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〇 다산(茶山) 정약용
- 수원 화성과 배다리, 나아가 거중기까지 역사에 길이 남을 유산을 남긴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그의 뒤에는 숨겨진 스승, 정조(正祖)가 있었다! 정약용을 조선의 다빈치로 성장시킨 개혁 군주 정조(正祖),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 명쾌한 수사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어진 목민관으로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배다리·화성설계 등 과학적 재능까지도 겸비한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정조(正祖)를 만나다.
- 퀴즈로 알아보는 정약용
정약용은 7살에 원근법(遠近法)을 표현한 한시를 지었다.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의 지세(地勢)가 다른 탓이지”
※ 원근법 : 사물의 절대적인 크기에 비례하고 사물과 관찰자의 거리에 반비례.
- 정약용의 아명은 ‘귀농(歸農)’ 정약용 출생 한 달 전에 사도세자 사망하고, 당시 하급관리였던 남인 정약용의 아버지는 사도세자 사후에 화(禍)를 피하기 위해 귀농하여 그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고조부·증조부·조부 3대 째 벼슬이 끊긴 정약용 집안은 아버지 대(代)에 하급관리로 등용되지만 그 마저도 좌절된 것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다산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 해방 이후 정약용 주제 연구 논문은 1,000편 이상으로 남북한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드문 인물 중의 하나
〇 역사적 배경
- 1762년 윤5월 13일 영조(英祖)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9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세력이 득세하면서 사도세자를 옹호하던 남인은 실권(失權)을 하게 된다.
- 벼슬길이 막힌 남인, 정약용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정조(正祖)의 즉위로 관직 진출이 가능해진 남인,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한 정조(正祖)는 당쟁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탕평(蕩平)을 주장하면서 정계에서 소외됐던 남인세력을 대거 등용하게 되고, 이때 정약용도 관직에 진출하게 되는 것으로 실제로 정약용의 저작들을 보면 정조(正祖)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것
〇 정조(正祖)와 정약용의 만남
- 1783년 2월 세자책봉을 기념해 생원진사과 시험이 열리고 전국의 수많은 유생이 이 시험에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22살 이었던 정약용의 우수한 답안은 정조(正祖)의 눈에 띄게 되고, 정조(正祖)는 합격자들을 위해 사은잔치를 베풀었는데, 장차 조선의 미래를 만들어갈 왕과 신하의 첫 만남이다.
※ 생원진사과 :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 과거시험으로 합격자에겐 성균관 입학자격 부여 & 대과 : 생원진사과 합격 후 관리등용을 위해 보는 시험으로 문과와 무과로 나뉨
- 정약용의 성균관 유생 시절?
모두 대과 합격이 목표로 정약용도 대과를 준비하던 시기, 정조(正祖)가 자주 성균관을 방문하여 토론을 벌이는데, 이기론의 퇴계와 율곡에 대한 견해를 묻자 대부분의 유생들은 퇴계의 학설을 지지하지만, 의외로 정약용은 율곡의 학설이 설득력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유를 설명하게 되고, 이에 정약용의 답을 공정하고 소신 있는 발언이라고 칭찬한 정조(正祖)
- 이렇게 소신 있게 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정약용은 남인계열로 이기론의 퇴계 이황의 사상은 주로 남인이 계승하고, 율곡 이이의 사상은 주로 서인(노론)이 계승하여 남인인 정약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퇴계 이황의 사상을 지지할 줄 알았는데 율곡 이이의 사상을 지지한 것으로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붕당을 뛰어넘는 유연한 정약용의 사고는 탕평을 주장하는 정조(正祖)에게는 최적의 인재였던 것
※ <이기론>의 퇴계 & 율곡
퇴계 이황 : 만물 생성의 근원인 理를 중시하고 주로 남인이 계승
율곡 이이 : 만물 구성의 요소인 氣를 중시하고 주로 서인(노론)이 계승
〇 정조(正祖), 정약용을 인재로 키우다.
- 정조(正祖)의 눈에 든 정약용, 출세가도를 달리나?
