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〇 저항(抵抗)의 시대를 열다
- 조선왕조의 전복을 꿈꾼 반란인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한 항거인가? 평민 지식인 · 상인 · 장사 · 양반···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 이들이 꿈꾸었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 홍경래의 난 저항의 시대를 연 바로 그 날
1811년 음 12월 18일 평안도 가산, 수탈과 차별에 맞서 일어난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관아에 들이닥치면서 그 선봉에 선 홍경래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왕위에 있어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국권을 멋대로 하고 있다. 이제 격문을 띄우노니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홍경래의 난 격문 >
- 파죽지세로 진격한 홍경래와 봉기군은 불과 10여일 만에 청천강 이북 8개 고을을 점령하게 되는데, 아래로부터 시작된 조직적이고 치밀한 저항으로 19세기 민란의 시대를 연 홍경래의 난은 농민 저항운동의 서막이었다.
※ 19세기 초의 홍경래의 난 → 19세기 중반 임술농민봉기 → 19세기 말의 동학농민운동
- 홍경래와 봉기군, 초반 파죽지세의 원인? <권내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그 만큼 치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① 10년의 준비 ② 주요 인물 포섭 + 자금(資金) 여기에 봉기 직전에는 심리전까지 펼치게 되는데, 평안도 여러 지역에 정감록에 보이는 여러 예언들을 퍼뜨려서 민심을 선동하는 것
- 지방 관아의 기강이 해이해졌던 것도 원인으로 백성에게 관아의 곡식을 나눠주고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은 봉기군에 비해 도망가고 항복하기에 바빴던 고을수령들, 봉기군에 항복한 선천부사 김익순은 김병연(김삿갓)의 조부로 이를 모르고 과거시험장에서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김익순을 고발하라!> 는 시제에 김병연은 이를 신날하게 비판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어머니로부터 조부의 사연을 듣고 더 이상 하늘을 볼 수 없다하여 삿갓을 쓰고 전국을 누비는 방랑시인이 된다.
- 증조부의 이름까지 기재했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서 조부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으나, 김병연의 라이벌이던 노진이라는 시인이 조부인 김익순의 투항을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시를 배포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김병연은 우리 증조부가 이곳에서 이렇게까지 치욕을 당하는구나! 하고 다시는 평안도 땅을 밟지 않았다는 <대동기문>의 기록
※ 대동기문 : 1926년 발간된 조선시대 인물들에 얽힌 일화를 모은 책
〇 홍경래는 누구?
- 봉기군 지도자 홍경래는 누구?
홍경래 자체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홍경래전 · 신미록 · 홍경래실기> 등 전기나 고전소설로만 전해지는데,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생으로 나이와 출생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고전소설 속에서는 행적이 자세하게 기술하고 홍경래를 민중의 편에 선 인물로 그려진 것은 홍경래는 백성의 희망이 될 수 있었다는 인물이라는 반증
- 홍경래,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4척 5촌(150Cm) 정도의 작은 키에 ① 가난한 집안 출생 ② 과거 실패 ③ 풍수지관 ④ 병서 · 술서에 능통하고 특히 정감록 통달, 이를 종합해 보면 사회모순을 직시한 지식인?
- 일반적으로 몰락양반으로 알려졌으나 기록으로 보아 평민인 것이 조선시대 과거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 가능했고, 양반이란 신분은 세습되는 신분이긴 하지만 계속 관직을 유지해야 양반신분이 유지되는 것이고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면 양반지위를 상실하고 자연스럽게 평민으로 떨어지는 것
- 또한 <진중일기>에는 양반의 이름 앞에는 반족(班族) · 사인(士人)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홍경래 앞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고 그의 부인도 <최소사>로 기록, <소사>는 조선시대 평민층 부녀자를 칭하는 말로 부인이 양반이었다면 ‘최씨’로, 노비였다면 ‘곱단이’ 라고 이름이 기록됐을 것, 이를 보아 오히려 홍경래는 평민으로 보는 것이 타당, 홍경래가 몰락양반이라는 것은 과거 연구의 결과이고 현재는 평민이라는 분석이 대세
※ 진중일기 : 홍경래의 난 진압 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책
- 난(亂)에 참여했던 사람은 누구?
조선시대 거의 모든 신분계층이 참여한 홍경래의 난, 상인(商人) · 장사(壯士) · 향임(鄕任) · 농민 ·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던 것
※ 향임(鄕任) : 조선시대 수령을 보좌하던 지역의 중간 계층
〇 난(亂)이 일어난 원인, 첫 째는 평안도 차별
- 난(亂)을 일으키기에 앞서 격문(檄文)을 통해 봉기의 명분을 밝힌다. “조정에서 서토(평안도)를 버림이 썩은 땅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안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平漢)이라 일컫는다.” <격문 중>
- 평안도 출신은 차별 때문에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고, 요직은 모두 중앙의 문벌 가문이 독점, 특정가문이 권력을 잡으면서 관직진출을 더욱 어렵게 만든 세도정치, 정치·사회적 차별 아래 경제적 수탈까지 겪어야 했던 평안도 백성들, 홍경래의 난으로 평안도 일대에는 저항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한다.
