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史劇) 속 인물, 제3편 <정도전>의 공민왕
〇 공민왕의 개혁과 욕망 사이
- 아내인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환락에 빠져 지낸 공민왕, 그는 미소년(자제위)들과 함께 난잡한 놀이를 즐기고 심지어 이들을 시켜 자신의 후궁들을 욕보이게 하고 그런 공민왕에게 정도전은 바른 소리를 고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을 하옥시킨다.
- 하지만 그는 다시 정도전을 찾아가 사주한 자가 누구냐고 묻자 ‘백성들!’ 이라고 말하는 정도전의 말에 정곡을 찔린 공민왕은 정도전을 죽이려고 칼을 빼들지만 “고려에 희망이 없음을 알았는데 살아본들 무엇 하겠습니까?” 라며 죽이라고 말하는 정도전의 의지를 보고 공민왕은 “네가 말한 희망이라는 것!, 그 놈에게 한 번만 더 속아보겠다” 하고 다시 한 번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는데 드라마 속 개혁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공민왕 VS 욕망에 빠져버린 공민왕, 그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〇 드라마 속 공민왕 VS 실제 공민왕
- 정도전이 공민왕과 실제로 만났나?
정도전은 공민왕 11년(1362)에 과거에 급제한 말직의 관리가 왕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고려시대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위한 것일 뿐이고 교과서에는 개혁군주로 묘사되어 개혁과 욕망에 사로잡힌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민왕
※ 쌍화점 : 2008년도 공민왕과 호위무사 · 후궁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한 영화
- 왜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기억하나?
실제로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 왕, 뒤로 우왕·창왕이 있었으나 폐위되고 공양왕은 양위하여 <고려사>는 공식적으로 공민왕을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
- 원(元) 간섭기, 공민왕의 시호(諡號)만 다른 이유?
묘호(廟號)는 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올리는 이름, 그런데 원(元) 간섭기 부터는 왕이 죽은 뒤에 중국의 황제가 내려준 이름으로 시호(諡號)를 사용하여 충~으로 시작하는 시호를 사용하는 전통이 있었고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묘호(廟號)를 올리지 못하고 시호(諡號)를 받는 전통이 계속되면서 공민왕은 명(明)으로부터 시호를 받게 되는 것
- 원(元) 간섭기의 고려왕들은 원(元)에서 일정기간 볼모생활을 하는데 공민왕도 12세부터 10년 간 원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정치와 문화를 수학한다.
〇 공민왕은 3수생
- 공민왕은 왜 아버지에게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을까?
아버지인 충숙왕은 장자인 형(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형은 두 아들(충목왕·충정왕)로 왕위가 이어졌다가 결국, 조카인 충정왕에게 왕위를 물려받는다.
- 고려의 왕위을 책봉했던 원(元)황제는 ‘부자·장자 계승원칙’을 존중하여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린 공민왕은 조카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것
- 문제는 그 당시 국민들은 좀 더 유능한 국왕을 선호하여 나이 어린 충혜왕의 아들보다 공민왕을 원했기 때문에 고려의 관리들은 원(元)에 직접 가서 피력을 하지만 공민왕이 즉위하지 못하고 지지 세력마저 돌아서는 결과를 초래하여 왕위책봉은 물론 복위 · 폐위까지도 원(元)의 마음대로 행한다.
〇 공민왕, 결혼과 함께 왕이 되다.
- 1349년 공민왕은 원(元) 황족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원(元) 황실의 사위가 되는데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없는 공민왕은 결혼으로 원(元) 황실의 든든한 배경을 얻는다.
- 한편 고려는 날로 늘어만 가는 권세가들의 부정부패로 신음하고 충정왕의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자, 결국 원(元) 황제는 무능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여 원(元)의 볼모생활 10년 만에 왕이 되어 귀국한다.
- 둘은 어떻게 결혼 했을까?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했을 가능성, 충목왕은 8세 · 충정왕은 12세 즉위로 혼인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공민왕은 10대 후반으로 원(元)의 공주와 결혼해 부마(駙馬) 프리미엄을 획득한다면 고려 국왕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
- 볼모의 생활로 가능했을까?
뚤루게(禿魯花독로화)는 인질을 뜻하는 몽골어로 원 황제 시중을 맡았던 정복지역 왕족이나 귀족 자제 출신으로 뚤루게는 고달픈 인질이지만 차기 왕 후보의 길이 열려 있는 존재
- 충정왕 폐위 원인?