그런데 그렇질 못하고 성균관에서 6년 동안이나 수학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정조(正祖)의 깊은 배려가 있었던 것, 상대적으로 남인이 수세에 있는 입장에서 서서히 키우게 되는데 급속도로 승진하다보면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을 염려했던 것, 사실 25세에 대과(大科)에 응시 “네가 지은 것이 사실 문과 장원(壯元)에 못지않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선발하지 않는다.” <사담연보>
- 정치적인 고려와 학문적 성장 등 모든 상황을 고려해 정약용을 관료로 성장시킨 정조(正祖), 결국은 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소속 초계문신으로 발탁, <초계문신(抄啓文臣)>은 규장각에 소속돼 37세 이하의 문신들 중 특출한 인물을 선정하여 재교육을 시키면서 정조(正祖)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으로 성장시키는데, 김조순(순조 장인) 정약전(정약용 형) 서유구(임원경제지 저자) 등 당대 최고의 인물 모두는 초계문신 출신
- 초계문신은 몇 살까지 교육받았나?
37세 이하 문신 중에 발탁하여 40세 까지 교육, 본직을 면해주고 연구에 매진하게 하고, 대신 매월 친림시험(親臨試驗)이라는 왕이 직접 주관하는 시험을 치름
- 정약용을 포함해 많은 학자들을 키워낸 규장각, 정조(正祖)는 <君師(임금이며 스승)>라고 스스로 학자군주라고 자부하며 실제로 스승 역할을 했던 것이고, 정약용도 이 방식을 따라 유배생활 중 강진에서 제자를 길러 정조(正祖)의 방식을 따라 책을 편찬하여 정약용의 제자들은 정조학파를 계승한 다산학파로 등장
- 1791년 정조(正祖)는 모시강의(毛詩講義)라는 시경 800여 조항에 대한 과제를 내고 정약용의 답안지를 보고 “백가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평소에 쌓아 둔 학식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랴?” 하고 극찬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 호학군주(好學君主)에 박학신하(博學臣下), 사실 정약용도 이 칭찬에 고무되어 나중에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집> 맨 앞에 정조(正祖)의 비평을 배치하여 정조(正祖)가 인정한 학자라는 자부심으로 문집을 발간한다.
〇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 1794년 정조(正祖)는 수원에 새로운 도시 화성을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면서 화성을 개혁의 근거지로 삼으려 하고, 화성의 성곽을 설계한 정약용은 공사를 위한 기계까지 고안하여 10년 계획공사를 거중기(擧重機)의 제작으로 3년으로 단축하고 정조(正祖)에게 정약용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데 가장 든든한 신하이자 동지였다.
- 드라마 속 정조(正祖)와 정약용의 관계, 역사에서는?
드라마에서는 성균관에서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정약용의 성균관 생활은 긴 것이 아니었고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3개월간 근무 후 짧은 기간 동부승지(왕 비서)로 재직했던 정약용은 공식적으로 왕을 측근에서 보필한 기간은 짧지만, 당시 정조(正祖)가 정약용을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 “1790년 4월에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해 겨울에 수원 내성을 쌓는데 임금께서 명하시길, 성곽제도에 대해 조목별로 올려 바치게 하라” <자찬묘지명> 정약용을 대신할 믿을만한 신하가 정조(正祖)에게는 없었던 듯···
〇 조선의 다빈치, 정약용
- 정약용을 조선의 다빈치라 부르는 것도 화성 설계 · 거중기 제작 등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재능까지 발휘했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
- 정조(正祖) 행차 때 배다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정조(正祖) 이전의 배다리는 대나무 혹은 칡 끈으로만 배를 연결했으나 정조 행차 당시 배다리는 36척의 배를 가로목과 세로목을 연결 후 칡 끈으로 고정하여 판자를 덧씌우고 흙과 잔디로 포장하여 난간을 둘러 안전을 확보하고 견고한 다리를 완성, 정약용이 주도해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배다리
- 하지만 <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 다른 기록에는 정약용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관료 생활 초기에 배다리 설계에 참여한 정약용은 설계에 실무적으로 참여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하진 않았을 것으로 추정, 정약용 자신도 당시의 상황을 예상했던 것인지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기유년 배다리 공사에 정약용이 그 규정을 올려 작업이 이루어졌으니···” <정약용 자찬묘지명>에 기록을 남긴다.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은 자신의 덕과 공로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지은 묘지명으로 류성룡의 <징비록>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등, 역사는 기록의 싸움
- 운명의 1789년 ① 정약용 관리 임명 ② 사도세자의 묘소 수원으로 이전 ③ 채제공 등 사도세자 지지 남인 세력 중용 ④ 화성 건설 시작
- 정조(正祖)는 사도세자 복권사업의 거점으로 화성 건설을 하면서 단원 김홍도를 통해 조선의 과거를 정리하고, 정약용과 함께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면서 정조(正祖)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남인이 서서히 주요 세력으로 부상
- 당시 기기도설을 구해 정약용에게 성곽건설용 기계를 고안하게 한 정조(正祖), 이를 연구하여 정약용은 <기중가도설>을 정조(正祖)에게 바친다.
