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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流配) 18년 정약용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mkpark2022 2015. 8. 25. 17:08

 

 

 

유배(流配) 18년 정약용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천주교 박해> 정약용 일생 최대의 위기

- 18012(순조 1) 국청(鞠廳)이 열리고 그 자리엔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도 있었는데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로 형제에게 가혹한 심문이 이어지고 독실한 신자였던 셋째 형 정약종의 죄를 낱낱이 고하라는 것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으니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접한 천주교 그것이 정약용 삼형제를 죽음으로 내몰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 결국 신()을 믿었다는 이유로 셋째 형 정약종은 사형을 당하게 되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오르면서 18년의 유배생활이 시작되지만 그것은 정약용이 새로운 조선을 꿈꿀 기회의 시간이었다.

- 정조(正祖) 승하 후, 조정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약용은 고향 마재(남양주)로 내려와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걸고 은신하면서, 천주교 박해라는 정치적 수난을 겪게 된다.

여유당 :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다

- 이미 천주교와 결별한 정약용이 국청에 선 이유?

독실한 천주교 신자 정약종(셋째 형)이 천주교 성물(聖物)을 몰래 숨기다 발각되어 의금부에 끌려간 형제들, 정약종·이승훈(매형이벽(형의 처남으로 핵심인물) 이들은 반대파의 시각으로 보면 완전히 천주교 쟁이 집안인 것, 결국 이들은 참수형(斬首刑)을 당한다.

- 1801년 신유년 천주교 박해에서 살아남은 정약용과 정약전, 막상 서류를 뒤져보니 약용에게는 천주교를 알리지 말라” & “약전이 천주교를 믿지 않는 것은 내 죄다라는 편지가 나오게 되고 이는 두 형제의 무죄를 입증한 셈

- 그러면 무죄로 석방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약용 같은 인물은 정치적으로도 크게 활약을 했고 학문적으로도 명망이 있어서 반대파의 표적이 돼 유배를 간 정약용,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영일만)으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정약용의 첫 유배지는 강진이 아닌 경상도 장기

 

정약용의 두 번째 시련 <황사영 백서 사건>

-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신유박해 당시 제천의 배론성지 토굴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는 사건으로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의 전말을 비단에 적어 북경의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

- 내용을 보니 사실 경악할만한 내용 프랑스에서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정교한 무기를 많이 싣고···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이는 천주교 입장에선 종교탄압을 알렸을 뿐이지만, 조선 왕실의 입장에서는 역모(逆謀)를 꾀하는 일로 서양과 연합한 남인의 역모를 두려워했던 노론세력들

- 사형에 처할 위기에 놓인 정약용, 하지만 황해도 관찰사 정일환의 만유로 구사일생 정약용은 서쪽지방에서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남겼으니 죽여서는 안 된다.” <자찬묘지명>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장기에서 강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는 것, 이는 당시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호남지방에 강력한 경고를 주기 위한 것

 

정약용의 유배 18

- 1801년 천주교 탄압으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정약용과 정약전은 머나 먼 유배 길에 오르는데, 나주 밤남정 주막에서 마지막 밤을 맞는 형제 일어나 샛별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나도 형도 말이 없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되고 마네” <정약용의 율정별(栗亭別)>

- 야속하게도 날은 밝아 형제는 밤남정 삼거리에서 헤어져 형은 흑산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출발하고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을 형제는 알지 못했다.

- 여러 형제 중 가장 각별했던 정약용과 정약전, 정약용이 말하기를 형은 지기지우(知己之友),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벗이라고 얘기를 했다고··· 흑산(黑山)이란 이름만 들어도 끔찍했던 정약용, 같은 뜻을 가진 (검을 흑)(검을 자)로 고쳐 부르게 하고 형은 호를 자산으로 쓰면서 <자산어보>라는 우리 최초의 해양생물학서를 저술한다.

- 유배지에서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은 형제, 섬에 있으니 고기 먹을 일이 없다는 형의 서신에 정약용은 ()에 있는 ()을 잡아서 잡수시라면서 포획방법부터 요리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면서 박제가가 알려 준 방법이라고 적는다.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아드리는 것을 빠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산시문집 제21>

 

조선시대 귀양살이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유배는 흔히 귀향이라고 하는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던 유배형, 기본적으로는 종신형이었고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천리 · 25백리 · 3천리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죄의 등급이 무거울수록 먼 곳으로 유배

- 한양에서 강진까지 3,000리가 안되는데?

