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mkpark2022 2015. 8. 24. 16:52

 

 

 

임나일본부

 

 


일본의 꿈,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 “4세기 말 조선반도 남부에 임나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어 복수의 작은 국가가 존재했고 임나에 대해 영향력을 갖게 됐다”. <4.6 검정 통과 일본 이쿠호샤 교과서> & “야마토 정권은 백제와 가야지역(임나) 국가들과 연계해 고구려, 신라와 싸운 기록이 있다” <4.6 검정통과 일본 도쿄서적 교과서>

- 일본이 집착하는 임나(任那)?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장, 이영식 교수>

임나(任那)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일본, 문제의 일본 교과서 속 임나는 가야와 전라남도 지역으로 표기, 일본 야마토 왕권이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720<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임나일본부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

일본서기 : 720년에 편찬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정사로 신화시대부터 697년까지의 역사를 기록

- 일본이 임나라는 표현을 만들었나?

우리 고대사 기록에도 임나는 등재 (강수)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며···” <삼국사기 열전, 강수 편> 사실은 강수는 중원경(충주)사람인데 신라가 병합을 하면서 가야인들을 충주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반란을 예방 했던 것으로 충주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임나가량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륵 : 대가야 사람으로 가야 멸망에 따라 신라에 투항한 가야금 악사

-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쓴 역사서에는 임나(任那)와 가야(伽倻)는 글자가 서로 비슷해서 잘못 분간한 것이니라.” <안정복의 동사강목 부록 하권>

- 가야는 기원 전후~562년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던 연맹체로 낙동강 유역의 넓은 평야와 철()의 왕국이었으나, 백제와 신라의 견제 속에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562년을 마지막으로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일본의 역사 왜곡, 임나일본부란?

- 任那(임나)의 뜻은?

임나의 ()와 신라의 ()는 우리말의 땅·나라로 같은 의미, 임나=임의 나라=()의 나라라는 뜻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한자어는 <()의 침묵>

- 일본이 임나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의 복심이 깔려있는 것으로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4세기 중엽~6세기 중엽까지 200여 년간 지배했다는 것으로 고대의 일본 조선총독부인 셈이라는 것이 핵심

- 일본의 임나일본부 주장, 근거는?

<일본서기>임나일본부 등장은 540~550(6세기)인데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 후반에 들면서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여 시기적으로도 불일치

- 글자 풀이의 임나일본부 = 임나 + 일본 + , 문제는 부()는 관청의 뜻으로 로 발음하지만 일본서기 주석(註釋)에는 로 발음하지 말고 미코토모찌로 발음하라고 기록, 임나일본부는 관청이 아닌 사람으로 읽으라는 해설을 붙여 임나지역의 일본 사람 으로 해석하고 그 외에도 <일본서기>에는 일본부라는 표현이 23번 등장하는데 통치의 역할이라면 이들의 업무는 세금징수 군사징발 우마징발 등을 해야 지배했다는 증거이지만, 이런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관청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것.

 

4~5세기 한일교류의 진실

- 일본서기의 일본부’ 23번의 기록은 무슨 내용?

Only 외교에 관한 기록으로 결정적인 것 在安羅 諸倭臣<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 안라(함안)에 있는 여러 왜신들 임나일본부는 재()가야 일본 거류민이라는 뜻

- 당시 왜는 백제와 주로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 이전에 이미 가야와 교역을 했고 주교역 대상은 가야의 철 가야에 철이 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 4~5세기 가야의 대표적 유물로 철기를 만드는 덩이 쇠 철정(鐵鋌)’은 화폐로도 통용했다고··· 하지만 일본의 제철 기술발달은 6세기 이후로 가야의 제철기술은 일본에 최소한으로도 100년 이상 앞서있었던 것

- 고대국가의 경영의 필수품인 철을 얻기 위해 왜()는 가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의 철기수입을 임나일본부가 담당했을 듯···

- 지금까지의 얘기를 뒤집어야하는 사건, 역시 <일본서기>의 기록이지만 임나일본부의 기록은 6세기 전반인데, 그 보다 150여 년 전 <신공기(神功紀)> 의 기록에 신공황후가 가야 7국과 전남 일대를 평정했다?는 기록이 등장하여 이를 인정한다면 그 때 평정 후 임나일본부를 세웠다고도 할 수 있는 것

신공기 : 신공황후(170~269)의 기록이 담긴 일본서기

 

역사 VS 전설, 신공황후의 삼한(三韓)정벌?

- 일본의 14대 중애천황은 지금의 규슈지방 정벌을 계획하지만 아내 신공황후가 이를 말리면서 꿈에 신이 자신에게 한 약속을 전하는데 ()이 황후에게···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그 나라는 저금신라국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권 제8 중애천황> 이는 바다 건너 보물이 많은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제사를 잘 지내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

- 신공황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애천황은 정벌에 나가 목숨을 잃게 되고, 남편을 잃은 신공황후는 만삭(滿朔)의 몸으로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직접 바다를 건너는데, 신공황후가 당도하자 신라왕은 바닷가까지 달려와 항복하고, 이 소문을 들은 백제와 고구려인들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데··· 이것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의 시작이다

- 재미있는 것은 당시 임신 중인 아이가 15대 태중천황(뱃속부터 천황), 신공황후는 출산기 2년이 지나도록 출산을 하지 않자 뱃속 아이에게 물으니 신라를 정벌할 때까지는 나가지 않겠다는 대답이어서 만삭(滿朔)의 몸으로 신공왕후가 신라정벌에 나섰다는 것.

