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檀園) 김홍도
〇 ‘정조(正祖) 시대’를 화폭에 담다.
-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으며 왕의 초상을 세 번이나 그렸던 김홍도, 그러나 그는 용안(龍顔)을 그리는 영예로운 ‘어용화사’는 아니었다.
- 도화서 화원 중 상위 10명을 선발, 화원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은 자비대령 화원의 명단에서도 김홍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정말로 조선 최고의 화가였을까? 김홍도를 둘러싼 숨겨진 진실들이 공개된다.
- 1765년, 영조(英祖)의 즉위 41주년과 망팔(望八)을 축하하는 기념행사, 망팔(望八)은 여든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71살을 이르는 말이며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세손(世孫) 정조(正祖)가 영조(英祖)에게 다섯 번이나 청하여 겨우 성사된 일, 중요한 날을 기록하기 위해 도화서의 화원들이 동원되고 그 중 눈에 띄는 자가 있었으니 당시 21살의 김홍도
- 그로부터 8년 후(後), 영조(英祖)와 세손 정조(正祖)의 초상화를 그리는 장소에서 마주한 김홍도와 정조(正祖), 훗날 정조(正祖)는 김홍도를 이렇게 기억했다 “김홍도는 그림 솜씨가 있는 자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삼십년 전쯤 그가 나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김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홍재전서> 화폭에 담겨 역사에 남은 정조(正祖)의 시대
〇 정조(正祖) 시대 천재 화가 김홍도
-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에 출생하여 24년간의 정조(正祖) 재위 기간을 거쳐, 1805년 겨울 아들에게 쓴 편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1806년(순조 6)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 비교적 나라 살림이 넉넉한 평화로운 시기로 예술가들이 재능을 발휘하기 좋았던 영·정조 시대, 신윤복·김득신 등과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정조(正祖)는 예술을 정치에 적절히 활용한 예인군주(藝人君主)
- 세종(世宗) 대에도 과학자 장영실 · 음악가 박연 등 천재적인 예술 · 과학계 인물이 배출하게 되는데, 인재는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발굴하는 것.
〇 정조(正祖)와 김홍도 운명적 첫 만남
- 죄인(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계승의 입지가 불안했던 세손 정조(正祖), 영조(英祖)의 망팔연회는 세손(훗날 정조)의 다섯 차례의 간청으로 개최하여 세손의 정치적 입지를 확인시켜 준 그날의 기록, 1765년은 사도세자가 사망하고 세손(世孫) 책봉된 지 3년 후의 시점으로 아직까지 정치적인 지위가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
- 영조(英祖)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의 예진(睿眞)을 그리는 것이 김홍도와 정조(正祖)의 기록상의 첫 만남, 예진이나 어진은 터럭 하나 놓치지 않고 실물과 똑같이 그려야만 했던 작업으로 당대 최고의 화원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는 섬세한 작업, 덕분에 후대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 김홍도는 정조(正祖)의 몸통만 그렸다?
어진작업은 분업으로 이루어져 얼굴만 그리는 주관화사(主管畵師)는 어용화사라고도 하고 용안(龍顔) 이외를 담당하는 동참화사(同參畵師)로 나뉘어 있었던 것
- 왜 김홍도는 얼굴 아닌 몸통만 그렸을까?
섬세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으나 김홍도의 섬세함이 묻어나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호랑이의 털끝 하나하나와 살아있는 듯한 생생함과 소나무에 호랑이의 영역표시인 발톱자국까지 그려 넣은 섬세함.
〇 미남(美男) 김홍도
-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의 사람이 아니다.” <홍신유, 금강산 시> & “풍채와 태도가 좋고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어서 사람들이 신선중인(神仙中人)이라 하였다.” <조희룡, 호산외사> 김홍도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존재, 눈매는 날카롭고 콧대는 오뚝하며 귀가 큰 호남형의 인물
- 최초로 조선의 소를 그린 화가, 이전 까지는 중국의 화본(畵本)으로 연습을 하다 보니 중국 남방풍의 뿔이 긴 물소를 그렸으나 김홍도의 <논갈이>에 등장하는 소는 그간의 화풍과 달랐다.
- 김홍도의 그림은 민생보고서로 사용되었다?
백성들의 삶을 알기위해 김홍도에게 백성들의 일상을 그려오게 한 개혁군주 정조(正祖), 기존의 도화서화원선발 시험주제인 산수·꽃·동물 등의 문인화가 정조(正祖)대에 벼 수확·활쏘기·봄나들이·종로삼거리·광대놀이·씨름 등으로 다양해지고, 김홍도는 붓으로 전하는 저널리스트의 역할
- 당시 보통의 화원들은 도화서 소속이었는데, 그 중의 탑 텐을 뽑아 규장각에 배속시키고 자비대령화원이라는 초계문신이 되어 정조(正祖)의 의도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던 규장각 소속의 자비대령화원은 문인화 외에 속화를 추가로 그리게 한다.
