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령 이원범, 왕이 되다
〇 강화도령 이원범, 왕이 되다
- 조선 24대 왕 헌종(憲宗)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1849년 6월 6일 승하하게 되고 강화도의 농사꾼 이원범은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된다! 독특한 즉위 배경 때문에 ‘일자무식 왕’으로 알려진 철종(哲宗),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안민을 마음에 새겼던 군주였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해내려 몸부림쳤던 군주, 그는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로 집안이 역모에 휘말리면서 평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 강화도령을 궁(宮)으로 모셔오던 그 날, 마치 새 임금을 반기기라도 하 듯이 하늘에는 오색무지개가 뜨고 양떼가 와서 꿇어앉는 등 길목마다 상서로운 기운이 솟는데,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왕이 된 강화도령, 그가 바로 조선의 25대 철종(哲宗)이었다.
- 철종(哲宗)의 즉위는 조선 역사상 전대미문의 사건, 하루아침에 왕으로 신분이 급상승한 동화 속 이야기 같은 철종(哲宗)의 즉위, 강화도령 출생지는 서울로 14년 간 서울에 살다가 강화도 생활은 5년 정도로 철종(哲宗)이 미천한 신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강화도령이라 호칭
〇 철종(哲宗)의 즉위, 조선역사상 전대미문의 사건
- 조선왕조의 19세기는 연이어 준비된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의외의 변수가 등장하여 순조(純祖)의 아들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순조(純祖)의 손자인 24대 헌종(憲宗)이 8세에 즉위한 후, 계속 후사가 없어 왕위계승을 위하여 왕자를 전국에 수배하여 모셔오는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이 이뤄진다.
- 강화도령 이원범 외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후보자가 있었나?
① 이하응, 훗날 흥선 대원군이 되는 3형제 모두 왕위후보감이지만, 이하응은 막내이지만 30세로 종친부를 이끌었던 고위직 인물이어서 왕으로 옹립은 적당치 않았을 것
② 이하전,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의 종손(宗孫)으로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에 친척이 없는 외아들에 헌종의 조카 벌(이경응·이원범 형제는 헌종의 삼촌 벌)로 항렬도 맞아 왕실에서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순원왕후는 후사를 우려하다 덕흥 대원군의 증손 이하전을 내정하고 그 아명(兒名)을 인손(仁孫)이라 명하시니···” <풍운한말비사>
③ 이경응, 정조(正祖)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로 22세
④ 이원범, ” 19세
- 유력한 후보 이하전을 제치고 강화도령 이원범으로 정한이유?
순원왕후의 측에서 보면 당장 적합한 인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 이하전은 8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똑똑해서 당시 이항로가 평가하기를 ‘나중에 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여 영특한 이하전은 안동김씨 권력행사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했을 것
※ 순원왕후는 철종(哲宗) 8년에 사망
〇 철종(哲宗), 왕이 된 남자
- 왕위에 오른 철종(哲宗), 기분은 어땠을까?
순원왕후가 대신들과 함께 처음 접견한 철종(哲宗), 대신들이 묻는 말에 어색해 하며 머뭇거리자 신하가 다음부터는 질문에 정확히 대답해 달라는 청을 한다.
- 2000년 대에 재해석된 광해군(光海君), 1960년대에는 철종(哲宗)이 주인공인 영화 · 드라마 제작이 활발했고 <영화 강화도령>은 강화도령이 궁중의 예법을 배우는 과정을 코믹하게 드라마화 한 것
- 강화도령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혼약을 맺은 여인이 있었는데, 왕이 된 후에도 첫사랑을 잊지 못해하자 급기야 조정에서는 여인을 살해하게 되고 상심한 철종(哲宗)은 이후 여색을 즐기며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 왕(王)이 될 수 없었던 남자, 강화도령
대대로 역모에 연루된 강화도령 이원범의 가문은 역모의 화근이라 할 정도로 정치범·사상범의 집안으로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원범의 백부)은 역모에 연루되어 사형당하고 부친(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 또한 상계군의 부친인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는 천주교도로 1801년 은언군과 함께 처형당하여 도저히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위험한 집안의 후손
- 이러한 강화도령 이원범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비책으로 순원왕후는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여 하루아침에 순조(純祖)의 아들이 된 강화도령 이원범 “갑곶진에 이르렀다··· (왕이 되실 분의)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하나하나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 “이름은 모자 모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대왕대비의)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1849년 6월 7일 경산일록>
- <강화행렬도>는 한양에서 강화도령 이원범을 모시러 가는 행렬을 그린 그림으로 드라마 장면과는 차원이 다르게 화려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행렬 <조선미술박물관(평양) 소장>
- 오색구름 · 양 떼 등 유독 신성시 되는 철종의 즉위관련 묘사는 철종(哲宗)의 즉위가 천명(天命)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지로 철종(哲宗)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 보니 철종이 원래부터 왕이 될 인물이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 “기유년(1849) 봄에서 여름사이에 밤중만 되면 잠저에 광기(光氣)가 뻗쳐있는 것이 남산(강화도)의 봉대 위에서 보였는데··· 봉영하기 하루 전 날에야 그 광기(光氣)가 비로소 없어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용흥(龍興)의 조짐임을 알게 되었다” <철종실록 명순왕비가 써 내린 행록>
- 또한 “순원왕후의 꿈에 영안 부원군 김조순이 한 어린아이를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시오’ 하였는데, 왕후께서는 꿈에서 깨고 나서 그 일을 기록하여 두었던바, 그 후 임금이 궁궐에 들어오게 되자 이를 살펴보니 의표(儀表)가 꿈속에서 본 아이와 똑같았습니다.” <철종실록 철종대왕 행장> 그 만큼 왕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반증(反證)
〇 철종(哲宗)의 신분세탁 프로젝트
- 철종(哲宗)의 정통성 확보는 어떻게 이뤄졌는가?
