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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史劇) 속 인물, 제5편 <한명회>

mkpark2022 2015. 8. 20. 22:54

 

 

 

 

사극(史劇) 속 인물, 제5편 <한명회>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한명회

- 조선 초기 최대의 비극인 계유정난의 설계자, 한명회를 둘러싼 엇갈린 평가!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조선의 7대 임금으로 즉위한 수양대군 세조(世祖), 그 뒤에는 수양대군의 장자방(張子房)이라는 칠삭둥이 한명회가 있었다.

-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한 주부는 세상을 어찌 보는가?” 라는 질문에 이 안에 있는 것으로 봅니다만하면서 손바닥을 가리킨다.

- 야심을 감추고 있던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는 날개를 달아 준 존재, 조선 최고의 책략가인가? 혹은 권력만을 탐한 모사꾼인가? 한명회를 둘러싼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는데··· 한명회 그의 손 안에 담겨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드라마 속 역사인물 한명회

- 1984<조선왕조실록 500> 정진 1994<한명회> 이덕화 1998<왕과 비> 최종원 2011<공주의 남자> 이희노 2013<관상> 김의성

- 실록에서도 확인되는 드라마 속의 명대사 내 손안에 있소이다.’ (형상재수, 刑賞在手) “한명회가 주상의 신임하는 바가 되어 팔도의 군사를 통솔하고 형벌과 상주는 것이 손 안에 있었다.” <세조실록 25>

- 한명회는 어떤 인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강문식 박사>

조선 초기 15세기 계유정난의 주도자로 세조(수양대군) 정권탄생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인물로 세조·예종·성종시대 권력의 최 정점에 위치한 인물

- 한명회의 실제 외모는?

문헌에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는 없고 <신도비명>에는 잘 생긴 미남으로 기록되어 드라마의 이미지와 정 반대의 외모 얼굴이 잘나고 키가 커서 바라보면 위대하였고 규모와 기개가 우뚝하여 무리에서 돋보였다.” <한명회 신도비명>

-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는 역사의 인물에 대한 기록기억하고 싶은 이미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대호(大虎) 김종서하면 웅장하고 대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문관 출신에 왜소한 체구 & 장녹수 역시 드라마와는 달리 외모가 수수했다는 것으로 아마 한명회의 못생긴 이미지는 칠삭둥이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빨리 태어나 뭔가 발육상태가 늦을 것이라는 편견?

 

칠삭둥이 한명회, 영의정이 되다

- 한명회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한명회의 어린 시절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가난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성종실록 209> 라는 기록은 있으나 한명회의 집안은 당대 손꼽히는 명문가로 증조부 한수는 고려시대 대학자였고, 조부 한상길·한상경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 친척 한상덕의 양자로 들어가 큰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을 듯···

- 불우하다는 표현은 출세가 늦었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 아닐까?

과거에 계속 낙방을 하다가 드디어 38세에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개성의 사저를 관리하는 관직 경덕궁직에 진출하는데, 이 자리는 음서(蔭敍)로 채우던 자리

음서 :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관직이 높은 신하의 아들이나 손자를 과거 시험 없이 등용하는 제도

- 동문수학하던 친구 권람·서거정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한명회는 1452년 경덕궁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수양대군을 만나면서 1453년 계유정난을 겪고 1466년 영의정으로 발탁되어 일등공신 4관왕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 특히 같은 시대의 인물 신숙주·정인지도 4차례의 공신책봉을 받았으나 이들은 모두가 일등공신은 아니었고 한명회 만이 일등공신 4차례 책봉


킹메이커, 한명회

- 한명회는 어떻게 수양대군의 최측근이 됐을까?