※ 기기도설(奇器圖設) : 스위스 선교사 테렌츠가 서양기술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한 책 & 기중가도설(起重架圖設) : 정약용이 기기도설 등을 참고해 지은 기계설계도와 해설
〇 정약용의 발명품 거중기
- 거중기의 실제 크기는?
거중기 기둥이 되는 부분의 길이가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약 14척으로 기록되어있어 기울어진 것을 감안하면 약 4m의 높이, 모형은 간략하게 제작이 된 것이고 실제 거중기는 모형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
- 거중기가 화성 건설에 미친 영향?
당시에는 획기적인 기계였으나 화성건축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거중기 이유는 ① 바퀴가 없어 이동성이 떨어짐 ② 숙련된 장인 부족 등으로 화성성역의궤에 나왔듯이 화성건축을 위해 제작된 거중기는 단 1대로 새로운 기술을 시험하는 의미가 더 컷을 것, 아울러 <화성성역의궤>에는 거중기 전도(全圖)와 분도(分圖)를 그린 것으로 보아 거중기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
-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의 독창성?
모방을 넘어서 조선의 여건에 맞는 거중기를 창안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정조(正祖)가 내려준 기기도설에는 쇠와 구리로 만든 나사를 이용해서 도르래를 만드는 기술을 사용했는데,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제작이 불가능하여 기기도설의 거중기와 완전히 다른 조선식 거중기를 고안한 것
- 화성의 공사예상기간은 10년이었지만 2년 9개월로 단축하여 공사비 4만 냥을 절감, 이는 정약용이 고안한 기구들이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 기간은 휴식시간까지 포함한 기간으로 공사기간을 단축하여 엄청난 인력·비용을 절감한 것, 이는 정조(正祖)에게도 많은 도움으로 화성 건설을 반대하는 세력의 비난에 반박할 명분이 된 것
〇 암행어사 정약용
- 1794년 10월 정조(正祖)는 정약용을 암행어사에 임명하는데, 당시는 흉년이 심해 화성 건설을 중단하고 백성에 대한 구휼대책을 시행하기 위한 것 암행어사는 수령의 감찰을 위해 한 번에 15명을 파견하는데, 이는 암행어사 감찰의 보안유지를 위해여 단시간에 넓은 지역을 감찰하기 위한 것이고 수령들의 비리를 낱낱이 적발한 정약용,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으며 혜경궁 홍씨의 의관(醫官)출신 강명길과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지관(地官) 김양직 등 왕의 측근 처벌까지 주장한다.
- 왕의 측근 처벌에 대한 정조(正祖)의 선택은?
엄중 조사하여 처벌을 지시한 정조(正祖), 왕의 최측근을 고발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로 정조(正祖)를 믿고 과감하게 상소를 올린 정약용은 경기도 북부 지역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참상을 시(詩)로 남기기도 “큰 아이 다섯 살에 기병(起兵)으로 등록되고, 작은 애도 세 살에 군적(軍籍)에 올라있어, 두 아들 세공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어서 죽길 원할 판에 옷이 다 무엇이랴” <다산시문집 제2권 중>
- 위민군주(爲民君主) 영·정조 시대에도 의외의 폐단은 존재, 중요한 것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정조(正祖)는 15명의 암행어사 동시 파견한 것도 폐단 해결을 위한 의지의 표현인 것
- 정약용이 핵심 요직에 오르지 못한 이유?