<일성록·승정원일기> 등에서 철종(哲宗)의 조부인 은언군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칼로 도려내어 삭제하지만 왕의 사후에 기록되어 왕도 열람할 수 없었던 실록에는 낱낱이 남아있는 은언군 관련 기록, 주도자는 결국 순원왕후로 봐야 할 것
- 세초(洗草) 전담부서가 따로 있었나?
1776년~1849년 까지 74년간의 방대한 기록으로 민감한 작업이라서 소수인원이 참여한 듯하여 초기에는 칼로 정확하게 도려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지우다 만 흔적들이 발견, 조선왕조 500년의 힘인 기록문화 <일성록·승정원일기> 등 역사적 사료까지 흠집을 내면서 명분을 내세웠던 세도정치의 세력들
〇 국혼(國婚)으로 다시 잡은 권력, 안동김씨 세도정치
- 철종(哲宗)이 보위에 오른 뒤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지는데, 아직 가례를 올리지 않은 철종(哲宗)을 위해 순원왕후가 내린 조치, 삼간택 끝에 순원왕후는 8촌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비로 최종 낙점하여 안동김씨 집안은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다.
- 어느 시대건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정승도 충신도 필요 없이 왕비 하나면 된다는 조소(嘲笑)가 있는데, 왕비의 배출로 권력을 다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당시에는 보통 10대 초반이면 결혼을 했는데 철종(哲宗)의 경우에는 19세까지 결혼을 하지 못해 금혼령을 1년 가까이 유지하다 고심 끝에 간택하여 혼례를 올리고 철종(哲宗)의 외숙부인 김좌근을 통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부활이 시작된다.
- 철종(哲宗) 제위기간 안동김씨 세도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매관매직으로 호화생활을 누린 안동김씨 “혜당 댁 나귀는 약식을 잘 자시고 호판 댁 큰 말은 약식을 아니 잡숫는다.” <풍운한말비사>
- 조선시대 부정축재 방법은 다양했지만 19세기 부정축재의 창구인 환곡제도, 일반적으로 환곡은 춘공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1할의 이자와 함께 가을에 돌려받는 구휼정책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재정상태가 열악해지면서 환곡이 중앙과 지방재정에 조세(租稅)역할을 했던 것.
〇 부정부패의 온상 환곡(還穀)
- 세도정치의 <3정 문란>은 전정·군정·환정의 세 가지 수취체제가 변질하여 부정부패로 나타난 현상으로 조선시대 탐관오리의 소명 ① 상납(上納)한 만큼 뽑아내기 ② 빼돌린 관아(官牙)의 곳간 채우기, 또한 이들의 수탈방법은 ① 환곡이 필요한 백성에게 부역면제를 빌미로 갈취 ② 환곡을 원하지 않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대출하는데 겉만 쌀이고 속에는 잡곡과 돌이 대부분 ③ 빌려준 것처럼 장부에만 기재하는 방법, 백성을 상대로 구휼정책이 아닌 대부업으로 변질된 환곡제도로 필요하지 않은 자에게 까지 억지로 빌려주고 속임수까지 쓰는 악독한 수탈방법
- 환곡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나?
관노비(官奴婢)가 되거나 말·소 등 가축을 강탈하고, 빚의 연좌제로 가족·친지·이웃에 전가되는데 대부분 고을의 수령과 아전의 주도로 이뤄진 수탈은 견제세력조차 없어 극심했던 횡포에 설상가상으로 철종(哲宗) 대 유난히 자연재해가 잦아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 고통, 조선은 농업이 근간인 나라로 농민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가면 당장도 어렵지만 나라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
〇 민란(民亂)의 시대 농민, 봉기하다
- 영화 <군도>의 역사적 배경의 철종(哲宗) 13년 인 1862년, 조선 백성들의 삶은 탐관오리들과 양반들의 착취에 더욱 피폐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가 시작하는데 “세상은 어느 덧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바로 잡으려 한다.”