- 정작 자비대령화원 명단에 김홍도가 없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이는 번거로운 자비대령화원 시험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만의 작품 활동에 매진하라는 정조(正祖)의 배려였을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답으로 김홍도는 특급대우를 받은 국왕 직속 사진기자인 셈
※ 초계문신(抄啓文臣) : 정조 이후 규장각에 소속되어 별도의 교육 및 연구과정을 받음
〇 민생보고서, 김홍도의 풍속화 <고연희, 서울대규장각연구원 / 미술사학자>
- 서당(書堂) : 의복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상으로 평민과 양반 자제들이 함께 공부하는 서당의 모습은 당시 경제의 발달로 여유있는 평민들이 늘어나면서 양반 자제들과 함께 공부하는 서당의 모습
- 씨름 : 22명의 각기 다른 표정의 해학적인 모습은 사회 각층의 발랄한 정서를 표현하는 동시에 국왕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물하기 위한 화가의 배려
- 담배썰기, 자리짜기 & 장터길 : 담배·인삼·자리 등은 고수익 작물을 경작하고 돗자리와 같은 특산물을 만드는 모습은 당시의 상업적 농업경제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당시 유통경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하니, 이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열하일기-일신수필> 장터 길에서는 그런 모습까지 생생하게 묘사
- 백성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고받은 정조(正祖) 이외의 왕이 있었나?
자주 있는 일로 백성들의 땀의 가치를 아는 것이 위대한 군주의 기본, 특히 세종(世宗)과 정조(正祖)가 민생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라는 요청 “우리나라 풍속을 채집하여 일하는 모습을 그려··· 상하귀천이 모두 농사일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니, 너희들 집현전에서는 널리·· 일을 채집하여 그 실상을 그려라.” <세종실록 1433년 8월 13일>
- 풍속화가로만 알려진 김홍도 그러나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산수·신선·불화·꽃과 과일·새와 벌레·물고기·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에 해당하여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강세황의 단원기>
〇 천재화가 김홍도의 비사(秘史)?
- 일본의 <도슈사이 샤라쿠>가 조선의 김홍도였다?
실제로 샤라쿠의 화풍은 김홍도 화풍과 상당히 유사하고,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샤라쿠 작품의 열렬한 수집가··· 아울러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네덜란드 화가는 일본 우키요에(에도시대 회화 양식)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와 필치의 작품세계를 확립시키고, 샤라쿠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죽을 때까지 일본을 그리워했다는 기록
※ 도슈라이 샤라쿠 : 1794년 5월부터 이듬 해 3월까지 약 10개월간 140여 점의 작품을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정체불명의 화가
- 안타깝게도 고증(考證)하기가 어려운 것이 1794년 당시 김홍도는 연풍(괴산)현감이었고, 일본을 왕래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〇 사또가 된 화가 김홍도
- 1781년 정조(正祖)의 어전작업에 참여하여 1785년 안기찰방 제수(안동) 받고, 1791년 세 번 째 어진작업에 참여한 공로로 1792년 연풍현감에 재임하게 된다.
- 화원으로 현감(縣監)까지 오른 김홍도에게는 영광의 직책인 셈, 당시는 계속된 가뭄으로 백성의 삶이 고달팠던 시기로 마을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던 듯 “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 관청의 우두머리 된 몸으로 중매나 하고 구슬아치들에게 위압적으로 호령하여···” &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온 읍의 군역에 메인 장정을 징발하여··· 이 같이 백성에게 포악한 무리는 중하게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 하는 상소문이 올라온다. <1795년 1월 7일 경인 일성록>
- 1795년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직후인 1796년 걸작(傑作) ‘도담삼봉’을 그리는 김홍도, 저런 걸작을 그리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시간은 부족할 수밖에···
- 중매 · 사냥은 현감이 해도 되는 일이 아닌지?
결국 김홍도가 탄핵을 받게 되는 이유는 충청도 지역을 조사하러 나온 관리에 의해서 걸리게 되는데, 중인 출신이었던 김홍도를 견제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소위 양반 주류가 되지 않았던 인물이 목민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못마땅한 세력들이 김홍도를 견제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3년간의 짧은 현감 생활을 불명예로 마감을 하게 된다
- 징계 없이 파직(罷職)에만 그쳤나?