- 조선시대 차별의 땅 평안도 “평안·함경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없고, 서울 사대부들은 서북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택리지> 대표적인 사례로 당대 엘리트인 동경대 법학과 출신을 사위로 맞은 윤치호 “서울의 잘 알려진 가문에서 평양출신을 사위로 맞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 욕을 먹게 될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
※ 택리지 : 1751년 실학자 이중환이 현지답사를 기초로 저술한 우리나라 지리서 & 윤치호(1865~1945) : 구한말의 대표적 정치가이며 개화사상가
- 당시 평안도가 차별을 받은 이유는?
역사적으로 보면 평안도는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변방지역이고 벼농사를 비롯하여 농업경제가 발달하기 어려운 척박한 땅으로 양반들이 거주를 기피하여 성리학 보급이 지연되면서 뒤떨어진 지역으로 인식됐던 것
- 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은 반면, 평안도는 대청무역(對淸貿易)의 중심지로 상업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부를 축적하여 평양 유상 · 의주 만상 등이 등장하게 되는 것
- 조선시대 평안도의 재정은 군사·외교적으로 요충지로 국방비와 사신 접대비가 많이 들어서 세금을 중앙에 보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비축해 운영하면서 재정은 매우 풍족했으나, 18세기 중엽 영조(英祖) 대부터 중앙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평안도 재정을 끌어 쓰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평안도 재정이 부족하게 된다.
- 가난한 백성은 물론이고 부유한 백성까지도 수탈당했던 평안도 백성들, 부를 축적한 자는 명예를 얻으려 하는 것으로 매향(賣鄕)이라는 향임(鄕任)직을 돈 받고 파는 과정에서 수령들의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려 있는 사람도 힘들고 없는 사람은 더 힘들어지는 구조
〇 난(亂)이 일어난 원인, 둘째는 세도정치
- 19세기 조선의 세도정치,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수렴첨정을 하다 1805년 사망, 뒤를 이어 김조순(순원왕후 부친)의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가속화 되고 더욱 소수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백성들의 수탈이 심해지게 되는 과정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생한 것
※ 세도정치 : 조선 후기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 형태
- 세도가는 지방수령직을 팔고 지방수령은 향임직을 파는 구조로 빚을 내서 관직을 사고, 더 높은 관직을 사기 위해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던 악순환이 이어졌던 것
- 실제로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던 양반 김창시는 엽관운동을 하다가 가사를 탕진한 사람, 뿐만 아니라 난(亂)에 가담한 주도세력의 명단을 면면히 살펴보면 세도정치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상당수 ① 양반·지식인은 실력이 있더라도 관직 진출 불가 ② 상인은 세도가와 결탁된 독점상인 때문에 피해 (거상 임상옥) ③ 농민들은 세도가와 결탁된 수령들의 수탈
※ 엽관(獵官) :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
- 그래서 홍경래 봉기군의 주장은 지역 차별 철폐 + 세도정치 척결 “백성들은 가난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공정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불평한다.” 구조 자체가 공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안도 차별과 세도정치의 폐해를 잘 읽어 낸 홍경래, 당시 백성들의 호응을 증명하는 <홍경래 난요(亂謠)> ‘철산치오 가산치오 정주치오’ 가사만 전해오는데, 이것은 홍경래 봉기군의 진격의 루트로 백성들의 호응을 증명하는 것
〇 파죽지세 봉기군, 무너지다
- 1811년 음력 12월 29일, 봉기군은 평안도 박천 송림전투에서 처음 관군과 맞서는데, 전투 초반에는 봉기군이 우세했으나 원군(援軍)의 기습공격으로 맥없이 무너지고 봉기군은 처참히 패배하면서 결국, 정주성으로 철수하고 관군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되어 농성전으로 항거하게 된다.
- 사실은 봉기군의 계획대로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박천 송림 전투, 안주를 먼저 치자 VS 영변을 치고 안주로 가자는 내부분열이 있었던 것, 난(亂)의 실패를 우려한 안주 공격파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홍경래의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지체한 봉기군,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관군에 의해 수백 명이 전사하는 치명적 패배를 맞게 된다.
- 진압을 서두르라는 조정의 압박을 받은 관군 “홍경래가 처음 난을 일으켰을 때 관서에서 징병을 하였는데 응하는 자가 없었다. ‘3일 동안 징병하였는데 군대에 응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하였다” <임하필기 32권>
- 영변 VS 안주, 더 나은 선택은?
<권내현 교수의 분석>은 전략적 요충지였던 안주를 치고 서울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세운 봉기군은 관군에게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계획대로 전략적 요충지인 안주를 바로 공격했어야 할 것
- 정주 성으로 철수해 농성전을 벌인 봉기군, 이제는 역공에 나서는 관군은 봉기군의 근거지를 소멸한다는 명분아래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전술을 전개하는데 봉기군과 민간인의 구분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서 양민학살까지 잔행하게 되는 것
- 관군의 초토전술, 조정의 반응은?
