 성안에 조선에 출정 될 각 지방 영주의 가족들이 와서 살도록 지은 집
〇 사야카의 활약
- <드라마 징비록> “군량미를 실고 가던 왜군을 향해 화살이 날아가고 매복해 있던 의병들의 기습공격에 왜군은 조총을 쏘아보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조선에 투항한 사야카는 의병들을 도와 왜군토벌에 나섰고 왜군의 정보를 의병에 알렸던 것, 그는 의병들과 함께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전쟁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곽재우 장군과도 함께 싸운 사야카
- 조선으로 귀순 후, 무려 78회 전투에 참전 “항왜 첨지 사야카는 한 급씩 베었고··· 창1병·칼15병·조총2병·소4마리·말1필과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나라 사람 1백여 명을 빼앗아 오기도 했다” <1597년 선조실록>
- 활약과 포상
① 1592년 경상도 각 지역의 왜성 탈환 → 가선대부(종2품) ② 1593년 이견대 전투, 300여급 참살 → 자헌대부(정2품)으로 조정에서도 사야카의 전공을 확실하게 인정했다는 것, 선조(宣祖)가 <사성>이라고 해서 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하사하는 것인데, 사야카의 사는 모래 사(沙)로 바다를 건너 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 해서 김해 김씨로 사성하고 착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이름으로 김충선으로 명명한다.
- 임금이 내린 다른 성씨가 있는지?
1595년에 15명의 항왜에게 이씨 성을 하사한 기록 “사고소우 등 15명은 이빈의 휘하에 있으면서 길들인지 오래고 성품이 공순하여 모두 이(李)씨로 성을 삼았는데, 이는 이빈의 성을 따른 것입니다.” <1595년 선조실록> 사야카 역시 김응서 장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장군의 성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
〇 왜군들의 투항, 진짜 이유?
- 실록에는 항왜들의 이름이 많다?
야여문·여여문·산여문·노고여문·마당고라·신시로 등의 항왜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고 “항복한 왜인의 숫자가 이미 만 명에 이르고 있다” <1597년 선조실록> 1차 침략 당시 일본군 병력은 약 15만 8천명으로 만여 명은 상당한 숫자, 당시 한양의 인구는 10~12만 여명
- 1595년 히데요시는 탈영병이 많다고 화를 내면서 특단의 조치로 일본군 성내에 목책을 설치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목책이란 외부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하는 것, 반대로 탈영을 막는 목적으로 목책을 설치하는 아이러니, 이 무렵 조선은 산성수축을 많이 했는데 “일본에서 꺼리는 점은 항복한 왜인이다. 그들이 우리 일본의 용병술을 모두 털어놓았을 것. 조선에서 산성을 쌓고 있는 것도 역시 왜인들의 지휘일 것이다” <1597년 선조실록>
- 투항자가 속출하는 이유?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밀고 올라갔던 왜군,은 조명연합군에 밀려 1593년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면서 전쟁은 이미 장기전으로 돌입하고, 명(明)과 일본과 강화교섭이 이뤄지면서 일본군은 남쪽으로 내려와 장기농성에 돌입하면서 왜성(倭城)을 축조하게 되는데 ① 왜성 축조로 인한 과중한 노역 부담 ② 배고픔·추위 등의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투항하게 된 것 “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아우인 소장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항왜를 후대한다는데, 난처한 일이 있으면 우리들도 투항해 가려는데 후대(厚待)해 줄 지 모르겠다.’ 하였다” <1595년 선조실록>
- 항왜가 후대(後代)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
반성,해야 할 것은 항왜가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약상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 사실 항왜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주로 다룬 것은 김충선으로 <모하당 문집>까지 남겨 후손들이 잘 관리하고 있지만, 그 외의 항왜들은 후손들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 기록도 없다보니 연구가 미흡했던 것, ‘영웅과 역적의 사이’ 일본에서는 사야카를 어떻게 보는가?
〇 일본에서 보는 항왜 <일본의 역사학자 사지마 아키코 교수>
-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사야카 같은 배반자가 일본 국민 중에 있을 리 없다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인식이 바뀐 것은 1971년 일본의 역사학자인 ‘시바 료타로’가 <한국 기행>이라는 역사 기행문을 신문에 연재하면서부터 바뀌게 된다.
- 글에서 그는 사야카가 자신의 판단으로 인생을 선택하고 나중에 멋진 한국 사람이 되었다며 대단하다고 칭찬을 많이 했던 것, 이후부터 사야카나 항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전설로 받아들인다.
- 일본은 투항의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나?
당시 내전이 길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소속을 바꾸는 것에 대하여 별로 거부감이 없었던 것으로 많은 항왜들은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투항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또한 조선군 중에 항왜부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적국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소속을 바꾸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 일본의 중·고교 학생들은 항왜에 대해서 알고있나?