이는 중국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에 따른 규정으로 땅덩어리가 좁은 조선에서는 처음에는 곡행(曲行)으로 거리를 채우기도 했으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세종(世宗) 2천리6백리 · 25백기75십리 · 3천리9백리의 바닷가 고을로 결정함

- 유배지 도착 기한이 정해져 있었나?

당시 기록에 의하면 하루 80~90(40Km)를 가야했고, 먼 유배지는 한 달 정도 소요됐으며 유배지로의 이동은 말을 이용했고 드라마 속 유배 가는 장면의 함거(소달구지)는 처형장에 갈 때 사용하는 것으로 고증(考證)이 잘못된 것.

- 유배는 양반에게만 해당되는 형벌?

조선시대 이름난 벼슬아치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아 네 명 중 한 명꼴로 유배를 갔고, 양반·평민·노비·심지어 코끼리도 사람을 밟아 죽인 죄로 유배를 보낸 사례가 있으며, 네덜란드인 하멜도 강진으로 유배

- 특히 꺼리는 유배지가 있었나?

산수·갑산의 함경도 오지와 강진과 흑산도를 비롯한 남해안의 섬 지역은 기피지역, 유배죄인의 출입이 잦아 모슬포를 못살포로 부르기도 했고 이곳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

- 유배죄인들의 숙식해결?

이들의 숙식방법은 고을의 수령이 보수주인(保守主人)을 정해주는데, 이들은 유배 온 죄인의 거처를 제공하고 죄인을 감시하는 책임으로 매몰찬 집주인을 만나게 되면 밥을 굶기도 예사였다고···

 

기나 긴 유배생활 시작되다.

- 정약용은 당시 보수주인을 잘 만났나?

정약용은 당시 1급 사상범이자 정치범으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해 처음에는 거처를 얻지 못했다가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골방 한 칸을 얻어 사용하다 제자들이 생기면서 <사의재>라는 학당으로 꾸미게 되고 사의재 보은산방 제자의 집을 거쳐 다산초당에서 10년간 머물게 된다.

사의재(四宜齎) :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으로 신중한 행동 · 과묵한 말씨 · 엄숙한 용모 · 맑은 생각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802년 귀향 살이 시작 이듬 해, 막내아들 농아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는데 4살짜리 농아가 마마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정약용은 비통한 마음을 전하는데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참혹하고도 슬프구나. 그 애 생애가 불쌍하구나. 내가 더욱 쇠약해질 때 이런 일까지 닥치다니 정말 슬픈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릴 수 없다. 능히 생사고락의 이치를 어설프게나마 깨달았다는 내가 이런데 품속에서 꺼내어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은 네 어미야 어떻겠느냐? 그 애가 살아있을 때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기특하고 어여쁘게 생각되어 귓가에 쟁쟁하고 눈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답양아>

- 유배 중에 아들의 비보를 들은 정약용, 농아(農兒)는 농사나 짓고 목숨이나 보전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오면 천연두가 나을 거라 믿었던 아들 농아, 정약용이 끝까지 가지 못해 가슴 아파 했다고···

- 실제 63녀 중 홍역이나 천연두로 42녀를 잃은 정약용, 아마도 정약용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마마(천연두)였을 것, 자신도 2살 때 천연두를 앓은 경험이 있어서 이런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뜻이 반영된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술

마과회통 : 1798년 정약용이 편찬한 천연두와 홍역에 대한 의학서

- 두 아들 학연·학유가 천연두를 무사히 마친 기념으로 축하 시()를 짓는데 작은 아이 말 배워도 그대 아니 기뻐했고, 큰 아이 글자 배워도 그대 아니 믿었었지” <다산시문집 제1권 완두가> 이 아이가 앞으로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무슨 예쁜 짓을 해도 기뻐할 수 없었던 것

- 고향의 가족들에게 편지로 사랑을 전한 정약용은 스스로 자기 집안을 폐족이라 칭 폐족이 되어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집안 사람보다 백배 노력해야 겨우 사람 축에 끼게 될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21>