뛰어난 언변으로 간결하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 덕분, 친구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과 처음 만난 한명회 수양대군은 활달하기가 한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한 성품은 당태종(唐太宗) 같으니··· 이처럼 어려운 시절에는 이런 분이 뭔가 용단을 내려야 한다” <신도비명>는 주장을 하며 찬양을 하니 야심이 있는 수양의 입장에선 그냥 넘어 갈 일이 아닌 것

- 14531010일 계유정난의 밤, 김종서의 집을 찾은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쓰러뜨리고 계유정난이 시작되는데, 명분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김종서 등이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 김종서 ·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의 중한 뇌물을 받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단종실록 8>

-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성공을 위해 직접 만든 살생부를 꺼내 들고 한명회의 고갯짓 한 번에 대문을 통과하는 충신이 하나하나 목숨이 사라져가는 피로 얼룩진 계유정난의 밤, 단 하룻밤 만에 조선 조정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 계유정난의 설계자이며 일등공신인 한명회, “충성공 한명회는 계려(計慮)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소문쇄록> &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는 방법을 묻자 난세에는 문인보다 무인들을 사귀어야···” 하며 그간 친분이 있던 무인 30여명을 천거하며 이들은 계유정난 성공에 결정적 역할

계유정난의 배경 어린 단종 즉위 강성한 대군들(수양, 안평)의 세력 고명대신(김종서 등)의 권력 독점

- 당대의 정세를 정확히 꿰뚫은 한명회, 책을 읽는 재주는 없었지만 세상을 읽는 재주는 탁월했던 듯, 한명회는 살생부로 친 단종파를 제거하는 등 수양대군의 집권을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냉혹함은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인 잔인성에서 출발

- 계유정난의 명분은 안평대군이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불궤한 짓을 공모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해 먼저 베어 없애고···” <단종실록 8> 하지만 안평대군의 역모정황은 전혀 없었던 것

- 수양대군 VS 안평대군, 내가 만약 한명회라면?

무인 기질의 수양대군 VS 문인 기질의 안평대군, 거사를 일으키려면 무인 기질의 수양대군이 유리했을 것, 한명회는 나이 40이 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출세하기 어려워 비상한 공을 세워야 했고, 당시 실세였던 정승들과 친했던 안평대군은 한명회 같은 전략가가 필요치 않았을 것

- 신숙주 · 권람 보다 출발이 늦었던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최고공신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는 수양대군의 남자로 등극하는데···, 당시 병권(兵權)을 쥐고 있던 김종서가 쉽게 무너진 이유는?

 

계유정난, ()를 장악하라!.

- 어떻게 단시간에 궁궐을 장악했을까?

정란성공의 핵심은 무력, 실제로 계유정란의 공신으로 책봉된 무인들 대부분은 내금위 소속의 무사들로 이들은 한명회가 수양대군에게 연결시켜 준 무사들.

내금위 : 조선 전기 왕의 친위부대로 당시 무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발

- 그 중에서도 무과출신 홍달순은 조정의 출입과 통제를 담당하는 감순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인물로 당일 정난의 반대파는 도성출입을 금지시키면서 무력 지휘계통 접근이 불가하게 만들어 쉽게 궁궐을 장악하게 한다.

- 무시무시한 철퇴는 어떤 무기?

철퇴는 방패 · 갑옷 등으로 중무장한 적을 공격하는 타격병기로 시초는 원시시대 돌도끼, 조선 전기 군대훈련에 사용된 철퇴는 국왕호위 위사들도 반드시 소지했던 것으로 특징은 멀리 있는 적 공격에 유리 속도가 빠르다 적의 무기를 제압하는 것으로 충격량은 속도와 무게에 비례하여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것

-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를 무력화시킨 철퇴는?

큰 철퇴는 숨기기 어렵고 고리형 철퇴는 소리 때문에 쉽게 발각될 수 있어서 작고 봉으로 된 철퇴를 사용했을 것이고 정확하지 못한 칼 공격은 생존율이 높아 철퇴로 순간적으로 상대를 무력화 시킨 것

 

한명회, 왕의 최측근으로 사는 법!

- 정치 9단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은 한명회의 비결?