- 우리의 삼국사기에서 곰이 여자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믿을 수 없는 얘기라는 공격이 있었는데, 사실은 이 설화(說話)에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반영돼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

- 일본서기의 신뢰도는?

<삼국사기><일본서기>에도 허무맹랑한 기록을 하고 있지만, 사실 둘 다 우리의 역사를 보는 데 필요한 것, 내가 나의 뒷모습을 보려면 두 장의 거울이 필요한 것으로 <삼국사기·일본서기>는 고대사를 분석하는 중요한 거울서로가 상대의 기록을 보면서 자기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것

- <일본서기> 흠명기편(29대 흠명천황509~571의 기록)<한국서기>로 착각할 정도로 왕의 탄생과 죽음 외에는 주로 가야·고구려·백제·신라의 이야기이고 그 중 90% 이상이 가야에 관한 일들이 임나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일본서기>가 편찬된 720, 이때는 이미 문물을 전해준 백제와 가야는 멸망했던 상황이어서 자신의 문물을 받아들인 나라가 없어지자 그 관계를 역()으로 서술해 마치 백제나 가야로부터 왜()가 조공(租貢)을 받은 것처럼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논란, 광개토대왕릉 비문(碑文)

- 일본의 주장,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주장은 우리의 유물인 광개토대왕릉비로 높이 6.39m 너비 1.5m 무게 37톤으로 1,77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414년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념해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 멸망 후 광개토대왕이 역사 속에서 잊혀 있다가 19세기 후반 청나라 시대에 재발견되어 고대사 해석의 열쇠로 활용되는데, 문제는 일본의 육군 참모부 쪽에서 비문을 탁본해 비문에 나오는 몇 글자 중 자신에게 유리한 신공황후가 삼한지역 일부를 정벌했다는 기사의 근거로 비문이 활용되고 있는 것

- 비문의 내용 백잔신라(百殘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백잔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유래조공(由來朝貢)” 옛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 왜이신묘년래도해(倭以辛卯年來渡海)” 그러나 신묘년(391)부터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파백잔XX라이위신민(波百殘XX羅以爲臣民”) 백잔XX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육년병신(以六年丙申) 왕솔X(王率X) 토벌잔국(討伐殘國)” (이런 문제가 있어서) (영락)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X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쳤다.

백잔은 고구려가 백제를 낮춰 부르는 말로 잔당, 떨거지라는 표현

- 신묘년(391)의 내용은 왜()를 위한 문장이 아닌 것으로 왜가 신라·백제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광개토대왕이 왜()를 치는 이유를 강조하려고 과장한 것으로 병신년(396)의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전제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고 조공(租貢)을 걷어 왔으나 왜()가 들어와 질서를 어지럽히니 내가 몸소 처리한다는 내용으로 ()를 치는 명분을 제시한 것

- 그러나 일본의 해석은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부분만 가지고 임나일본부설 주장하고 있는 것

- 비문에 왜()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세 곳이 더 등장하는데, 모두 고구려군에게 철저히 궤멸당하는 왜() “영락 14년 갑진년··· 왕이 길을 끊고 찌르자, 왜구(倭寇)가 무너지고 패하니, 베고 죽인 자가 수도 없었다.” <광개토왕 비> 거의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섬멸을 하게 되는데,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임나일본부가 200년 동안 통치했다는 근거로 삼기에는 어려운 일

-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는 4세기 말(391)로 신라는 내물왕 대, 백제와 왜()의 협공을 받은 신라는 고구려에 군사요청을 하고 영락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유물로 확인하는 고대 한일관계

- 실제 고대 한일관계는?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는 4~5세기로 당시 가야와 왜의 관계는 가야는 철을 생산하는 나라이고 왜()는 철을 수입하던 나라로 철은 무기의 주재료이고 철을 가진 나라가 무력(武力)에 우세한 것은 자명한 사실

- 가야 VS , 무기 비교

당시 제철기술의 결정판 <환두대도>는 칼의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칼로 삼국시대에 주로 사용, 이전 세대는 청동검을 사용했는데 청동은 강도가 낮아 칼을 길게 만들 수 없어서 길이가 짧고 ()쪽의 날로 찌르는 용도의 검()을 사용