현재 일본의 고교 교과서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전쟁을 했다” & “학살을 했다” 는 내용을 다루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야카나 항왜에 대해서 까지는 다루지 못하는 교과서가 많은데, 1999년부터 사야카와 항왜에 대한 내용을 실은 교과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 일본 교과서에는 사야카(김충선)에 대해 어떻게 적고 있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작한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유명한 항왜 중에는 사야카라는 사람이 있고’ 히데요시에 대하여 비판적이어서 부하들을 데리고 조선에 투항했다. 당시 사야카 같은 항왜가 매우 많았다”라고 실림
- 한국사 교과서에는 항왜를 어떻게 다루는가?
동 아시아사에 실린 사야카와 가토 기요마사에게 끌려가 일본에 투항한 조선인 김환을 동시에 다루면서 전쟁이 한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에서 기술하여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
- 한·일 역사교류를 위해 노력하는 사지마 아키코 교수, “저를 포함한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많은 항왜들이 전쟁 중에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정확히 모르는 개인의 삶과 죽음을 나라나 국경 같은 현대의 개념을 떠나 당시의 역사 자료를 진지하게 살펴보고 의미를 하나씩 밝혀내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관계는 김충선 연구를 통해 한 걸음 가까워질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듯···
- 또한 이런 활동은 김충선의 후손들이 하고 있는데,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 김충선은 달성군 우럭동에 정착해 살았고, 현재 그 곳에는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이 있어 매년 천여 명의 일본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등 한일우호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김충선의 후손들
〇 군사기밀을 전파한 항왜
- 전쟁 초반 조선군은 열세였다. 조선군의 무기인 대포와 화살로는 일본군과 맞설 수 없었다. 조선이 육상에서 연전연패한 이유는 왜군들에게 천하의 신무기 조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군의 조총공세를 막을 수 없는 조선군은 죽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총의 위력을 <선조실록>에도 기록하고 있는데 “조총은 천하의 신기한 무기다” & “본디 조총에 대적하기 어렵다.” & “적의 전승은 화포(조총)가 있기 때문이다”
-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조선도 조총이 필요했다. 임진왜란 전쟁 발발 1년 만에 나라의 운명을 바꿀 조총을 만들어 낸 조선, 그 뒤에는 항왜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으로 만약 선조(宣祖)가 항왜 우대정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조선의 조총기술은 상당히 지연됐을 것
- 진주대첩을 앞두고 김시민 장군은 조총 170여 정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조총제조기술이 지방에 까지 전파됐다는 것, 특히 김충선이 조총제조기술에 공을 세우게 되는데, 1594년 이순신 진영에서 조총의 장점과 조선 화기의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데 기여하는 것, 또한 조총을 잘 다루던 항왜들은 조선군 조총교사로 임명하고 김충선은 권율·이순신·곽재우 등 대표적인 장수들과 교류, 전쟁 당시 조선군이 가장 위협으로 느낀 것은 조총과 일본의 검술(劍術)
〇 왜군의 숨은 병기, 왜검(倭劍)
- “명나라 군사는··· 다만 짧은 칼만 가졌는데, 적은 보병을 써서 3~4척이나 되는 날카로운 긴 칼로 휘둘러 치니 인마(人馬)가 모두 쓰러져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징비록>
- 개국 이래 200여 년 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조선, 반면 일본은 100여 년 간 내란의 시대로 무사를 직업으로 삼을 만큼 검술에 능했던 왜인들이 참전했던 것
- 재미있는 것은 조선군에도 창검술이 연마된 살수부대가 존재했으나 이들의 창검술을 본 항왜들은 ‘아이들 칼싸움 놀이’로 낮게 평가를 하는 것
- 왜 검술의 특징은?
100여 년간 실전에서 단련된 검술, 동작은 단순 · 상대와의 거리 · 공격과 방어의 타이밍 · 검의 각도가 매우 정밀 ① 적(敵)이 나를 공격할 때 몸을 낮춰 상대의 칼을 피하고 팔을 치는 기술 ② 적(敵)이 대각선으로 공격해 올 때 칼을 흘려서 바로 상대방의 팔을 공격 ③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공격을 제어하는 기술 ④ 손으로 상대의 칼자루를 잡고 상대의 칼을 빼앗는 기술, 知彼知己(지피지기) 百戰不殆(백전불태)의 병법 원리 실천
〇 첩보원 항왜
- 전쟁에서 항왜들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했을까?
조총제조 등 군사기밀을 전해준 역할뿐만 아니라 일본 진영에 잠입시켜 정보탐색에 동원 “항왜 마당고라, 신시로를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들여보내 군기·군량을 태우기도 하고 왜적을 유인했다” <1597년 선조실록>
- 전공(戰功)을 세운 항왜들, 포상은?