- 진주에서 저항의 불씨가 타오르면서 과도한 조세수탈과 양반들의 횡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봉기(蜂起)를 일으킨 농민들은 진주관아를 습격하여 아전을 죽이고 부유한 집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데, 진주에서 시작된 불씨는 순식간에 삼남 일대로 번져가고 조정(朝廷)은 긴장상태에 놓이게 된다.
- 백성들의 분노가 이해되는 것이 수령들의 횡포와 구조적 악순환, <임술농민봉기>는 1862년 진주에서 발생한 농민항쟁으로 이후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는데, 탐관오리의 교과서격인 경상 우병사 백낙신은 병영(兵營)의 경비를 착복하고 이를 백성에게서 거둬 충당하면서 협박·갈취·공갈 등 각종 비리를 총동원하여 자행한다.
〇 철종(哲宗), 삼정개혁에 나서다
- 백성들 가까이 살았던 철종(哲宗), 어떤 결단을 내렸나?
5년간의 강화도 생활로 백성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철종(哲宗), 나름대로 빚 탕감 · 환곡 분배 · 납부 연기 등 나름대로 백성의 고통을 덜기위해 노력을 했으나 농민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장기화되자 본격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삼정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 격인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강력한 개혁의 의지를 보인다.
- 여러 개혁 방안 중 시도된 것이 있었나?
환곡미 환수 유예기간을 1년→ 3년으로 연장, 이에 대한 부족된 세수(稅收)는 토지에 부과하여 토지가 없는 일반 농민에게는 세금 부담 완화
- 과연 농민들은 부담을 덜 수 있었는가?
환곡 폐지가 아닌 토지세 등의 새로운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삼정이정청의 조직도를 보면 모두 안동김씨로 개혁을 해야 할 당사자들에게 개혁을 맡긴 셈인 격
- 당시 최고의 권력기관인 비변사, 이곳에서 당상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안동김씨를 비롯한 몇몇 성씨들이 장악하면서 실제적으로 개혁이 이뤄질 수 없는 상황, 심지어 1865년에는 탐관오리의 교과서인 백낙신이 석방되고 그로부터 12년 후인 1877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하는 등 끊을 수 없는 세도정치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 철종(哲宗)은 즉위 초부터 삼정의 문란을 인식했던 듯, 침실 벽에 탐관오리들의 이름까지 적어 놓기도··· 역대 왕 중 영조(英祖)는 10년의 사가생활로 균역법의 밑바탕인 반값 호포를 시행했고, 유일하게 지방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철종(哲宗)은 <안민(安民)>을 벽에 써놓고 이것은 나의 책임이라 다짐하는데 스스로 제대로 된 군주가 되고 싶은 욕망은 있었던 듯
〇 안민을 꿈꾼 철종(哲宗), 현실정치에 부딪히다.
- 철종(哲宗) 8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개혁의 의지를 보인 철종(哲宗), 부정한 과거제를 질타하고 안동김씨 세도가의 반대세력을 임명해 왕권강화를 시도하며 왕으로써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기도 하고, 흥선 대원군의 업적으로 알려진 ‘서원철폐’ 보다 앞서 ‘서원의 문제점’을 인식한 철종(哲宗)은 서원이 본연의 기능인 후진양성과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 면세의 특권과 당쟁의 온상이 되어, 정치세력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간으로 인식하면서 전국에 서원철폐령을 내리는데, 철종(哲宗)의 소심한 성격 탓으로 자신이 재임한 이후에 설립한 서원만 철폐하도록 한다.
- 개혁을 꿈꿨지만 현실정치에 가로막힌 철종(哲宗), 벌레 먹은 나뭇가지를 잘라내면 될 줄 알았는데,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서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현실
- 철종(哲宗)의 마음이 점점 국정에서 멀어졌을 듯?
사실 재위 후반기에는 경연(慶宴)횟수가 줄어드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경연은 왕과 신하들의 소통의 연결고리로 논의를 해봐도 본인의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어서 관심이 떠나지 않았을까(?)
- 안민을 새겼던 철종(哲宗), 역사적인 재평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왕으로서 일하고 싶었으나 일할 수 없는 슬픈 왕, 19세기 조선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대, 33세의 이른 나이에 후사 없이 승하한 철종(哲宗), 신정왕후(조대비)가 고종(高宗)을 양자로 맞아들이면서 드디어 흥선 대원군 시대가 열리고, 막(幕)을 내린 63년간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 철종(哲宗)의 왕위 즉위일은 용의 날개를 달았으나 인간으로서의 손발이 묶인 날,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견고한 권력구조 안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여정이 시작된 날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노력을 했던 비운의 왕 철종(哲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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