표면으로는 의금부에 잡아오라고 명하나 “의금부에서 미처 잡아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하라는 단자교로 김홍도 등을 놓아 주었다” <1795년 1월 18일 일성록> 그래서 지방 관리에서 다시 화원으로 복귀한 김홍도, 이 시기가 1795년 정조(正祖)의 화성행차 시점
〇 정조(正祖)의 가장 화려한 날을 그린 단원 김홍도
- 1795년 정조(正祖) 즉위 20년,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동갑으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기념일, 사도세자를 모신 현륭원을 향한 대대적인 행차로 행행(行幸)을 하게 되는데, 조선 역사상 가장 화려한 8일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화성행차는 정조(正祖)의 가장 의미 있는 날로 김홍도는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
※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 을묘년(1795)윤 2. 9~16까지 화성에서 벌인 정조(正祖)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로 8권 1270여 쪽에 걸쳐 김홍도와 그 제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추정
- 의궤(儀軌)는 김홍도 혼자만의 작품?
의궤중의 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행사를 기획한 사람은 정조(正祖), 실행 총괄책임자는 채제공, 그림의 기록은 김홍도와 그 제자들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의 기록을 맡은 것
- 정조(正祖)에게 1795년 이란?
① 부모님의 회갑 ② 훗날 천도까지 꿈꿨던 화성건설 박차 ③ 사도세자 복권 추진, 사도세자의 복권과 왕권 강화의 복합적 목적으로 진행된 행사
- 사실 의궤는 인쇄물이기 때문에 흑백으로 단순작업을 한 측면이 있고, 김홍도가 제작한 의궤를 바탕으로 김득신 등의 화원들이 제작한 8폭의 병풍 <수원능행도>에는 1,400여 명과 말 800필 등장.
-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실제 규모는 6,000여명과 말 1,400여 필이 등장하고 왕의 얼굴은 어진에만 그릴 수 있어 의궤에는 빈 말로 표현, 이전의 의궤는 도식화된 분위기였다면 본 의궤는 입체적인 느낌이 많이 살아있고, 또 하나는 구체성으로 잔치에 쓰인 음식·무희들의 의상과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
- 많은 이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정조(正祖)는 이를 판화로 제작해 200여 개의 의궤를 완성하는데 즉위 20년 정조(正祖)와 김홍도 모두 절정의 시기였을 듯, 그로부터 5년 후인 1800년 6월 28일, 정조(正祖)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는데 ① 다산 정약용 유배 ② 서자 출신 관료 박제가의 실세(失勢) ③ 후원자를 잃은 김홍도, 그래서 정조(正祖)의 사망이 김홍도 개인에게도 상당히 충격적 이었을 듯
- 순조(純祖) 4년(1804) 김홍도는 60세에 처음으로 정조(正祖)가 면제해준 자비대령화원 시험까지 치러야 했고, 군주이자 오랜 벗을 잃고 말년을 보내야 했던 김홍도, 시대를 그려낸 조선 최고의 화원이었으나 역사는 그의 죽음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〇 후원자 정조(正祖)를 잃은 김홍도
- 정조(正祖)에게 받았던 특혜가 사라진 상황으로 60세에 치른 자비대령화원 시험은 은퇴한 석좌교수가 대학 시험을 보는 격
- 정조(正祖) 승하 1년 전, 채제공 등 핵심적인 인물들과 전국에서 12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는데, 이때 김홍도도 전염병에 감염되고 나이도 많아지면서 건강도 잃고 강력한 후원자까지 잃음으로써 김홍도의 예술혼도 위축됐을 것
-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김홍도 “매화도를 그려달라는 부탁으로 3천 냥(약 1,500만원)을 받은 김홍도는 2천 냥을 주고 매화목을 사게 된다.” 49세에 얻은 늦둥이 외아들의 학비도 낼 수 없었던 형편, 말년에 그린 ‘추성부도’는 당시 김홍도의 심정을 잘 표현한 작품
※ 추성부도(秋聲賦圖) : 구양수(宋代의 정치가 겸 문인)가 지은 시 ‘추성부’를 1805년 김홍도가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
- 추성부도에 새긴 시, <가을 소리> “마땅히 홍안(紅顔)이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 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구양수의 추성부 中>
- 그림 속 인물은 구양수를 그렸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김홍도 자신일 수도··· 후원자 정조(正祖)를 잃은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하고, 최고의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 없어 작품이 완전히 끊긴 점을 볼 때 1806년쯤으로···
- 정조(正祖)시대를 흔히 개혁의 시대라고 하는데, 개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민생파악으로 천재화가 김홍도를 통해 민생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혁을 시도했던 정조(正祖), 인재를 알아보는 정조(正祖)의 안목덕분에 오늘날 200년 전(前) 조선의 생활상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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