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〇 동의보감(東醫寶鑑)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勃發) 4년 후, 전쟁은 휴전상태에 접어들면서 선조(宣祖)는 전란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의서편찬을 명(命)하고, 당대 최대의 명의(名醫) 6명이 모였고 이들을 이끌어 가는 것은 당시 내의원의 수의(首醫) 허준이었다.
-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의원들이 흩어져 의서편찬이 중단되고, 몇 년 후(後) 선조(宣祖)마저 승하하면서 의서편찬은 무산되는 듯 했다.
- 하지만 허준은 혼자 귀향지(歸鄕地)에서 1610년 25권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한다.
○ 동의보감, 의서한류(醫書韓流)를 일으키다.
- 2009년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동의보감의 의의(意義)에 대하여 “서양의학의 발전 이전(以前)에 수백만 동아시아인의 보건에 기여한 문헌으로 현대에도 다방면에서 서양의학보다 우수하고 세계 의학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고 기록한다.
- 한국 사람이 쓴 책으로써 동의보감 만큼 세계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은 없고 중국에서 30판이 이상 간행했으며 무려 25권의 방대한 분량이 유례없이 널리 읽힌 명저
- 영·정조 시대 중국사신의 필수 구입도서로 17세기 동아시아 역병(疫病)이 창궐 시 일본에서도 국가 주도로 일본판 동의보감을 간행하여 당시 일본 의학의 표준서 동의보감,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항상 머리맡에 이를 두고 잤다고···
- 장쩌민 국가 주석은 한·중 우호관계의 역사적 증거물은 바로 동의보감 “17세기에 편집된 동의보감도 우리 양국의 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995년 11월 24일> 한중(韓中)교류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의서라는 것은 놀라운 일
○ 허준, 진실 혹은 거짓
- 학자들 사이에서 농담 삼아 하는 말, 허준관련 소설과 드라마 속의 내용은 허준이 남자라는 것과 의관(醫官)이었다는 것 두 가지 빼고는 모두 허구라고···
- 허준은 얼음 동굴에서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했을까?
유의태 인물 자체가 허구이며, 허준 사후(死後)의 인물 유이태가 허준의 스승으로 각색(脚色)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 유이태 : 조선 후기 숙종 때 어의(御醫)를 지낸 의원
- 예진아씨도 허구이지만 의녀(醫女)는 실제 있었던 직업으로 조선은 유교사회로 남녀가 유별하여 여성들은 남성의원에게 진료 받는 걸 거부하여 왕실(王室)이나 종친(宗親) 여성들은 의녀에게 진료를 받았음
○ 허준은 천민출신(賤民出身)이다?
- 허준에 대한 오해 중 하나인 천민출신이며 입신양명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서자(庶子)출신이긴 하지만 허준의 어머니는 양반집 서녀로 양반집의 자손이면 서자(庶子)도 관직에 나가는 것이 가능했던 시기
-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 출신으로 할아버지 허곤은 경상우수사, 아버지 허론은 용천부사를 지냈으며 외5촌 당숙인 김안국이 창진에 관한 의서를 번역한 책 <언해창진방>과 그의 동생 김정국이 약방문을 수집하여 편찬한 책 <촌가구급방>을 편찬했고 집안에 쟁쟁한 의학자들이 포진
- 실제로 허준도 명망 있는 대학자 성혼 · 정철과 교류한 흔적이 있음 “허준이 와서 (정철이) 술을 끊고 수양을 해 코끝의 붉은 반점도 모두 없어졌다고 말하여 몹시 기뻐하였는데···” <우계집> 종합해 보면 서자 출신으로 출셋길에 제약은 있었지만 학습 환경은 완벽했던 셈
○ 허준은 의과(醫科)에 장원급제했다?
- 전의관 · 혜민서 생도들이 장원급제를 해도 종8품으로 벼슬을 시작했으나,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으로 벼슬길에 오름
- 의과(醫科)를 보지 않고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나?