폐족(廢族) : 조상이 큰 죄를 지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

- 술을 좋아하는 작은 아들에게는 어찌 글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냐?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다 탁 털어 넣는데, 그들이 무슨 맛을 알겠느냐?” <다산시문집 제12>

- 제자에게도 아낌없는 잔소리를 했던 스승 정약용, 사의제 시절에는 황상이라는 상당히 뛰어난 제자를 만나는데, 신혼의 단꿈에 빠져 글공부에 소홀해진 황상에게 각방을 쓰라고 권유할 정도였다고···

- 유배 중인 남편에게 다홍치마를 보낸 정약용의 아내, 6폭의 치마에 <매조도>를 그려 시집간 딸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전하고, 네 권의 서첩(하피첩)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냈는데, 최근 하피첩으로 추정되는 의뢰품이 진품명품에 등장, 의뢰인은 고물을 줍는 할머니에게 고물과 바꿨다는데 폐지 더미에서 되찾은 소중한 문화재로 당시 감정가 1억 원, 두 아들에게 경계(警戒)하는 구절의 서문은 다산이 직접 지은 것으로 가치가 대단한 것

(노을 하) (치마 피) : “노을 치마라는 뜻의 <하피첩>

 

유배생활 18, 좌절을 기회로 바꾸다.

- 유배지에 내려와 처음 한 말 이제야 마음 놓고 공부 할 수 있겠구나” & “정약용 18년 유배는 개인에게는 불행이지만, 조선(朝鮮)의 역사에는 행운이었다.”<일본 학자>

- 학문몰두(學文沒頭)로 과골삼천(踝骨三穿),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났다던 정약용, 항상 건강이 좋지 않은 듯하여 50세에 형에게 보낸 편지 풍병은 이미 뿌리가 깊어졌고 입가에는 항상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늘 마비 증세를 느끼고, 또 혀가 굳어져 말이 어긋났다” <다산시문집 제20> 중풍(中風)의 증세이고, 시력도 좋지 않아서 안경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상화도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

- 저술(著述)의 달인, 정약용

아픈 몸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던 저술활동으로 공식적으로 182503권을 저술, 오늘날은 보통 1책은 1권이지만 조선시대 1책은 평균 3

- 저술을 많이 남긴 조선시대 학자로 16세기의 퇴계 이황 · 17세기의 우암 송시열, 이들은 주제가 철학이나 성리학에 편중된 반면 정약용의 작품은 정치·경제·역사·지리·음악·과학·국방··· 등 다양한 모든 분야를 섭렵

- 다작인 만큼 내용이 부실하지 않았을까?

다산 정약용의 저술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창으로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서 치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체계적인 저술

- 500여권 저술(著述)의 비밀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제자들과의 환상적인 팀워크, 정약용과 제자들의 연구 분업시스템으로 옛 문헌 조사(경서·사서) 2· 스승의 말씀 받아쓰기 4· 반듯하게 고쳐 쓰기 3~4· 수정 및 책엮기 3~4· 대조 및 검토 3명으로 이 과정의 1차 작업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다산이 점검하고, 이런 과정을 다섯 번 반복해야 비로소 한 권의 책 탄생

- 죄인 신분의 정약용이 저술에 매진한 까닭은?

수많은 저서를 통해 현실적인 개혁안을 마련하고 언젠가는 직접 실현할 수 있을 때를 기대했을 것이고, 설령 자신이 실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세에 활용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백성을 위한 개혁안 <목민심서>

- 때를 기다리며 준비한 정약용의 12서로 경세유표 · 흠흠심서 · 목민심서, <경세유표>는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위한 국가제도 개혁안, <흠흠심서>는 형사사건 재판·심리요령에 대한 저술로 형법서,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기록한 지방관리 행동지침서

- 저서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목민심서, 牧民은 백성을 기르고 心書는 마음에 새겨야 할 지침서로 가장 핵심은 지방관이 잘해야 된다는 의미

- 당시 지방 관리의 부패가 심각?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 하지만 백성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 지방관리, 당시 기근으로 굶어 죽은 시체에 파리가 들끓는 현장을 목격하고 <조승문(弔蠅文)> 파리에게 조문함이라는 시를 남김 저 파리는 죽여서는 안 된다. 굶주려 죽은 자의 원혼이다창궐한 파리 떼를 보며 당시 부패한 지방 관리를 비판한 글