40세에 정3품 당상관(3급)까지 승진하고 정승이나 판서는 되지 못하나, 이는 정조(正祖)의 승하(昇遐)와 무관하지 않은 것
〇 정약용과 천주교
- 정조(正祖)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정약용, 하지만 그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일가친척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정약용의 집안, 심각한 정치문제로 대두된 천주교는 정약용에게 비난의 화살로 날아온다.
- 1799년 5월 대사간에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 천주교도라는 상소가 올라오고 이 사실을 모른 채 입궐한 정약용은 정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약용을 보호하려 한 정조(正祖),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완전히 조정에서 발을 끊는다.
- 정약용이 나라에서 금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유?
천주교를 이전에는 서학이라고 해서 서양의 선진학문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서학을 받아들이는데, 이들은 주로 남인으로 관직 진출이 어려워 성리학의 대안으로 서학에 관심을 가진 것이고 점차 종교적인 면에 경도되면서 남인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
- 정약용은 젊은 시절의 지적 호기심으로 받아들인 천주교가 훗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줄 몰랐을 듯··· 단지 종교문제만 가지고 정약용을 그렇게 비난을 했을까? 정약용을 향한 반대세력의 비방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닐까? 아울러 정조(正祖)의 신임을 한 몸에 받다보니 정적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 당연히 정치적 이유가 있는 것이 당시 노론 측에는 천주교 신자가 별로 없었고, 천주교 신자는 주로 남인 출신으로 정조(正祖)의 개혁정치를 지지하는 남인 공격의 빌미로 천주교를 이용한 것, 게다가 남인도 신서파(천주교 찬성)와 공서파(천주교 반대)로 나뉜 상태로 남인 세력 내부에도 정적이 있는 상황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다.” <천주교 배척론자 남인 홍낙안>
- 정조(正祖)의 입장에서도 사도세자 복권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남인세력들이었지만 계속적인 천주교 사건으로 중용하기 어려워지고, 게다가 1799년 1월에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사망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집중적인 공격을 받다보니 정치적 한계를 느끼고 벼슬에서 물러 난 정약용
- 당시 정약용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자신을 총애하는 정조(正祖)가 갖는 정치적 부담을 생각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를 포기하지 않고 정약용을 중용하려 한 정조(正祖)는 1800년 6월 12일 책 편찬을 위해 다시 정약용을 부른다. “주자소를 새로 개수하여 벽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그믐께라야 경연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 안타까운 것은 6월 12일 정약용 재 입궐 권유의 내각서리를 보내고 다음 날인 13일 정조(正祖)는 발병하여 28일 승하하게 되는데, 정약용 입궐 예정일은 29일로 정약용 입궐 하루 전에 정조(正祖)가 승하한 것
〇 정조(正祖) 없는 하늘 아래
- 정조(正祖) 승하 이후 정약용의 삶?
정조(正祖) 승하 후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못한 정약용, 정조(正祖) 승하한 날 정약용의 심경 “군신(君臣)의 정의가 그 날 저녁에 영원히 끊긴 것이다. 매양 이 일에 생각이 미칠 적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금할 수 없었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 수원으로 가는 정조(正祖)의 어가를 바라본 정약용 “···임금님 넋은 어느 틈에 화성으로 가셨는가. 천 줄기 흐르는 눈물은 옷깃 흠뻑 적시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 슬픔을 적다>
- 글자 하나하나에 정조(正祖)를 떠올린 정약용, 수많은 저작을 남긴 정약용은 죽어서 저승에 간다면 정조(正祖)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을 것이고, 살아생전에 정조(正祖) 같은 임금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며 저작 활동을 했을 것
- 정조(正祖)를 만나 관료로 성장한 정약용, 정약용의 생애에서 정조(正祖)와 함께한 18년이 가장 빛난 시기, 만능의 능력으로 학문·과학기술·암행어사 등 각 분야의 뛰어난 인물들이 정조(正祖)의 죽음으로 한꺼번에 설자리를 잃는 것은 19세기의 역사적 아픔을 예고하는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
- “정조(正祖)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正祖)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正祖)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위당 정인보> 그 만큼 두 사람이 받은 영향이 컸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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