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
〇 박지원 과거시험에서 백지 답안을 제출하다
-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이자 북학사상의 리더, 연암 박지원! 18세기 조선에 분 새로운 변혁의 바람! 그 중심을 이끌었던 백탑파의 정체는? 정조(正祖) 시대 일어난 문체반정, 열하일기는 왜 금서가 되었나? 노론 명문가 출신에 능력까지 갖추었지만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박지원! 조선시대를 넘어 오늘날 그가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 1770년(영조 46년) 나라의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인 초시(初試)가 열리고, 엄숙해야 할 자리이지만 과거시험장은 만연한 부정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그 중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 이가 있었으니 34살의 청년 박지원 “영조(英祖)는 답안을 보고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며 들으셨다. 그리고 크게 격려 하였다” <과정록>
- 그 후 회시(會試)가 열리고 모두들 열심히 답을 적는데, 박지원은 아무것도 적지 않고 결국 백지(白紙)로 답안을 제출하는데, 입신양명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과거에서 박지원은 왜 백지를 낸 것일까?
- 글 읽는 선비에게 관직을 얻고 이름을 날릴 유일한 통로인 과거시험, 한번이 아닌 여러 차례인 것으로 보아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난장(亂場)판이라 불렀던 조선 후기의 과거시험장, 이를 통해 출세할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 하지만 박지원 같은 경우에는 뛰어난 실력에 영조(英祖)의 관심을 받고 있던 터라서 당연한 합격을 예상하고 주변 정치가들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획책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만연했던 당쟁(黨爭)과 편 가르기에 대한 반감으로 과거합격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 정약용은 중농학파로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중시 VS 박지원은 중상학파로 상공업 발달을 중시하는 양대 축을 이루는 인물, 조선 말엽 한문학의 대가였던 창강(滄江) 김택영(1850~1927)은 필사본으로만 전해오던 <열하일기>를 1901년 최초로 간행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조선 최고의 세 가지 ① 퇴계와 율곡의 도학(道學) ②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 ③ 연암 박지원의 문장
- 출세가 보장된 당대의 반남 박씨에 노론 명문가 출신의 실력파인 박지원은 가풍대로 청빈한 선비의 삶을 선택 한 것, 34세의 백지 답안 제출 후 과거시험을 완전히 포기 “그 후에 나는 속리산·가야산·천마산·묘향산 등 국내 명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연암집 발승암기>
- 박지원의 외모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고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서 말할 때도 수십 보 떨어진 담장 밖에까지 들렸다” <과정록> 성격도 강해 사람을 대할 때 호불호가 명확했던 박지원, 양반이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렸으나 “마음에 마땅하지 않은 사람과는··· 종일 서로 마주하고 앉았더라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과정록>
- 다정다감한 면모도 있었는데, 직접 담근 고추장과 함께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 박지원은 아들의 답장이 없자 “왜 한 번도 좋은지 어떤지 말이 없는 게냐?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계속 보낼지 말지 결정 하겠다” <연암 선생 서간첩>
- 백지답안 소식에 가족의 반응은?
재미있는 것은 이보천이라는 박지원의 장인, 이 분도 평생 학자로 살았던 분인데, 오히려 잘했다고 하기도··· 선비가 혼탁한 세상에 함부로 몸을 섞을 수는 없는 일로 어지러운 현실에 반감이 있었던 것으로 20살부터 당시 돌아가는 세상의 일 등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양반전 · 예덕 선생전 등 9편을 집필하는데, 과거를 포기한 대가로 얻은 베스트셀러 작가
〇 베스트셀러 작가 박지원
- <호질>은 어른을 위한 동화로 고고(孤高)한 척하는 북곽 선생이 사실은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고 이권만 챙겨 똥보다 더럽다고 비판하면서 호질을 통해 조선 후기의 양반사회를 비판하면서 선비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잊고 위선에 가득 찼던 당시 양반사회를 풍자한 것.