훈련도감 소속으로 왜검 교사였던 항왜 여여문은 도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일본진영에 잠입을 해서 성내의 일본군 배치도를 그려오고 이 정보를 토대로 조명연합군이 작전, 당시 의성지역의 전투에 참여한 여여문 “여여문이 머리를 깎아 왜인의 모습을 하고··· 왜군 4급을 참하여 가지고 오는데···” & “파 유격(명장수)이 그(여여문)를 살해하고서 그의 수급을 빼앗았습니다.” <1598년 선조실록>
※ 도산성 전투 :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울산에서 벌인 대규모 전투
- 파 유격이 오인했을 수도 있지만 명(明)의 입장에서도 수급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때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여여문과 어처구니없는 그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선조(宣祖)
〇 <명량해전>의 승리, 그 뒷이야기
- 1597년 9월 조선의 운명을 건 전투 명량해전, 일본에 비해 열세였던 조선 수군,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지세를 이용해 단 12척의 배로 왜군을 격침시키고 조선을 절망에서 건진 명량에서의 대첩, 그 뒤에는 항왜의 활약이 있었다. “항복한 왜인 준사가 내 배 위에서 적장(敵將)을 알아봤고 나는 적장의 목을 벨 것을 명령했다” <난중일기> 적장(賊將) 구루시마의 목을 매단 조선 수군의 배는 왜군의 사기를 꺾어놨던 것
- <영화 명량>에서 오타니 료헤이가 맡았던 ‘준사’역은 실존인물로 밝혀져 화제, 영화에서는 이순신과 구루시마가 배위에서 백병전을 펼치지만, 실제는 적장(敵將) 구루시마는 이미 전사한 상태로 물위에 떠있는 시체의 목을 베어 매달고 “항복해 온 왜군 준사란 놈은 내 배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놈이 적장(敵將) 구루시마라고 하였다. 나는 곧 명령하여 토막을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버린다.” <1597년 난중일기> 준사는 1592년 안골포 해전 당시 조선 수군에 투항한 자로 준사가 적장 구루시마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배에 태웠을 것
- 준사 외에도 해전에서 활약한 항왜는?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상당히 많은 항왜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각 특기에 맞게 배치를 했고, 1597년 조선 수군의 전력이 와해되던 시기에는 주특기 없는 항왜들은 한산도 병영으로 보내 노 젓는 격군으로 충원했던 것
- 모든 항왜들이 조선군에 협조적이었을까?
일본 내전 당시 서로 맞섰던 항왜들, 사기진작을 위한 이순신 장군의 용병술 “항왜들이 광대놀이를 벌렸다···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1596년 난중일기>
〇 침략자를 도운 조선인
-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 회령에 와 있던 왕자 임해군의 객사에 들이닥친 조선 백성들, 전주 출신 국경인은 함경도 회령 유배 당시에 숙부 국세필과 함께 회령객사를 습격하여 왕자와 왕실의 친척까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는데, 자국의 왕자를 적에게 넘기는 비극으로 임해군과 순화군의 체포로 조선 조정은 큰 부담을 갖게 된다.
- 국경인이 반역을 저지른 이유?
<방기철 교수의 생각> ① 조선의 수많은 왕자들 중 가장 함량미달인 임해군과 순화군 ② 전시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접대가 소홀하다며 관리들을 구타 ③ 심지어 민가까지 약탈해 민심이반은 당연한 것
- 명군(明軍)의 군량미를 압록강까지 날라야했던 백성들의 고통으로 간첩이 된 조선인을 이해하면서도 군기를 위해 처형할 수밖에 없었던 류성룡의 심정이 <징비록>에 기록, 결국 전쟁의 피해자는 민간인인 백성들, 이들이 어쩔 수없이 일본에 투항했다면 그 결정의 잘잘못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이면을 살펴봐야할 것
〇 7년 전쟁이 끝난 후, 항왜
- 임진왜란이 끝난 후 항왜들은 어떻게 되었나?
이들의 임무는 ① 북방의 여진족 방어 ② 이괄의 난 진압 ③ 정묘 · 병자호란 참전, 항왜 2세들과 정묘호란에 참전한 김충선은 당시 66세로 끝까지 조선에 충성하고 <임·갑·병 삼란 공신>의 칭호, 임진왜란(임진년) · 이괄의 난(갑자년) · 병자호란(병자년)
- 김충선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고 사실 항왜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려운데, 항왜에 대한 조명이 부족했던 것은 그들이 신분을 감추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조차도 항왜의 후손인 줄을 모르는 것도 하나의 원인
- 사야카의 인간적인 고뇌와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베어있는 詩(시), <남풍유감> “남풍 때때로 불제 고향생각 하네. 조상 무덤은 평안한지 일곱 형제는 무사한지. 나라엔 불충(不忠)이요 집에는 불행을 불러왔으니 세상 제일 큰 죄인 나 말고 또 뉘 있으랴? 아마 세상에 흉한 팔자는 나뿐인가 하노라” <김충선의 남풍유감>
- 조선에 정착해 조선인으로 살던 왜장 사야카,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잊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것, 당시 조선에게는 쉽지 않은 전쟁으로 항왜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항왜들은 전란 극복이 원동력이 됐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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