뒤 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조치를 취한 조정은 백성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 두고두고 문제가 됐던 관군의 초토전술 “불을 지른 수창범 · 김덕춘 등 2명과 살인한 원범(元犯) 김사옥 등 3명은 모두 수신(帥臣)에게 맡겨 군민을 불러 모아 효수하게 하소서” <순조실록 순조15권 12년 1월 28일>
〇 농민들, 항쟁의 주역이 되다
- 관군의 초토전술로 정주성에서 봉기군과 합류한 농민들, 반면 초반에 가담했던 향리와 같은 중간 계층은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관군 편으로 돌아서게 되는데, 잃을 게 있는 자는 눈치를 보지만 농민이야 잃을 게 없었기 때문에 결사 항전하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는 것
- 봉기 초의 농민들은 광산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봉기지휘부와는 달리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모인 것은 아니었으나, 관군의 초토전술에 자발적으로 봉기에 참여하여 농민들이 항쟁의 중심세력으로 발전하게 된 것, 1789년 프랑스 대혁명도 초기에는 부르주아 층인 유산계급의 주도로 시작을 하여 혁명전쟁을 거치면서 무산계급이 합류하면서 혁명의 원동력으로 이어진 것 <영화 레미제라블>
〇 정주성 전투, 공성(攻城)과 수성(守城)
- 성의 공성과 수성, 유리한 쪽은?
정주성 전투 당시 관군은 8,329명, 봉기군 수는 기록은 없으나 월등히 많은 숫자의 관군, 일반적으로 성을 공격하려면 수비하는 쪽보다 열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한 법
- 우수한 무기의 관군은 어떻게 공격했나?
홍경래 난 진압을 위해 관군이 제작한 신무기 ‘윤제(輪梯)’ <바퀴 륜 · 사다리 제>는 봉기군이 마른 풀과 화약으로 윤제를 불태워버리는 통에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 봉기군의 수성(守成) 전략은?
봉기군의 주요 방어무기는 조총과 칼로 100보 밖은 활로 100보 안으로 들어오면 조총으로 공격하고 더 접근하면 돌로 공격하는데, 조총은 성(城)의 구멍을 통해 조준사격, 반면 동작이 큰 활은 평상시와 다른 방법으로 화살 장전과 공격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반적인 활쏘기 대신에 성벽에 몸을 최대한 붙이고 미리 화살을 장전하여 일어나자마자 바로 쏘는 방법을 택한 것
- 성(城)을 공격하는 방법으로는 성을 넘거나 부수거나 하는 것과 또 하나의 방법은 땅굴을 파는 것, 그런데 당시에는 항아리를 이용해서 땅굴 파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 병서인 <병학지남연의>에서 전투 시 항아리 활용법 소개하는데, 항아리를 이용해 땅굴 파는 소리를 탐지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성을 지키지만 성(城)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는 봉기군의 정신으로 정주성에서 100여일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농민들의 힘인 결사항전의 의지였던 것
〇 홍경래의 난(亂)은 끝나지 않았다.
- 1812년 음력 4월, 100일 간의 대치상황 속에 은밀한 작전을 펼친 관군은 성을 허물기 위해 땅굴을 파고 화약을 설치하여 4월 19일 새벽, 마침내 도화선에 불이 당겨지고 1,700여근의 화약에 산산이 부서지는 성벽
- 물밀 듯 밀려오는 관군과 반도 안 되는 봉기군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데, 결국 홍경래는 총탄에 맞아 숨지게 되고 100일 간의 전투는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 정주성 함락과 함께 체포된 2,938명의 봉기 가담자, 여자와 10세 이하의 어린이를 제외하고 참수(斬首)형에 처해진 사람만 1,917명,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던 홍경래의 난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개발된 최무선의 화약은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무기가 되고 만다.
- 실패로 끝난 홍경래의 난이 남긴 것?
단순한 반란으로 생각한 조정은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해결을 위한 개혁조치는 취하지 않고, 결국 누적된 사회모순으로 불만이 쌓여가는 농민들은 저항의 주체로 성장하여 1862년 임술 농민 봉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다고 볼 수 있는 것
- 비록 봉기는 실패했지만 홍경래라는 이름은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홍경래의 난 이후 계속된 저항의 움직임 때마다 거론된 홍경래 ‘홍경래는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라는 민심을 동요시키는데 활용, <홍경래전 ·홍경래실기>에는 “홍경래가 죽지 않고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홍경래가 말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던 백성들의 의식이 계속 남아 있었다는 증거
- 홍경래 난의 의의?
세도정치의 장벽은 넘지 못했고, 지역차별 철폐도 이뤄내지 못했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19세기 농민들의 의식을 성장시키고 새로운 저항의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홍경래의 난(亂)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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