충정왕 즉위 후 외척세력들이 부원세력(附元勢力)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권력을 독점해 가는 경향을 띄게 되고, 아울러 1350년대 이후 대규모 군대세력으로 커진 왜구는 부족한 물자를 얻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지만, 외척들이 대응하는 고려 조정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시 내분으로 어지러웠던 원 황실은 고려침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데, 왜구가 원(元) 제국까지 공격당할 것을 우려한 것
※ 부원세력 : 친원 세력으로 원나라에 기대어 고려 정국을 주도했던 정치세력.
- 결국 충정왕으로 이를 수습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갑자기 폐위를 시키면서 공민왕을 책봉하게 되는 것, 공민왕은 부원세력의 도움을 받아 즉위 VS 원(元)과 부원세력에 대한 반감
〇 공민왕, 원(元)의 허를 찌르다
- 즉위하자마자 변발폐지 · 호복폐지를 내세우는데 사실 이 제도는 원(元)의 강요가 아닌 고려 지배층이 스스로 받아들인 풍습으로 이를 금해도 대외적으로는 원(元)에 대한 공식적인 반감이 아니라는 충분한 구실이 되고, 그러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왕이 원(元)에 대해서 이제는 뭔가 다른 정책을 펴려하는구나 하는 신호를 보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는 것
- 반원(反元) 정책의 본격적 시행은 1356년 5월 18일로 역사적 그날 ① 기철(기황후의 오빠) 일파 제거(除去) ② 정동행성의 이문소 폐지(廢止) ③ 쌍성총관부 공격을 위해 출정
※ 기황후(奇皇后) : 고려 출신으로 원순제의 제2황후로 황태자까지 낳음
- 기철의 죽음에 기황후는 가만히 있었을까?
당시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으로 혼란했던 시기로 홍건적을 막기 위해 고려에 파병을 요청한 원(元), 최영 등이 파병을 가서 겪었던 원(元)은 생각보다 허약함을 공민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 것
※ 홍건적의 난 : 이민족 왕족인 원(元)을 타도하고 명나라 창건의 계기를 만든 종교적 농민 반란.
- 하지만 반원정책은 왕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극히 위험한 일로 실제로 형 충혜왕은 원(元)에 귀양 가던 중 사망하고, 조카 충정왕은 원(元)에 의해 폐위된 뒤 독살된 것을 목격한 공민왕
- 그런 상황에서도 일정을 불사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판단과 그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 이런 것들이 1356년 5월 18일 하루에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기철 일파를 죽이고 정동행성의 이문소(사법업무를 담당하던 친원 세력의 근거지)를 폐지하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 일을 동시에 추진한다.
- 쌍성총관부(1258~1356)는 원나라가 화주 이북의 고려 영토를 직접 통치 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관으로 출정 2달 만에 쌍성총관부가 함락되어 철령 이북의 땅을 항몽 전쟁 약 100여 년 만에 잃어버린 역사를 회복한 것이다.
- 공민왕이 대단하다는 것은 반원(反元)뿐만 아니라 이후의 미래까지도 설계하여 원(元)의 세력을 몰아 낸 다음 곧 바로 일국갱시(나라를 다시 새롭게 한다)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문에 개혁안을 제시하여 역사는 반원운동에 그치지 않고 반원개혁이었다고 평가를 한다.
- 공민왕의 반원정책, 노국공주는?
특별히 저항했다는 기록은 없고 오히려 남편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협조한 노국공주, 원(元)에서는 공민왕의 반원운동을 한 달 뒤에야 알게 되는데, 당시 노국공주는 원(元)을 대표하는 역할로 원(元)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한 것
〇 공민왕 VS 노국공주
- 홍건적은 고려에도 침입하고 당시 공민왕은 개성을 버리고 안동으로 몽진하게 되는데, 당시의 후궁인 혜비에 대한 기록은 없고 공민왕과 노국공주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 심지어 <흥왕사의 변>에서는 공민왕의 목숨까지 구해 준 노국공주 “반적들이 침입하자··· 노국공주가 문 앞에서 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적이 칼을 들고 덤벼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감히 공주에게는 독기를 부리지 못했으므로···” <목은 문고 제14권>
- <흥왕사의 변>은 기황후가 사주한 사건으로 원(元)의 사주를 받은 자객은 원(元)의 공주를 헤치지 못하고 노국공주가 버티는 사이 최영 장군 등이 공민왕을 구출한다.
※ 흥왕사의 변 : 1363년 원과 결탁한 김용에 의해 흥왕사에서 공민왕이 습격당한 사건
〇 공민왕, 노국공주를 잃다.