- 연암 작품의 특징 ① 양반전·허생전·호질 등에 나타난 양반에 대한 일관된 주제의식 ② 박지원 특유의 언어유희로 <개 값이 2냥이면 양반은 1냥 반으로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
- 권력층 양반이 평민의 눈으로 사회를 보기란 쉽지 않은 것으로 장터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지낸 박지원, 동료 양반들 눈에는 세상을 등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생생한 삶의 현장과 마주했기 때문에 진짜 세상을 만날 수 있었던 것
- 이전에는 없었던 박지원 문체의 특징 ① 자세한 묘사 ② 적절한 비유,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옆에서 보는 것보다 더 상상력을 가지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연암의 문체인데, <공작관 문고> 서문의 기록에 코고는 장면이 상세히 묘사 “코고는 소리가 우렁차서 (어떤 때는) 토하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휘파람 부는 것 같고 (어떤 때는) 탄식하는 것 같고 ~ 우는 것 같고 ~ 불을 부는 것 같고 ~ 솥 안의 물이 끓는 것 같고 ~ 빈 수레가 덜컹하는 것 같고, 숨을 들이 쉴 때는 드르렁 하며 톱질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쉴 때는 마치 새끼돼지가 씨근대는 소리가 났다” <연암집, 코골이 촌부>
〇 박지원 실학의 토대를 닦다
- 과거시험 거부만큼 박지원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인 <백탑파 결성>, 당시 서울의 랜드마크인 백탑(원각사지 10층 석탑)에서 자주 만난 친구들 박제가·유득공은 서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은 이들을 끌어안고, 이덕무·유언호등과 같이 어울리며 백탑파를 결성하고 북학사상을 주장 “청나라를 오랑캐로만 보지 말고 배울 것은 배우자” 당시만 해도 북벌(北伐)의 대상이었던 청(淸)에 대한 발상의 전환인 셈
- 백답파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 신혼 첫날부터 박지원의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신 새신랑 박제가, 박지원은 우정을 소중히 여긴 듯 “집기가 깨지면 새것으로 다시 바꾸고 의복이 찢어지면 꿰매면 되고 아내를 잃으면 두 번 세 번 장가를 가면 되지만 지기(친구)를 잃은 슬픔은 그렇지 않다.” <연암집 엄화계수일>
- 이희천이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영조(英祖) 대에 불온서적을 소유한 이유로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슬픔에 잠겨 10여 년간 두문불출하고 폐인처럼 살기도··· 힘든 시절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박지원, 그에게는 친구는 친구 이상의 같은 뜻을 나눈 동지의 의미도 있었을 것
- 정약용과 박지원은 같은 시대의 인물, 교류가 있었는지?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고, 박지원이 정약용보다 25살 연상이며 정약용의 긴 유배생활로 두 사람이 친분을 쌓을 기회는 없었을 듯··· 하지만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었을 것
-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로 성리학과 실학을 정반대의 학문으로 생각하지만, 박지원과 정약용 모두 성리학자로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기본 이론에만 파묻히지 않고 좀 더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자는 이들을 실학자로 분류하는 것
〇 18세기, 세계는 그 때 <덕성여대 총장, 이원복 교수>
- 18세기는 우리만의 특징이 아닌 세계적으로 계몽사상의 시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세상의 법칙성을 확인하고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에 확신, 특히 후반기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의 시기로 왕 중심의 봉건사회에서 시민중심사회로 옮겨가는 과정
※ 계몽사상 : 17세기 후반,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의 힘을 믿고 사회를 개혁하려했던 사상
-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뉴커먼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정신적인 변화와 경제적인 변화가 맞물리면서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것.
- 세계 속 박지원의 평가는?
과거와 달리 새로운 의식과 사고를 만들어 낸 세익스피어·괴테 등과 같은 사람들을 문호(文豪)라고 한다면, 박지원도 분명 문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유교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던 사상체계에서 실학과 실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을 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서양의 계몽주의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혁신적인 의식구조를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
- 세계사를 만화로 그리게 된 계기?
만화 세계사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저자이며 덕성여대 총장인 이원복 교수, 1975년 독일 유학길에 오르는데, 당시 우리의 역사는 일제강점 · 타국에 의해 해방이 되고 분단 · 전쟁 · 독재··· 등 모두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로 암울했던 역사만 배우다 독일에 가보니 나치 유대인 수용소마저 보존역사로 인정하는 것을 보고 ‘역사는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늘 이어져 오는 것이고 또 내일로 이어지는 것’ 이라는 문화적 쇼크를 받고 만화를 통해 역사를 풀어 보려는 결심으로 저술
〇 조선판 베스트셀러, 열하일기의 탄생
- 1780년(정조4년) 박지원은 44세의 나이로 조선사신단을 따라 자제군관의 신분으로 청나라 여행길에 오르는데, 압록강을 건너 4천여 리 길의 열하, 박지원은 그곳에서 지금까지 겪지 못한 진귀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내 평생 괴이한 구경을 열하에 있을 때만 한 것이 없으니,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많고 문자로서는 능히 형용할 수 없어서 모두 빼놓고 기록하지 못하니 가히 한스러운 일이다” & “수많은 집은 높이 솟아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아 올렸고 마을마다 가마가 있어 벽돌을 굽더군···” <열하일기 산장잡기 만국진공기후지>
※ 자제군관 :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호위하기 위해 아들이나 친척 등으로 따라가는 사람
- 청나라의 발전된 생활상에 놀란 박지원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인과 필담을 주고받아 기록하며 정리한 후 26권으로 엮은 조선판 베스트셀러 <열하일기>가 탄생한다.