-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칼을 사용하였으나 당시 일본은 제철기술이 뒤져 긴 칼을 보편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 방어(防禦)를 위한 갑옷도 일본과는 크게 다른 것이 판갑은 철판을 넓게 재단하여 연결해 만든 갑옷으로 가야는 판갑뿐만 아니라 찰갑이라는 작은 철판을 엮어 만든 갑옷을 만들어 기병(騎兵)들이 주로 입었으며, 마갑이라는 말의 철갑까지 사용하고 마구(馬具)등자’(발받이)는 전쟁사에서 이의 사용 전후(前後)로 나뉠 만큼 중요한 역할, 등자의 사용으로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양손을 자유자재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 이에 비해 일본의 기병(騎兵)은 대륙이나 한반도에 비해 늦게 발달하는데 고대 전쟁의 승패는 무기의 차이가 결정적인 것으로 무기만 봤을 때 ()가 가야를 지배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

-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장면 백제 성왕이 왜왕에게 삼천 명의 용병을 요청하면서 ·식량·무기는 내가 제공할 것이니 몸만 오라는 내용, 무력(武力) 수준이 이 정도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백제가 왜()를 섬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

 

유물은 알고 있다, 칠지도

- 일본이 주장하는 또 하나의 근거인 칠지도 “52(백제의) 구저 등이··· 칠지도 한 자루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일본서기>

칠지도 : 7개의 가지가 달린 칼로 일본의 국보

- 칼의 양면에 60여자의 금 상감 글, 공공후왕(供供侯王)” 공손한 제후 · 왕에게 제공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주장 바친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 뒷면에 왕세자(王世子) 위왜왕(爲倭王)”으로 주는 사람은 왕세자(근초고왕의 아들)이고 받는 사람은 왜왕(倭王)으로 백제의 왕세자와 왜()의 왕은 상대적인 관계라는 증명, 전시후세(展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는 명령체의 문장왕세자(백제) = ()과 대응관계라는 증명인 것, 광개토왕 비문칠지도의 근거를 ()으로 해석하면서 섬겼다고 우기고 있는 것

근초고왕(? ~ 375) 백제 13대 왕으로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

-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역사가들의 견해는?

1970년대 이후 일본 역사학자들도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그 것은 가공의 기록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일본 학계에서 만일 임나일본부설을 지금처럼 운운하는 사람은 학자의 자격이 없다고 일본학계에서도 평가를 하고 있는 것,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고대의 실체보다는 오히려 현대에 와서 때만 되면 왜 고개를 드느냐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한반도 침략의 명분, 임나일본부설?

- 1592년 임진년 일본 나고야에 30만 일본군이 집결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수장으로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내 달라는 것, 그러나 임진왜란의 진짜 명분은 일본이 지배했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것으로 임진왜란 뒤에는 임나일본부설이 있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나일본부를 침략의 명분으로 이용했을까?

그가 임나일본부가 기록된 <일본서기>를 봤을 가능성은 많지만 침략 명분으로 임나일본부를 이용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임진왜란과 임나일본부설의 연결은 근대 정한론(征韓論)의 영향으로 조선침략의 합리화 과정에서 임나일본부를 연결하여 해석하려 하는 것

- <정한론>한국을 정벌하는 이론이라는 뜻으로 밑바탕에는 임나일본부가 있고 왜()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예부터의 일로 당연하다는 이론

- 충격적인 자료 <지리역사조선창가> 조선침략의 강제병합을 합리화한 것으로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대한 계략과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자)의 선견지명이 새로운 일본의 신판도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네··· 옛날의 임나가 이 근처라오 을밀대 서쪽 언덕 개국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기자의 영묘를 찾아 참배하니 까치가 울고 해 저물어 가네강제병합을 합리화하고 기자조선까지 왜곡적인 주장을 하는 창가(唱歌)까지 만들어 배포시킨 것

지리역사조선창가 : 1911년 출간한 노래책으로 조선 지리와 결부해 일제의 강제병합을 미화함

-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이 오늘 날 왜곡된 일본 교과서로 연결된 것,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편찬한 역사서에 임나일본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고대가 아닌 현대의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듯

- 최근 아베정권 전후로 동일본 대지진 · 후쿠시마 원전 폭발 · 그리고 그 이전부터의 장기적인 불황의 계속으로 국내의 어두운 분위기를 밖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역대 위정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정책

- 자료 수집에 치중했던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이 내용을 일부 인용을 하면서 일본서기 평을 <자과지사(自夸之辭)> 자신을 과시하는 발언이라고 정의를 하는데, 일본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역사의 과장이나 과시를 통해 뭔가 자신들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분위기, 그런 행위들이 우리에게는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힌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

- 결국 일본은 남이고 남이 어떻게 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우리가 부여사·고구려사 연구가 부진하여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를 불러들였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야사 연구가 공백의 상태에 있어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등장시키게 한 것, 사실 가야사는 약 600여년으로 삼국시대 대부분을 삼국과 같이 존재했었으나 삼국에 비해 외면 받은 가야의 역사연구에 부진했던 것이 오늘날의 이러한 원인이지 않겠는가?

- 그가 역사를 공부한 것은 자신이 분개하더라도 제대로 된 실정을 알고 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미제라블> 오늘날 우리가 일본의 역사 왜곡을 분개하고 있는데, 감정적으로만 분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 있고 정확한 역사인식을 가져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