- 당시는 1급 사상범이 쓴 책이라서 금서(禁書)였던 목민심서, 하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 필사(筆寫)본이 나돌 만큼 인기, 이를 두려워한 정약용은 정치적 수세에 밀린 상황에서 또 다른 빌미가 될 것을 우려했던 것

- 다산이 말하는 관직을 맡기면 절대 안 되는 사람 관직이 좋아서 자랑하는 사람 자신의 능력과 맞지 않는 관직을 바라는 사람, 백성을 대하는 목민관은 능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가르침

- 200여 년 전에 쓰여 진 <목민심서>이지만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정약용의 목민관, <()목민심서>가 현대식 공무원 지침서로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간 편하면 선물, 불편하면 뇌물” & “그 일을 네 자식에게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 “그 일이 내일 아침 신문에 실려도 떳떳할 수 있을까?”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인임의 대사 정치엔 선물이란 게 없네.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주는 뇌물이 있을 뿐

- 선물(膳物)과 뇌물(賂物)의 기준은?

<목민심서>의 기준 선물로 보내온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은정(恩情)이 맺어졌으니, 이미 사사로운 정이 행해진 것이다” <목민심서 율기 6> 물건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가까운 사람을 관청에 들이지 말라 무릇 관부는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 <목민심서 율기 6> &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면 그 일을 하지 말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마라” <다산시문집 제18> & “집에 돌아와서 물건이 없어 검소하기가 전과 같은 것이 으뜸이다” <목민심서 해관 6>

- 200년 전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공직자들에게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이 놀랍고 또한 부끄럽다는 것, 어떤 나라나 조직이든 가난해서 망()하는 나라는 없고, 부패(腐敗)해서 망할 뿐이다”. 200년 뒤 후손들에게까지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정약용

 

부채가 이뤄준 18년 유배의 끝

- 1805년 정약용을 찾아온 친구 김이재, 고금도 유배생활이 풀려 고향으로 가던 중이었고 자신을 위로하고 떠나는 김이재에게 부채에 시() 한수를 적어주고, 한양에 돌아온 김이재는 유배지에 있는 정약용을 그리워하며 항시 부채를 들고 다니던 어느 겨울 날, 당대의 세도가 김조순을 만난다.

- 한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는 이유를 묻자 김이재는 김조순에게 부채를 보여주는데, “역정(驛亭)에 내리는 가을 비, 벗을 보내기 더디게 하네. 옛 고향 그리워 머리 돌리고 눈물 줄줄 드리네.” 부채 속의 글을 본 김조순은 정약용의 글임을 알고 유배에서 풀려나도록 상소를 올린다. <황현의 매천야록>

- 18년 만에 유배가 풀린 정약용 당시 57, 준비했던 개혁안을 펼칠 기회가 있었나?

1823년 동부승지 기회가 오지만 남인 핵심인물의 귀환에 대한 반발로 무산되고, 1830년 익종(翼宗)과 순조(純祖)가 아팠을 때 의관(醫官)의 자격으로 두 차례 기회가 오지만 익종과 순조의 사망으로 무산, 정약용도 비참했을 것··· 나라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자신을 의관(醫官)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 만약 정약용이 관직에 복귀했더라면?

복귀했다 하더라도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심화되는 정치상황 속에서 섣부른 행동을 했다가는 오히려 강진보다 더 먼 곳으로 유배되지 않았을까···(?)

 

19세기 조선(朝鮮)에는 정약용이 있었다.

- 1936년 일제강점기에 재조명 된 정약용의 저술은 당시 조선학 운동의 기반이 되는데, 일제의 타율성론은 조선의 역사는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니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할 때, 정약용의 저작(著作)은 조선이 스스로 근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었던 것.

- 세도정치의 파행으로 조선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폄하됐던 19세기, 그러나 19세기는 제대로 된 역사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시기였고 그 생각의 변화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정약용, 18년 유배생활 동안 백성을 위한 연구를 지속했던 정약용은 정조(正祖)라는 해가 진 후 인생의 암흑기였지만 암흑을 뛰어넘는 업적을 남긴 세월을 보낸 것으로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실학자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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