- 1365년 2월 공민왕은 16년 간 함께 한 노국대장공주를 난산(難産)으로 잃게 되고, 공주의 초상화를 모실 영정공사를 강행하는데, 엄청난 비용으로 국고는 탕진되고 잦은 사고와 이어지는 노동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더해간다. “집채만 한 주춧돌을 운반하는데 끄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이 마치 수천 마리 소가 우는 것 같았다” & “또 일꾼을 징발해 건축자재를 강이나 바다를 통해 운반하게 했는데 압사하거나 익사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고려사 공민왕 18년>
-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공민왕, 힘없는 백성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공민왕은 왜 그토록 영정공사에 집착했을까? 이전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공민왕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마주하고 식사하면서 슬피 울었다” <고려사 공민왕 추비열전> 공민왕이 그렸다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 두 사람의 능(陵)은 개성의 봉명산에 있어 현재는 가볼 수 없음.
〇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릉
- 공민왕릉의 개성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봉명산에 700여 년 전에 세워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고 특징은 쌍릉으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있는데 “뒷날 내가 그 서쪽에 묻힐 것이니 혹시 조금도 치우치는 점이 없도록 하라” <목은문고 제14권>
- 공민왕릉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개성 시내 고려박물관에 공민왕릉 모형관이 있는데, 특이한 점은 노국공주 무덤 쪽으로 문(門)그림을 새겨 주먹하나 크기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다른 고려 왕릉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둘이 서로 사랑했기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혼이 오가길 바랐던 통로가 아닐까? 하는 북한 관광해설사의 추측
- 천장에는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 등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데 사후(死後) 세계를 믿었던 고려인들의 내세관이 반영된 것
- 북한에서 외부에 공개하는 릉은 태조 왕건과 공민왕릉만 외부에 공개한다는 것만 봐도 이 왕릉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단순히 예술적인 측면을 더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로 더욱 특별한 왕릉
- 드라마에서처럼 노국공주 사후 공민왕은 개혁을 포기했나?
<고려사>는 신돈에게 정치를 일임하고 욕망에 빠져 문란해 진 것으로 평가를 하지만, 과연 신돈이 정치를 했던 시기가 문란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전 개혁을 계속하고 있었는지는 역사적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
- 요승(妖僧)신돈은 경남 창녕의 옥천사 노비(奴婢)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에 의해 파격적인 중용으로 미천한 신분인 신돈을 등용한 것 자체가 개혁의 의미
〇 공민왕, 개혁의 끈을 놓지 않다.
- 공민왕은 “세신 대족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 서로 허물을 가리어 숨겨주고” & “초야의 신진들은 귀현이 되면 스스로 문벌이 한계인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들과 인척을 맺어 처음의 의지를 다 버리고 스스로 세신 대족이 되려고 한다.”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3 율사 14년(1365)>
- 그래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나 홀로 우뚝 서있는 인재를 찾은 공민왕, 신돈의 등용은 노국공주 사후 5개월 뒤 아주 절박한 상황 속에서 신돈을 기용하여 신돈을 통한 공민왕의 개혁 ① 기득권 세력 물갈이 ② 성균관 부활하여 신흥사대부를 키움 ③ 과거제도 정비 ④ 전민변정도감 설치
※ 신흥사대부 : 성리학을 바탕으로 권문세족과 대립한 고려 말의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이 되는 정몽주, 정도전 등이 대표적 인물
- 고려 말 과거제도의 문제점?
고려 후기의 ① 흑책지방(黑冊之謗)은 청탁 때문에 인사가 자꾸 바뀌어 방을 덧칠하여 까맣게 됨을 비유 ② 분홍지초(粉紅之誚)는 권세가의 어린 아이들이 집안을 배경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과거를 주관하는 사람과 합격하는 사람이 좌주문생(座主門生)이라는 인간관계를 맺고 사당(私黨)을 조직하는 것
- 이를 없애기 위해 공민왕은 친시(親試)를 실시하는데, 친시는 임금이 직접 시험장에서 성적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던 일로 왕과 합격자 사이에 좌주문생 관계 성립하게 되는 것
- 또 하나의 대민정책으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 권문세족들의 불법적인 대토지 소유의 횡행으로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는 자영농이 확산하게 되자, 불법적 소유 토지의 반환(返還)과 노비의 양인화를 추진하여 몰락한 자영농의 회복으로 세수(稅收) 마련에 도움이 되게 하고, 추후 이성계는 전민변정도감의 성과를 바탕으로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을 시행한다.