- 이 당시에도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로 대부분의 기록은 청나라는 우리보다 못하고 배울게 없으며, 곧 무너진다는 관점에서 쓴 기록들이 대부분으로 심지어 채제공이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소감을 수록한 <함인록(含忍錄)>은 품을 함 · 참을 인으로 ‘원한을 삼키고 분통을 참는다는 뜻’으로 아직까지도 청(淸)에 대한 적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
- 열하(熱河)의 위치?
열하는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북쪽에 위치, 조선에서 열하까지는 왕복 5개월의 긴 여정으로 원래의 목적지는 북경이었으나, 청 황제의 여름 피서로 열하까지 가게 된 것
- 막상 가보니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발전된 청나라 모습에 놀란 박지원, 청(淸) 국경의 첫 관문인 ‘책문’을 들어가는데, 청(淸)의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발전상에 놀라 처음에는 겁을 먹고 돌아가고 싶다 했다고···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실감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는 것, 오랑캐라고 하찮게 여기던 청나라였기에 충격이 더 컸을 것
-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기록하려고 애쓴 듯 “무시했던 나라가 우리보다 잘 사는 이유를 찾아야···” 가기 전까지만 해도 비교의 대상이 없어서 조선의 가난을 몰랐던 것, 청나라의 발전상을 보고서 비로소 알게 된 조선의 현실, 우리도 뭔가 바꿔야한다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박지원의 깨달음에 의미가 있는 것
- 사신단은 개인 활동이 가능한지?
당시 외교관례상 사신의 개인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고 또한 정보는 얻어야겠기에 서반(序班)을 통해 정보를 거래하게 되는데, 서반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가짜정보를 제공하여 실상과 맞지 않는 보고를 올리기도 하여 조선에서는 청(淸)의 실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박지원은 예리하게 관찰하고 이래서는 청(淸)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생각에서 고육지책으로 발품과 필담(筆談)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는 것 “왼쪽에는 벼루를 오른쪽에는 거울·붓 두 자루·먹 한 장·조그만 공책 네 권···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근심할 것 없었다.” <열하일기, 도강록>
※ 서반(序班) : 중국 명·청 때 황제의 칙명을 전했던 관리로 조선의 사신들은 이들을 통해 중국 물정을 탐문
〇 고전문학의 진수, <열하일기> -길진숙, 남산 강학원 연구원-
- 당시 열하일기의 인기는 어느 정도?
원고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미완성 초고가 조선의 선비들 사이에서 돌아 필사본이 9종이 넘고 국내외에 전해지는 이본이 30여 종이 넘을 정도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
- 열하일기의 매력은?
너무 많아서 모두를 말할 수는 없지만 ① 파격적인 구성, 기존의 연행록은 일기 형식으로 구성했으나 열하일기는 완전히 다른 논설·관찰기·인물·야담·단편소설 등 주제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선택하여 종횡으로 넘나들며 대상에 따라 저마다 다른 형식으로 글을 구성하고 있는 것 ② 유쾌(愉快)하다 ③ 이치(理致)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청나라의 장관은 필시 이것들에 있다. 이것은 대개 천하의 버리는 물건이지만 저절로 좋은 무늬가 이루어지고 땅에 깔아서 비가 올 때 진창 되는 걸 막고, 민가에서 황금처럼 아끼니 천하의 도가 여기에 있다···” <열하일기> 기와조각과 말똥을 묘사한 것
- 말의 배설물을 모아 거름으로 사용하고, 기와조각으로 담을 장식하면서 길에 깔아 진창을 방지하면서, 하찮은 물건도 버리지 않고 유용하게 사용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든 청나라에 감탄한 것으로 연암이 던진 시대의 화두는 <기와조각과 말똥>에 있다고 무릎을 친 것
- 오늘 우리에게 열하일기가 던지는 메시지?