미암 유희춘은 가족의 병을 고쳐준 계기로 허준과 인연을 맺고 있던 차에 선조(宣祖)가 의서 편찬을 위해 민간에서 검증된 인물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허준의 청렴결백성과 학식·의술에 대한 믿음이 있어 그를 천거 “(유희춘은) 이조판서(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 <미암일기 1569. 윤 6.3일>
- 특채(特採)로 내의원에 입성하여 선조(宣祖)의 신임으로 조선 최고의 의원으로 빠른 출세를 하여 서자(庶子)의관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관직을 받은 허준은 문관들의 시기질투에 시달렸을 정도 “사간원이 아뢰기를 상(賞)이 과하니 개정을 명하소서.”<선조실록 1590.12.25>
- 평생 견제세력과 맞서야 했던 허준은 영의정급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의 상소로 철회되고 허준 사후(死後)에 추증(追贈)되며 서자 출신 의관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출세
○ 왕자(王子)의 두창(마마 · 천연두)을 치료한 허준
- 1590년 왕자는 두창에 걸리고 선조(宣祖)는 치료를 명(命)하지만 의원들은 나서기를 꺼려하는데, 당시 두창은 마땅한 약(藥)이 없고 귀신이 들려 생긴 병으로 굿으로만 치료할 수 있다고 믿던 시기 “예전에 왕자가 두창에 걸렸는데 의관들이 풍속 금기에 얽매어 수수방관하다가 목숨을 잃어···” <언해두창집요 허준 저>
※ 두창 神이 싫어하는 것 : 다른 신을 섬기는 제사 · 약 사용 하는 것, 마마는 나라님처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병이라는 뜻
- 이미 두창으로 아들을 잃었던 선조(宣祖)는 왕자의 두창치료를 위해 허준을 지목하고 결국 허준 혼자서 내의원의 서열을 깨고 의학적 판단과 신념으로 처방을 내려서 왕자를 완쾌시키고, 선조(宣祖)는 두창치료법이 담긴 <언해두창집요>를 집필하도록 명(命)한다. “옛 풍속에 마마는 약 쓰는 것을 금(禁)하고 앉아서 죽기를 기다렸다. 허준이 비로소 약을 써서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지봉유설>
- 신(神)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병을 인간의 능력으로 치료한 것으로 두창치료는 의원으로서 대단한 모험이었고, 허준의 과감한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허준 인생의 터닝 포인트! 왕자의 두창 치료, 선조(宣祖)는 기뻐하며 벼슬을 내린다. “선조는 왕자를 치료한 공이 크다. 당상관의 품계를 내려라.” <선조실록 1590년>
- 선조(宣祖)는 허준의 처방에 상당한 신뢰를 하고 있다는 부문, 정숙옹주에게 보낸 편지에 두창을 앓고 있던 정안옹주를 걱정하며 “햇빛이 방에서 돌아서 들면··· 걱정 마라. 자연히 좋아지지 않겠느냐··· 약을 쓰려면 의관과 의녀를 대령하게 하려한다. 허준은 약을 잘 쓰니 무조건 그의 처방을 따르라” 는 서간문
- 1596년에는 “동궁 광해군(光海君)의 중병을 치료한 공(功)으로 허준을 동반에 올리고 관작의 승진이라는 상(賞)을 내렸다.” <선조실록 1596년 3월 3일>
○ 동의보감 편찬, 선조(宣祖)의 업적
- 선조(宣祖)는 동의보감 편찬 방향까지 지시하면서 6명의 명의를 선발하여 의서 편찬 팀을 구성하는데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간행 이후(以後) 최대의 규모, 하지만 편찬지시 1년 만에 정유재란 발발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의서 편찬 작업.
- 그러나 의서편찬 의지를 꺾지 않았던 선조(宣祖)는 전란(戰亂) 중에도 500여권의 참고용 의서를 하사하고 피난길에 선조(宣祖)의 건강을 돌본 허준 “선조가 몽진 시 의주까지 따라간 문·무관이 겨우 17인 이었으나, 허준 등이 끝까지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92.6.1>
- 임란(壬亂) 중 비판을 자각하고 있던 선조(宣祖)에게 의서편찬은 좋은 대안(代案)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조선에 전란(戰亂)에서 생명을 구(求)할 의서가 절실한 때였다. “기근이 날로 심하여 질역이 끊이지 않아 쓰러지는 시체가 즐비하여.” <선조실록 1593년 4월 21일>
- 동의보감 편찬 지침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을 위한 의서 ① 수양(修養)이 우선, 약물 치료는 다음 ②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참조하여 처방의 요점을 추려라 ③ 백성들이 향약(국내산 약)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으로 흔한 약초들의 효능을 몰라서 사용하지 못했던 백성들을 위해 이름과 효능을 한글로 알기 쉽게 정리한 것
- 동의보감으로 본 사회상
피난 갈 때 소아(小兒)의 울음을 멎게 하는 법은 감초 물을 솜에 적셔 아이 입에 물림, 곡식을 먹지 않고 흉년을 이기는 법은 침을 자주 삼키는 것 등등
- 선조(宣祖) 역시 고통을 격은 인물로 임란(壬亂)을 일으킨 왕이라는 죄책감과 이순신과 같은 영웅에 대한 시기의 자책감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이러한 심신불안정이 동의보감 편찬 지시의 계기가 됐을 것
○ 선조(宣祖) 사후(死後), 동의보감 완성되다.
- 1608년 2월 1일 선조(宣祖)의 승하, 당시 내의원의 최고 책임자였던 허준, 조정(朝廷)에서는 허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간언이 쏟아졌다. “어의 허준은 경솔히 독한 약을 쓰고 잡약을 사용해 천붕(임금의 죽음)을 일으켰으니 음흉한 자에게 벌을 내리소서.” 엄벌(嚴罰)에 처해야 한다는 탄핵이 이어지지만 광해군(光海君)은 허준을 의주에 귀향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한다.