첫째는 세조(世祖)의 목숨을 구하는 사건, 사육신의 단종(端宗) 복위운동을 저지시키는 사건으로 명나라 사신 접대연회를 준비하는데, 임금의 호위무사 운검을 맡게 된 성승(성삼문 아버지)과 유응부는 연회장에서 세조(世祖)와 한명회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사전에 연회장을 답사한 한명회는 날이 덥고 장소가 좁으니 운검을 빼야···” 이로써 성삼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둘째는 세조(世祖)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는데, 술 정치판을 자주 벌인 세조(世祖) “신숙주는 술을 잘 마시고 한명회는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동춘당집 별집 제6> 술은 못 마셨지만 누구보다 술자리에 자주 참석한 한명회, 술자리를 즐겼던 세조(世祖)는 기록에도 격의 없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도 실수가 없었던 어효참은 술 덕분에 <이조참>에서 벼락출세 하여 <이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한다.

 

한명회, 조선(朝鮮)을 경영하다.

- 신숙주와 달리 업적을 찾기 힘든 한명회, 그의 업적은?

본인이 남긴 저술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업적이나 또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서거정이 지은 <신도비명>의 기록에 의하면 중요한 업적은 도체찰사로 활동하면서 약 14년간 총 14(평균 90~300/) 활동, 일종의 어사역할로 세조(世祖)의 정책 시행에 큰 밑받침.

북방·변방 방어 전문가, “한명회가 배와 뗏목을 만들어서 강을 건널 계획을 세우고··· 여러 진에 둔영(屯營)할 준비하게 하니··· 연달아 항복하는 야인들이 무려 수백 명이었다.” <세조실록 25> 세조(世祖)한명회가 있어서 싸우지 않고 오랑캐를 굴복시켰다

외교의 달인, 왕세자 책봉 등 외교 현안 해결 등으로 조선을 경영한 한명회는 민생 지방출장 + 국방강화 + 빈번한 해외출장 = 시대를 경영한 한명회의 역량

 

한명회의 위기

- 한명회에게 위기는 없었나?

여러 번 있었으나 가장 큰 위기는 <이시애의 난>, 세조(世祖) 13(1467) 함경도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으로 이들은 한명회·신숙주가 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 이에 세조(世祖)는 신숙주를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당시 병중이었던 한명회는 가택연금을 시키는데, 사실 세조(世祖)는 한명회·신숙주가 연루되었다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런 소리 나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서 구금을 하게 되는 것

- 그런 한명회에게 다시 기회가 오는데, 세조(世祖)가 사망하고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지만 12개월 만에 사망하면서 한명회의 전성시대가 오는데, 왕세자를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종(睿宗)이 승하하여 국상(國喪)을 주관할 상주가 없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당시 한명회의 막내딸은 세조(世祖) 13년에 이미 자을산군과 결혼한 사이


한명회의 사위 성종(成宗), 왕이 되다.

- 서열 3, 자을산군이 왕이 된 것은 장인 한명회 때문?

한명회가 왕을 추대했다는 기록은 당연히 없고, 당시 1순위는 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은 4, 2순위는 예종(睿宗) 형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16세였으나 병약을 이유로 동생인 13세의 나이에 3순위인 자을산군을 추대하게 되는데, 이는 대비 정희왕후의 입장에서도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한명회와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판단이었을 수도 있고, 또한 세조(世祖) 때의 원상제(院相制)는 어린 왕이 즉위할 경우 재상들이 왕을 보좌하는 제도로 원상들의 리더가 바로 한명회였다는 점

- 서열 2위 월산대군이 왕위에서 밀려난 이유 병약’?

하지만 이후 월산대군은 19년을 더 살고, 자을산군(성종)25년을 더 산 것으로 보아 병약함은 핑계일 뿐 정희왕후의 마음은 이미 자을산군에게 있었을 것, 또한 정희왕후 수렴첨정 기간에 좌리공신 이라는 공신책봉이 있었는데, 이는 수렴첨정기 원상의 협조를 얻기 위한 정치적 산물

- 한명회, ()와 권력은?