우리는 여행이라는 것을 관광지에서 즐기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만, 박지원은 청(淸)을 여행하면서 조선을 구할 방법을 깨달았던 것처럼 열하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앞으로 여행을 갈 때 낯선 길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고 또 나를 깨닫는 시간이 될 수 있는 여행을 하시길···
〇 연암 박지원, 열하에서 길을 찾다
- 연암은 그간 말로만 주장하던 북벌(北伐), 청(淸)을 이기려면 청(淸)보다 우세하여 그들을 압도하고서 오랑캐라든지 · 볼 것이 없다든지 해야 이치에 맞는 것이지 청(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로만 북벌(北伐)을 떠벌이지 말라는 경종을 울린 것 “청나라의 법을 모조리 배워 조선 백성들을 이롭게 한 후···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열하일기, 일신수필>
- 박지원이 청(淸)에서 주목한 또 하나 ‘수레’
운송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수레에서 찾은 것, 기존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길이 없는데 수레를 어떻게 쓰나? 하는 것이었지만, 박지원은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고, 예뻐야 사랑받는 다가 아니라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바로 박지원의 실학사상
- 18세기 말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는 자유롭고 새로운 소설체 문집이 유행하게 되고 인기를 끈 청나라 서적과 소설체 문장, 정조(正祖)는 사회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문풍(文風)이 날로 비속해지는 원인을 문체에 있다고 보고 급기야 선비들 사이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를 전면 금지시킨다. “근래 선비들이 추향이 점점 저하되어 문풍도 날로 비속해지고···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버려야···” <정조실록 1792년 10월 19일>
〇 박지원,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중심에 서다
- 문체 때문에 반성문을 요구한 정조(正祖)?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문체를 금한 정조(正祖), 소위 <문체반정>을 선언하고 불순한 문체의 근원으로 지목된 <열하일기>, 박지원·남공철·이옥·심상규 등 많은 문신이 문체반정의 대상자가 되어 자성문을 쓰도록 한다.
- <문체반정>은 정조(正祖)가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회복하자는 주장으로 <조선의 3대 반정>은 인조반정·중종반정·문체반정으로 반정은 잘못된 것을 바르게 되돌린다는 의미
- 문체반정의 문제가 된 부분은?
“우리 어르신께서 황제님께 말씀을 올리면 네놈의 머리를 박살내도 시원치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백화문이라는 중국의 구어체를 글로 옮기다보니 과격하고 저속했던 것이고 민간의 속담 또한 글로 옮기는 것을 비속하고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로 글로 옮기는 것을 꺼려했다고···
- 기본적으로 정조(正祖)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선현의 말씀을 따라 선비로써의 바른 자세를 가지라는 것 “패관소품의 문체를 모두 모방하여 경전의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문풍이란 세도와 관계되므로 경전에 전력하고 잡서들을 금하라” <1792년 정조실록>
- 하지만 정조(正祖)의 본심은 천주교, 천주교는 유학을 부정하는 것이고, 신비한 것을 찾기 위해 청(淸)의 서책을 무분별하게 읽다가 천주교에 빠질 것을 우려했던 것, 많은 사람들이 반성문을 써서 올리나 끝까지 반성문 제출과 문체수정을 거부한 박지원, 정조(正祖)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것으로 정조(正祖)가 보기에도 “연암의 글은 재미만을 위한 글쓰기는 아니다”라고 판단한 정조(正祖), 하지만 전화위복으로 문체반정을 계기로 정조(正祖)의 눈에 띄게 되는 계기가 된다.
〇 연암의 정신, 시험대에 오르다
- 친구 유언호의 천거로 50세에 처음 음직(추천직)을 얻은 박지원, 과거시험도 부정했지만 직접 청(淸)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시험해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지방 관리였지만 64세에는 양양부사역임, 지방관리 시절 실학사상을 시험무대로 활용하며 그간 글로만 풀어냈던 실학사상을 실천하고 싶었던 박지원, 실제로 수레와 벽돌 그리고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구현한다.
-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행동으로 구휼에 내놓은 죽을 함께 먹은 <안의 현감(縣監)> 박지원 “또 들으니 박지원이 고을 원으로서 치적 또한 퍽 훌륭하다는구나! 박제가가 안의를 방문해 정조(正祖)의 은혜로운 말씀이 이와 같음을 전했다.” <과정록>
- 음직(추천직)으로는 최초로 양양부사에 임명되는 영광을 얻게 되고 1800년 정조(正祖)의 승하 후 박지원도 시름시름 앓다가 1805년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역사의 결정적 그날이 된 정조(正祖)의 승하, 시대를 바꿀 지식인들이 기회를 놓친 느낌으로 김홍도 · 정약용 그리고 박지원의 삶까지···
- 박지원의 사상이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 정조(正祖) 사후에 크게 활약은 못하지만, 박지원의 사상이 손자인 박규수에게 전해지고 박규수의 집은 김옥균·박영효와 같은 초기 개화파의 산실로 박지원의 북학사상이 100년 후 개화파를 통해 부활한 것
※ 박규수의 집 : 현재 헌법재판소 앞 백송나무 터, 이곳은 원래 박지원이 살던 집
〇 오늘, 연암이 던지는 화두
- 용(龍)의 여의주 VS 말똥구리의 경단(瓊團)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대답에 박지원 왈(曰) “용에겐 여의주, 말똥구리에겐 경단”이라고··· 이는 기존의 양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재단했던 시각을 버리라는 뜻으로 “모든 존재는 저마다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 는 앞선 시각으로 백성을 봤고 백성에게 필요한 사상을 찾아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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