- 선조(宣祖)와 허준의 관계는 마치 부자지간, 허준은 죽음을 앞둔 아비를 위한 자식의 마음으로 병이 너무 위중한 선조(宣祖)에게 강(强)한 약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으나 역(易)으로 자신이 그렇게 독한 약을 처방했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했던 것
- 훗날 정조(正祖) 승하 당시에도 비슷한 상황으로 과정보다는 어의(御醫)의 생사라는 결과로 일부 어의들은 보약처방으로 책임을 회피하지만 허준의 처방스타일은 강(强)한 약을 처방하여 충분히 앓게 한 후 치료하는 방법으로 갈수록 병이 심해지자 사방에서 탄핵요구가 올라오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던 허준
- 허준 탄핵에는 정치적상황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하는 건 선조(宣祖)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상황, 오히려 허준이 돌본 덕분에 오랫동안 버텼으나, 문제는 당시 광해군 왕위계승을 둘러 싼 소북파(영창대군 지지파, 유영경)와 대북파(광해군 지지파)의 대립, 당시 소북파의 영수 유영경은 내의원 도제조의 업무를 맡고 있어 유영경을 치기위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허준이 희생됐을 가능성(?)
- 허준은 귀향지에서 동의보감 편찬에 힘쓰며 72세(선조 승하 2년 후)에 이를 완성하고 허준의 능력을 인정했던 광해군은 허준을 다시 등용시킨다. “선왕(先王)께서 찬집을 명(命)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되니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광해군일기 1610 년 8월 6일>
- 충신(忠臣)에 대한 신뢰를 넘어 인간적 감동을 느꼈을 듯 ① 임진왜란 중에 왕의 곁을 지킴 ② 귀양지에서 동의보감 완성 ③ 선조(宣祖)가 승하한 후에도 뜻을 받들었던 충성심
- 전후(戰後)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동의보감 간행을 추진하여 허준이 동의보감을 바친 후 3년 만인 1613년에 이를 간행하고 허준에게는 부상으로 숙마(熟馬)를 하사한 광해군
※ 동의보감은 25권 5개 편
- 내경 : 정기신, 오장육부의 구성 원리와 관련 질병
- 외형 : 신체 외형의 구성 원리와 관련 질병
- 잡병 : 소아과 · 부인과 · 기타 질환
- 탕액 : 본초학
- 침구 : 침구학으로 내경·외형·잡병 편에서 88종(種), 90여 개 문으로 질환과 처방 제시
○ 동의보감, 그것이 궁금하다
- 동의보감에 현대의학에 상당하는 내용이 있는지?
동의보감에서 아토피 같은 현대질병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토피를 한의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서 적합한 치료법이 담겨있음
-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은 도교(道敎)의 생명관 · 신체관과 의학이 높은 수준에서 통합된 것으로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양생(養生), 현대의 예방의학으로 단순한 질병치료를 넘어 수양의 단계로 정(精) · 기(氣) · 신(神)을 잘 길러야 한다고 기록
- 정(精)·기(氣)·신(神)은 무엇?
생명현상의 가장 근본적인 물질로 정·기·신이 온전해야 육체인 우리 몸이 건강하다고 얘기하고 있음
※ 정·기·신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인체의 구성 물질이자 생명의 근원
- 양생(養生)을 잘 하는 구체적인 방법?
반대로 양생을 잘 못하는 방법을 말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으로 술을 음료수 마시듯 하고 · 식사도 일정하지 않고 · 거처도 일정하지 않는 등등으로 해답은 자연에 순응하라는 것
- 한의학자가 생각하는 동의보감의 가치?
17세기 동아시아의 의학사를 집대성한 기록으로 당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치료수단으로 활용하여 시·공간을 초월하는 현재진행형 의서라는 것이 가장 큰 가치, 양생의 핵심은 ① 화(火)를 다스리고 희로애락을 조절하라. ② 병이 들기 전(前)에 예방하라는 것으로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적용되는 내용
- 고대(古代) 중국의 명의인 편작(진월인) 왈(曰) “나보다 뛰어난 명의(名醫)인 2명의 형이 있지만 그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환자가 병이 들기 전에 예방하였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 도가양생법이 유행하여 남명 조식 · 토정 이지함 · 정렴과 정작 형제 등이 도가양생법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양생은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생들에게도 중요한 덕목으로 평소 마음의 수련이 건강과 직결되고 병이 든 것은 수양이 부족한 결과, 관리들은 수신(修身)을 못해 병들었다는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기도
-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이 일어난 시기, 임금부터 백성까지 <힐링>이 필요했을 것이기에 양생이 강조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요즘 유행하는 <웰빙·힐링>은 양생과 같은 맥락으로 400여 년 전(前)에 이미 정신건강의 개념을 담았던 동의보감
- 세종 대 의서(醫書)들과 비교했을 때 동의보감의 역사적 의의는?
○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의의
- ① 전통적 의학지식을 완벽히 이해 ② 양생(養生)과 의학(醫學)을 혁신적으로 통합 ③ 질병에 알맞은 처방
-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까지 17세기 동아시아의 의학서를 집대성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치료수단으로 활용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현재진행형의 의서(醫書)로 유례없는 한의학의 모범서
- 허준의 자부심, 세상에는 중국 북쪽의 의학 북의(北醫)와 남쪽의 남의(南醫)가 있는데, 조선에 동의(東醫)가 있다는 자부심에서 동의보감으로 명명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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