토지와 노비, 보화 등의 뇌물이 잇따랐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었다” <한명회 졸기> 또한 중국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뇌물을 줄 정도의 재력으로 조선 전기 한강변에 유일한 개인정자 압구정(鴨鷗亭)을 소유할 정도

 

압구정의 변(), 나는 억울하다?

- 한강변에 위치한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鴨鷗亭)은 경치가 좋아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였고, 1481년 성종(成宗) 12년에 명나라 사신이 압구정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오는데, 왕실에서 쓰는 장막(帳幕)을 빌려 주면 모를까 장소가 협소해서 안 된다는 한명회의 대답에 격노한 성종(成宗)

- 성종(成宗) VS 한명회의 갈등, 압구정 사건의 진실은?

한명회가 요구한 천막은 단순한 천막이 아니라 용봉차일로 용과 봉황이 그려져 있어 왕실이나 국가행사 때 쓰는 물건으로 한명회 개인의 정자에서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 문제가 된 것, 화가 난 성종(成宗)은 연회장소를 바꿔버리지만 한명회는 부인이 아프다는 핑계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성종(成宗)의 분노를 폭파시킨 것.

- 한명회의 오만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압구정 사건, 30년의 권세 + 성종(成宗)의 장인 + 킹메이커의 보상심리(?), 아니면 한명회의 단순한 판단착오로 성종(成宗)의 중국 사신 접대는 국가 중대사로 용봉차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 중요한 것은 성종(成宗)의 본심이 어떤 것이냐?

이 문제를 국가중대사로만 본 것이 아니고 한명회 개인의 문제로도 봤다는 것, 용봉차일을 빌려달라고 한 것도 문제가 있으려니와 장소가 바뀐 연회에 불참했다는 것은 국왕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 성종(成宗)과 한명회의 또 다른 갈등, 정희왕후의 철렴논란으로 정희왕후는 성종(成宗)20세가 되자 철렴하려 하지만 한명회는 이를 반대하는데, 이는 성종(成宗)의 친정(親政)을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상황,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신하들은 한명회의 탄핵을 요구하면서 실각하게 되는 것

- 또한 권력의 문제도 있었던 것이 성종(成宗)의 친정(親政)은 한명회의 입장에서는 곧 원상(院相)의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의 입장도 곤란했을 듯?

당시는 성종(成宗) 12년으로 공혜왕후는 이미 7년 전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한 상태, 또한 한명회 셋째 딸 예종 비 장순왕후도 17세에 사망하게 되지만 한명회는 73세까지···

- 계유정난 이후 영원할 것 같았던 한명회의 권력도 30여 년 만에 끝이 나고 권력에서 밀려난 한명회는 성종(成宗) 18(1487) 7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고 그 후, 7년 뒤(연산군 10) 갑자사화로 부관참시의 화를 당하게 된다.

 

두 번 죽은 한명회

- 영화 <관상>에서 인상적이었던 한명회의 부관참시(剖棺斬屍), 이는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날 경우 그 송장의 목을 자르는 극형 만년에 권세가 이미 떠나자 빈객(賓客)이 이르지 않으니 초연히 적막한 탄식을 하곤 하였다” <한명회 졸기 > 한명회가 아닌 권력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

- <강문식 박사>가 보는 한명회는 입지전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권력에 집착하여 잔혹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인물, 하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남아있는 한명회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 몰두를 했고 또한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일까지도 꺼리지 않았던 인물로만 남게 되었다는 것으로 한명회가 간신으로 기억되는 이유를 알아야하고 성공의 길이 다양한 사회여야만이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일

- 만약 한명회를 인터뷰한다면?

()고시 출신, 공신 4관왕의 삶과 권력부제로 비()주류의 승천, 축배인가? 독배인가? & 한명회,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다! 생각해 보면 공교롭게도 난세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정작 시대가 안정이 되면 설자리를 잃는··· & 성공이 곧 선()인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게 했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이 곧 선()이라고 하기에는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