- 공민왕은 개혁과 욕망 모두를 추구했던 인물, 다만 한 쪽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었다면 다른 한 쪽은 군주로서의 본분에 합당했던 것.
〇 신돈 제거, 꺾여버린 개혁의 꿈
- 공민왕이 신돈을 버린 이유?
본질적으로 신하가 왕 권한의 지속대행은 불가능한 것이고 아울러, 왕권에 비견될 정도로 커진 신돈의 권력과 외부적인 요인이 발생, 당시 대외정세는 1368년 명(明)이 원(元)을 몰아내고 고려는 원(元)과의 관계를 끊고 공민왕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선다.
- 명(明)에 공격당해 만리장성 밖으로 밀려난 원(元)은 요동지방에서 명(明)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요동은 고려의 국경인 압록강과는 지척으로 명·원 양국의 전쟁으로 고려에도 비상이 걸리고 왜구의 잦은 출몰로 고려에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이럴 때 외적에 맞설 유능한 장수는 신돈과 같은 개혁가가 아닌 최영과 같은 유능한 장수가 필요했던 것
- 그래서 경주에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있던 최영을 불러들이고 신돈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고, 노국공주의 사후 신돈을 기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던 공민왕의 정책은 신돈의 제거로 탄력을 잃게 되는 것
〇 고려의 마지막 불꽃 사라지다.
- 1374년 공민왕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는데 익비의 회임(懷妊)을 알리는 환관 최만생, 공민왕이 애비가 누구냐고 묻자 자제위 홍륜이라고 고하자, 공민왕은 아끼는 자제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며 연회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홍륜을 제거하라고 명한다.
- 환관 최만생은 병사들을 이끌고 홍륜과 자제위를 덮치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이들에게 오히려 포위당하고, 분노한 자제위는 병사·나인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하며 왕의 침실까지 덮치고, 홍륜의 칼 앞에 공민왕이 피웠던 개혁의 불꽃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지고 만다.
-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킨 건 사실?
<고려사>의 역사적 기록이지만 모순적인 것이 익비가 홍륜의 아이를 가졌다고 보고한 사람은 최만생인데, 홍륜 뿐만 아니라 관리소홀로 최만생도 죽이려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최만생이 홍륜을 죽이려 하지만, 실제는 드라마와 달리 홍륜과 최만생이 합세하여 공민왕이 잠든 숙소를 습격하여 시해한다.
- 공민왕 시해 후 어지러운 정국을 주도한 인물 이인임, 공민왕 시해범인을 조작하려는 자제위에 대해 자제위의 범행을 밝힌 이인임은 우왕(禑王)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하루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것 그 것이 나는 더 두렵네!” <이인임의 대사>
- 공민왕은 왜 시해모의를 눈치 채지 못했나?
드라마와는 달리 공민왕이 자고 있을 때 살해한 것으로 보아 몰랐을 것, 공민왕은 평소에 주벽(酒癖)이 있어 술만 마시면 주위 사람을 때리기도 “왕이 주벽이 있어서 측근을 자주 때리기 때문에 환관들이 술에 몹시 취하여 정신을 잃게 하려고 다투어 술을 드렸는데···” <고려사절요>
- 공민왕의 자제위 설치 목적은?
공민왕은 신돈이 죽은 후에 자신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자제위를 선택했을 것, 자제위는 공민왕이 원(元)에 인질로 있을 때 원(元)의 뚤루게와 흡사하여 왕의 시중을 들면서 왕과 생각을 공유하게 하는 차세대 인재육성의 역할
- 하지만 본래의 목적을 잃은 자제위는 공민왕 시해로 후세들도 욕망을 위한 미소년 집단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 신돈은 공민왕이 발굴한 인재이고 자제위는 공민왕이 양성하려 했던 인재.
- 자제위가 처음 의도했던 정책의 파트너와는 달리 놀이대상으로 전락된 것이 아쉽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이 “내비의 방으로 들어오게 해··· 김흥경과 홍륜 등을 불러 음란한 행동을 하게 했다. 왕은 옆방의 문틈으로 그 광경을 훔쳐보다가···” <고려사 공민왕 21년 (1372년 9월)>
- 개혁과 욕망의 양면성을 가진 공민왕, 누구에게나 양면성은 존재하는 것으로 불행하게도 공민왕의 허물을 가려줄 차기의 왕이 없었고, 오히려 고려의 치부를 들어내려 했던 조선의 건국세력
- 조선 시대에 쓰인 <고려사>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쓰여진 기록으로 전반적으로는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고려 말기의 혼란을 강조하며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옹호했다는 평가도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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